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조선인이 된 최초 서양인 박연

thqnrrl 2023. 5. 30.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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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

우리나라는 단일민족이라고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느끼실 것입니다. 현대에도 그렇지만 옛날에도 우리도 다민족 국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요. 그 이전부터  활발히 외국인들의 귀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푸른 눈의 이방인은 낯설기만 합니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도 푸른 눈의 백인 귀화인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벨테브레이, 한국이름 바로 박연입니다. 
1627년, 얀 야너스 벨테브레이와 두 명의 동료는 식수를 구하기 위해 제주도에 상륙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우베르케르크 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제주도로 표류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어땠을까. 그들은 만 여 척의 배를 이끌고 전 세계의 바다를 누비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세계 최대의 부국이었고 일본과도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가사키의 데지마가 그 무역창구였습니다. 데지마(일본어: 出島)란 1636년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일환으로 나가사키에 건설한 인공섬으로  1641년에서 1859년 사이 대 네덜란드 무역은 오직 이곳에서만 독점적으로 허용되었으며, 쇄국일본 시기 서양과 교류라는 숨통을 터놓았던 상징적인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곳을 활용하여 일본은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의학, 천문학, 지리학 등을 전수받아 난학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목적지에 벗어난 제주도에 도착한 벨테브레이 일행은 곧 제주도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곧바로 한양으로 압송되었습니다. 
‘박연은 본국에 있을 때 ‘고려인들은 인육을 구워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주도에 표류했을 때, 조선 군사들이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을 준비했다. 배안에 있던 (네덜란드) 사람들이 모두 이 불을 보고 하늘이 사무치도록 통곡했다. ‘저 횃불로 자신들을 구워먹으려고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공사견문록』, 정재륜,
그렇게 끌려온 네덜란드인들은 라이프 출신의 드리크 히아베르츠, 암스테르담 출신의 얀 피에테르츠, 그리고 서른 세 살의 얀 얀스 벨테브레이였습니다. 그렇지만 조선인들에게 이들이 첫번째 서양 표류자들은 아니었습니다. 대항해시대에 간혹 서양인들이 조선으로 떠밀려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전반적인 관례로는 접견국가 출신의 표류자는 직접 송환하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중국으로 보내 조치를 의탁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명과 후금이 다투고 있었고 왜관을 통해 일본으로 보내려 하였습니다.
“(벨테브레이를 포함한) 남만인 3명을 왜관에 들여보냈지만 왜관에서는 일본인이 아니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들은 부산에 4~5년 머물렀다가 조정의 명령으로 서울로 이송됐다.”(<접왜사목초록>)


일본은 이들이 크리스천이며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하게 됩니다. 조선 역시 정묘호란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임금인 인조는 홍이포에 크게 매력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럼 홍이포란 무엇일까. 이것을 이름 그대로 풀이하면 네덜란드 대포란 의미였습니다. 대포와 총을 만드는 기술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조선에 체류하도록 하였고 이들은 귀화하여 훈련도감(조선시대에 수도의 수비를 맡아보던 군영)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1636년 병자호란이 발발하고 벨테브레이는 동료들과 함께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벨테브레이는 동료 2명을 잃고 홀로 살아남게 되었습니다. 전쟁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벨테브레이는 한동안 고국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누구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결국 조선에서 살아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된 벨테브레이와 얀의 발음과 비슷한 박연으로 조선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에서는 투항한 일본인들을 항왜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훈련도감에서 박연은 이들을 거느리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그는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기도 했는데요. 1648년 인조실록에서는 “정시를 실행하여 문과에 이정기 등 9인을, 무과에 박연 등 94인을 뽑았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항복해 온 일본인과 청나라 포로를 감시하는 일 그리고 청나라를 피해 조선으로 귀화해 온 사람들을 비롯한 외국인들로 구성된 지휘관, 또 명나라에서 들여온 홍이포의 제조법 및 조선군에게 지도하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1653년 헨드릭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했을 때 박연은 그들의 통역을 맡았습니다. 
“이전에 조선에 온 남만인(南蠻人) 가운데 박연(朴燕)이라는 자가 있다. 박연이 (제주도에 표착한) 서양인들을 보고는 ‘과연 남만인이 맞다’고 확인시켰다. 서양인들은 대개 화포를 잘 다뤘기 때문에 훈련도감에 편입시켰다. 서양인들 가운데는 코로 퉁소를 부는 자도, 발을 흔들며 춤추는 자도 있었다.”(<효종실록>)

