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좌원대첩과 청야전술
thqnrrl
2023. 9. 2.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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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림답부는 단연코 신대왕을 있게 한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대왕은 왕위에 오른 후, 명림답부에게 국상이란 관직을 주고, 패자의 관등을 주어 나라 안팎의 병마(兵馬: 군대) 관련 업무를 맡았습니다. 특히 신설된 국상이란 관직은 이전까지 고구려 최고 관직인 좌보(左輔)와 우보(右輔)를 합친 것으로 이로써 명림답부는 왕에 버금가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습니다.
명림답부의 활약은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서기 172년 후한의 군대가 쳐들어 왔습니다. 신대왕은 신하들을 모아놓고 회의를 하였습니다.
‘적은 군사 숫자가 많다고 고구려를 업신여기고 있습니다. 나아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겁이 많다고 간주,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습니다. 한 사람의 병사가 요새를 지키면 1만 명의 적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군사가 많더라도 어쩌지 못할 것이니 나아가서 싸워야 합니다.’
이에 명림답부는 다른 주장을 합니다.
‘“그들은 군대가 많고 강하니, 지금 맞서면 우리가 불리할 수 있습니다. 적은 1000리 넘게 달려왔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할 것입니다. 싸움이 오래 지속되면 저들이 불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성벽을 높이 쌓고, 주변에 물구덩이를 깊이 파고, 들판을 비워두면 적이 공격하지도 식량을 구하지도 못해 철군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공격하면 필승입니다.”
이른 바 고구려의 청야전술의 시작인데요. 명림답부의 예상처럼 결국 후한은 병사를 되돌려야 했다. 명림답부는 때를 놓치지 않고 수천 기병을 이끌고 추격, 좌원(坐原)이라는 곳에서 크게 무찔렀습니다. 이 때의 패배가 뼈아팠는지 중국 측에서는 그 기록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신대왕 15년(179) 9월 명림답부가 죽었습니다. 그의 나이 113세, 왕이 친히 가서 슬퍼하고 7일간이나 조회를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를 갖추어 질산에 장사 지내고 20여 호의 수묘가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12월 신대왕도 죽었습니다.
이러한 청야전술을 펴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었습니다. 비축된 식량이 넉넉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들판을 비우고 성안에 있는 동안 농사를 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청야전술’은 고구려처럼 국력이 강하고, 경제력이 튼튼해야 가능할 작전이었습니다. 고구려는 집집마다 식량창고인 ‘부경’이 있을 정도로 비축식량이 많았습니다. 적이 쳐들어오면 부경에 있던 식량을 성 안으로 옮겼습니다.
이러한 청야전술이 꼭 승리를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고 신중히 선택해야 하는 작전이었습니다. 고려 성종 12년(993), 거란이 침입합니다. 성종 임금은 서희(徐熙∙942∼998)를 중군사로 임명하고, 스스로 안북부로 나아가 전쟁을 지휘하였습니다. 거란이 점점 개경 쪽으로 오자 성종은 회의를 열었고 결과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황주에서부터 철령까지를 국경으로 정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성종 임금은 서경의 창고 문을 열고 비축했던 쌀을 백성이 마음대로 가져가도록 한 것입니다.
