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영조의 위기 이인좌의 난과 탕평책

thqnrrl 2023. 3. 6.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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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4년 영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전의 왕인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아직 젊은 나이였고 당시 정권은 경종에 반하는 노론이 잡고 있던 터라 경종의 죽음에 의혹이 뒤따랐고 따라서 노론의 지지를 얻고 있던 영조가 즉위하고 나서는 정권에서 밀려나 있던 소론의 불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여 영조에 대한 제거 계획이 세워졌는데 그에 대한 명분은 영조는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것이었으며 그에 따라 밀풍군 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인들을 결속시키면서 민심을 얻으려 했는데 경중에서는 이하·양명하·윤덕유 등이, 지방에서는 정준유·나만치·조덕규·임서호·정세윤·이호·민원보·이인좌(청주인)·신천영·김홍수·이일좌 등이 가담했습니다. 그러면서 전국 여러 곳에서 흉서와 괘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역모 사건에 관한 내용이나 조정을 비방하는 내용을 담은 글을 걸어두면 괘서, 벽에 부착하면 벽서, 흉악한 내용을 담으면 흉서라고 하였는데 여기에는 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거나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내용이 담긴 것입니다. 특히 호남지방에서는 이러한 괘서를 목격하지 않은 자가 없을 정도로 사방에 나붙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괘서의 주동세력으로 급진적인 소론 세력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전 경종의 재위기간인 1722년에 신축옥사가 일어났으니 이 일로 노론의 4대신이 유배형에 처해졌습니다. 그로 인해 실권은 소론에게 넘어갔고 이 여세를 모아 영수 김일경(金一鏡) 등이 목호룡(睦虎龍) 등을 시켜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을 논하였다고 하였으니 노론이 모의했다고 하는 이 고변으로 이미 유배를 떠난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을 처형하였고 노론 170여 명을 유배 또는 문초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영조대에 이르러 무고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영조대의 조치가 소론에게는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조정은 노론의 세상이 되었고 영조는 노론이라는 세력을 얻게 됨과 동시에 그들에게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일은 소론에게 커다란 위기였으므로 그들은 반란을 도모하게 됩니다. 
그러던 1727년에 정미환국이 일어났습니다. 노론과 소론의 극심한 당쟁을 조정하기 위해 소론이 정계에 복귀하도록 정국(政局)의 인사를 개편한 일로 당시 노론이 집권하면서 신축년과 임인년의 옥사 때 제거되었던 노론세력을 완전히 신원해달라고 하였고 그리고 그 때 집권했던 소론을 제거해 복수해 달라고 요구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요구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 영조가 대폭 물갈이를 한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소론의 힘을 얻게 되었는데 이러한 정계의 변화로 반란을 일으키려는 세력들이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던 3월 15일 이인좌가 청주성 함락을 시작으로 막이 올랐습니다. 청주성 함락은 장례식을 가장한 이들이 상여에 무기를 싣고 가서 청주성 가까이에 가져가서 숲속에 숨겨놓았는데 밤이 되어 이 무기들을 들고 성으로 무혈입성하게 됩니다. 성안에는 반란에 동조한 세력이 있던 것입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많이 양반들이 이 난에 가담하였고 그에 따라 그 세력도 늘어났습니다. 그리고 충청도도 외에도 영남과 호남, 평안도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이 반란에 참여한 이인좌는 이 난을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술을 8년간이나 끊었다고 하니 그 의지가 대단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이 이인좌의 난은 무신란이라고도 부르는데 무신년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무신년 새해에 담양부에서 화약고에 불이 났다는 보고가 올라옵니다. 당시 담양부사가 심유현으로 화약 4000근과 각종 무기가 불에 탔다고 합니다. 