그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에 세워져 있는 '헨드릭 하멜'의 동상


그러나 박연이 조선에 온 지 26년이나 지났고 동료들이 병자호란으로 죽어 박연은 처음에는 통역을 꽤나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또한 하멜일행을 만난 후 숙소에 돌아와 소매가 젖을 정도로 울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박연은 그들에게 조선 왕은 ‘날개가 있어 날아가지 못할 바에는 기대하지 마라’는 대답만 되풀이했다면서 왕은 ‘이 나라(조선)에 표착한 외국인은 결코 본국으로 보내지 않는 게 조선의 국법’이라고 한 말도 덧붙였습니다. 후에 하멜은 결국 1668년 탈출하였지만 그는 조선에 그대로 남은 것입니다. 박연은 본래 탈출을 생각했지만 그의 화포에 대한 기술력을 높게 여긴 효종은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조선에서 벼슬까지 하는 등 좋은 대접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갈 의지가 없다며 철저한 조선인으로서 하멜을 대하기도 했습니다. 서양인으로서 최초의 조선의 귀화인이 되었던 박연, 그는 그렇게 조선인으로 살아가다가 삶도 이 땅에서 마감하게 됩니다.  
조선인들은 하멜에게 물었습니다. “이 자(박연)가 어느 나라 사람인가?”
하멜은 “우리 네덜란드 사람이 틀림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조선인들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틀렸다. 이 자는 조선인이다.”
그럼 조선후기 사람들은 네덜란드 사람들에 대한 기록을 남겨놓았을까. 
“아란타 사람은 깊은 눈과 긴 코에 수염과 머리는 모두 붉다. 발은 한 자 두 치나 된다. 항상 한쪽 다리를 들고 오줌을 누는 것이 마치 개와 같다. 서양의 야소교(耶蘇敎)를 믿는다. 그들은 대포를 설치하는데 이 포를 한번 쏘면 석성(石城)도 부술 수 있는, 홍이포는 그들이 제작한 포이다. 그들은 해마다 6~7월이면 선박에다 각국의 진기한 물건과 특이한 화물을 싣고 장기(長崎)에 와서 정박하면서 서로 물건을 팔고 산다.”(<청장관전서> ‘편서잡고 4’) 이덕무,
그러고 보면 거스 히딩크가 우리나라로 오기 수 백년 전에 우리나라에서 네덜란드는 지울 수 없는 역사적 인연을 맺은 셈입니다. 그럼 벨테브레이가 조선에 남게 된 배경은 더 없는 것일까.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서 벨테브레이로 불리던 시절 같이 표류한 부하 2명이 벨테브레이를 '호탄만'이라고 불렀다는 조선 측 기록이 있는데, 호탄만은 네덜란드어 Hoofdman(대위 or 과장을 의미) 정도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원양일은 힘든 것으로 인도 회사 출신 선원 중 살아서 본국으로 돌아간 네덜란드인은 1/3밖에 안 되며, 그나마도 평균 수명이 40세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험난한 일을 할 정도라면 범죄자도 마다하지 않았으니 동인도 회사 선원 출신이라면 인식이 좋지 않았습니다. 국가가 공인한 무역선에 탑승한 하멜은 부유한 집안출신이자 정식선원이었고 대포에 관한 지식도 없던 지라 조선정부에서도 그들을 방치했으나 박연은 사략선에서도 무기나 화포를 담당하는 직책을 맡았고 이러한 재능으로 조선에서도 인정받아 후한 대접을 받으니 이것이 박연이 조선에 정착한 이유일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정부에서 그의 출국을 허가하지 않은 것이 가장 큰 이유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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