‘식량이 넉넉하면 성을 지킬 수 있고 싸움도 이길 수 있습니다. 전쟁의 승패는 힘의 강약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상대방의 약점을 보아서 행동할 따름인데 어찌 갑자기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하물며 식량은 백성의 목숨인데, 차라리 적의 군량이 될지언정 헛되어 강 속에 버리겠습니까.‘
청야전술은 때가 있는 법입니다. 668년 고구려도 나당연합군에 패해 멸망했는데요. 고구려군이 당나라군을 상대하는 전술은 당나라 현지에서 식량을 조달하지 못해 굶주리길 기다렸다가 역습하는 청야작전이었습니다. 하지만 당군은 한강을 장악한 신라로부터 식량을 지원받았고, 결국 668년 고구려는 식량 부족으로 고구려의 작전을 실패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래 청야전투는 북방기마민족이 고대로부터 사용하던 큰 전술 중에 하나입니다. 청야전투는 자유자재로 공격을 하는 동시에 불리한 경우 작전상 후퇴도 할 수 있는 광대한 영토라는 넓은 공간이 있어야 유리한 전략인데요. 하지만 고구려는 광대한 지역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면서 동시에 어느 정도 청야작전을 전개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습니다. 바로 험준한 산악을 거점으로 활용한 것입니다. 고구려는 이러한 지형을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방법으로 활을 주요 무기로 채택했습니다.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멀리서 쏘아대는 활은 개활지에 비해 위력이 배가될 수 있습니다. 지리적 이점을 이용하면 소수부대로라도 적의 접근을 막을 수 있습니다. 더구나 활이 한반도의 지리적 특성에 부합하는 무기라 하여도 항상 고구려가 원하는 전장에서 싸움을 벌이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널따란 평지에서 적들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는 방법 중 하나가 인공 장애물을 만드는 것입니다. 간단한 목책을 세우고 마름쇠 같은 것을 부려놓는 것도 방법입니다. 고구려는 산성(山城)을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활이나 노 같은 무기들은 성에 의지해서 싸울 때 더 강력한 위력을 발휘합니다. 성을 공격하는 적의 보병과 기병은 성에 닿을 때까지 거의 전투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성안에 있는 수비군들의 활이나 노 등의 공격에 일방적으로 노출됩니다. 가공할만한 위용을 보이는 공성(攻城) 무기 등도 성문 또는 성 자체를 파괴할 때까지는 공격 측이 거의 일방적으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고구려는 적군이 침공해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모든 주민들은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의해 인근에 있는 산성으로 들어갑니다. 물론 이들이 입성할 때 청야작전에 따라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모두 태우거나 파괴하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고구려는 산성으로 철수할 때 큰 짐을 갖고 가지 않았습니다. 산성에는 항상 외적이 침입할 때 들어가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식량과 전략 물자 등을 비축해두고 있었습니다. 산성전투와 청야전투는 고구려가 항상 배수진을 치고 적군에 대항했다는 것이므로 산성에서 군과 관, 민 모두 하나가 되어 적군과 싸웠습니다. 고구려가 이러한 작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의 기후도 한몫했습니다. 오늘날의 만주지역인 고구려 영토에서 원정군이 혹독한 겨울 기후를 버티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중국의 『주서』도 고구려의 전술은 ‘성안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여 두었다가 적군이 침입하면 성안으로 들어가 굳게 지킨다’고 기록했습니다. 성안 농성이 주 전략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적이 성을 공격하기가 그만큼 어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좌원전투는 이러한 청야전술이 활용된 고구려 가장 초창기 싸움 중 하나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려의 3차 여요전쟁에서도 활용되었으며 세계 전쟁사에서 많이 활용되는 전술입니다. 고구려의 특기이지만 어느 정도 보편화된 전술인데요. 한편 2009년도 쯤 살수대첩 관련 소설이 나왔는데 그 책에서는 역사적 자료 어디에서도 을지문덕 장군이 둑을 터뜨려 별동대를 수장시켰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주장하며 을지문덕 장군이 승리할 수 있게 된 원인은 수공이 아니라 들판의 곡식을 치우고 들판을 태우는 '청야전술'을 통해 살수대첩에서 승리를 거뒀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살수대첩에서 승리한 을지문덕 장군이 살수대첩에서 청야전술을 사용한 것으로 인해 귀족들의 견제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귀족들이 청야전술로 인해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고 위협을 느끼자 을지문덕 장군을 견제, 결국 귀양을 보내는 것으로 매듭 짓는 이야기인데요. 청야전술이라는 것은 아군에게 있어서 전후의 피해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며 그 효과가 나타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됩니다. 성공되더라도 후유증은 남게 되며 주민들의 반발도 받아야 하는 전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전술이 사용된 좌원전투에서 이 전략이 가져올 후폭풍을 예상못한 것은 아닐진대 그럼에도 이 전술을 써서 고구려는 후한을 상대로 승리를 거둘 수 있었고 명림답부가 죽었을 때 왕이 슬퍼한 것에는 후한의 침략이라는 위기에서 구해낸 영웅을 이제 보내야 한다는 것에서 나온 슬픔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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