하지만 진실은 화약과 무기를 빼돌린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기를 이용해 한양까지 들어가려는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 청주지역에서는 이인좌 등이 주도하여 한 300~400냥 정도로 돈을 내서 말을 미리 사놓았는데 이 말들을 군대 동원시에 사용될 것이었고 경상도에서 반란을 주도한 정희량은 돌이 든 궤짝을 들고 은이라 속여 대량의 비단을 매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입된 비단은 깃발을 만드는 데에 사용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의 반란에는 소론과 남인은 물론, 관군과 노비까지 다양하게 참여하였습니다. 당시 평민들까지 가담하게 된 것은 당시 이들이 식량난으로 고생하고 있었는데 세금독촉으로 조선정부에 대한 불신이 더욱 커진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반란군이 관가의 곡식창고를 털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었을 때 백성들의 마음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이인좌를 대원수로 한 반군은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반군은 안성과 죽산에서 격파되었고 청주성의 신천영은 창의사 박민웅 등에 의해 상당성에서 격파되었습니다. 당시 반란이 코앞에 와있던 상황에서도 영조는 피난을 선택하지 않고 도성사수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토벌군으로 소론세력을 임명합니다. 정미환국으로 영조에 의해 소론세력이 등용되었으니 이인좌의 난이 소론세력과 연결되었다고 해서 당시 소론세력이 다같은 소론이라고 보기 어려웠습니다. 그 소론도 영조와 친한 세력과 반한 세력이 있던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이인좌의 난이 토벌되었고 이 과정에서 참여한 소론들이 더욱 영조을 받들게 되면서 기존의 노론의 지지와 더불어 영조는 더욱 힘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인좌의 난에 앞장섰던 것은 오명항이라는 신하였습니다. 
‘병조판서 오명항을 사로도순무사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적을 토멸하게 하였다. 임금이 오명항에게 상방검을 하사하고 유시하기를, “중군과 감병사 이하 여러 장령 중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이로써 종사하라.”하였다.’ 『영조실록』
당시 오명항은 이인좌가 보낸 첩자를 잡아서 반란군의 동선과 계획을 알아내고 작전을 계획합니다. 그리고 그가 편 유인전술로 사정거리 안에 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포와 신기전을 쏘아서 반란군을 사상시킵니다. 그렇게 안성전투에 있어 죽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도 이인좌가 패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사찰로 들어간 이인좌는 촌민들에게 붙잡혀서 결국 서울로 압송되었고 참수되었습니다. 핵심을 잃은 반란군은 전국 각지에서 격파당하면서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반란에 가담한 지역들은 강등되었고 나주가 반란군의 거점이었다는 점을 들어 전라도가 광주의 광자를 넣어 전광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서는 영조는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신중함을 보입니다. 
‘기타 잔약하고 어리석은 백성들이 부득이해서 적을 따른 경우는 그 정상이 애처로우니, 죄를 용서할 만하다.’ 『영조실록』

그러면 무신난이 진압되면서 영조의 정통성의 대한 의문은 완전히 지워졌을까. 30여 년이 지나서 이른바 ‘나주 괘서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755년 2월 4일, 전라감사 조운규(趙雲逵)는 나주의 객사 망화루(望華樓) 벽에 익명의 괘서(掛書)가 붙었으니 그 내용은 ‘조정에 간신들이 가득 차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사건의 주모자로 체포된 사람은 나주에 살던 윤지로 그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헌부의 정 5품에 해당하는 벼슬인 지평을 지낸 인물입니다. 윤지는 자신의 가문을 위기로 몰아넣은 노론과 영조에 앙심을 품고 있었고 그러면서 세력을 규합하기 위해 나주지역을 중심으로 필묵계를 조직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학동들의 계모임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거사를 위한 비밀결사단체였습니다. 이 사건의 실체는 분명치 않으나 영조는 이 사건을 소론급진세력을 주동자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윤지와 그의 아들 윤광철이 처형당했고 이 들 외에도 60여명이 가혹한 심문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무신난의 근본원인을 붕당으로 인해 인재를 등용하지 않은 것으로 보고 탕평책을 실시합니다. 그리고 쌍거호대라 하여 영의정이 노론이라면 좌의정은 소론을 임명하고 판서가 놀노이라면 참판은 소롬을 임명하여 견제와 균형의 원리를 맞추려 한 것입니다. 이로써 영조도 반대세력이 대한 보복보다는 탕평을 추구하기로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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