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고구려

고구려 역사상 최악의 패배 비류수전투

thqnrrl 2023. 9. 3.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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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제 11대왕은 동천왕이었습니다. 이름은 우위거(憂位居)이고, 어릴 적 이름은 교체(郊彘),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고구려조에는 위궁(位宮)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제10대 산상왕(山上王)의 아들로 어머니는 관나부(貫那部) 주통촌(酒桶村) 출신입니다. 이름은 후녀(后女)라고 하나 성은 전하지 않습니다. 고구려 왕들은 연나부 출신의 여인을 왕비로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의 힘을 빌어 정권을 유지하고자 함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연나부가 더욱 힘이 커지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이에  산상왕이 주통촌 출신의 여자를 소후로 맞이한 것은 우씨를 위시한 연나부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주통촌 여자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이 동천왕으로 그는 213년(산상왕 17) 1월, 동천왕은 5살의 나이에 왕태자에 책봉되었고 고 산상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19살이었습니다, 
동천왕에 대해서는 그 성품이 너그럽고 인자하다고 하였습니다. 우씨왕후는 산산왕의 부인으로 동천왕에게는 어머니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동천왕이 친아들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씨왕후는 자신의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했는데 어느 날 사람들을 시켜 왕이 타는 말의 갈기를 잘라버리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동천왕은 “말이 갈기가 없으니 가련하구나.”는 말을 할 뿐이었습니다. 이후에도 우씨 태후는 시녀로 하여금 왕의 식사를 할 때에 국을 일부러 엎지르도록 했지만 동천왕은 이마저도 화를 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동천왕은 우씨 태후에 대해 예를 다하여 모신 것입니다. 
동천왕 재위시기 중국은 위는 촉과 오로 나뉘어져 있었고 선비족, 공손씨(公孫氏)의 연(燕), 그리고 그 동쪽에 고구려가 있었습니다. 특히 위나라의 동쪽 끝이며 고구려의 서쪽인 요동 지역에 190년경부터 238년까지 있던 것은 공손씨 세력으로 본래 후한의 요동 태수였던 공손도는 원술, 원소, 손견처럼 후한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자립하여 발해만을 둘러싼 요서와 요동 지방, 그리고 산동 반도의 일부 지역을 다스렸습니다. 공손 씨 세력과 고구려의 인연은 산상왕대로 올라가는데요. 아우인 연우가 자신을 제치고 왕이 되었다고 하자 이에 분개한 발기가  공손도를 만나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고 주장하며 억울함을 호소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왕위를 되찾을 수 있도록 군사를 빌려줄 것을 청하였습니다. 공손도는 이를 받아들여 발기에게 30,000명의 군사를 내주었고 이에 그는 공손도 휘하의 군대를 거느린 채 고구려에 쳐들어왔습니다. 발기가 요동 공손 씨의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오자 산상왕은 동생인 고계수로 하여금 군사를 주어 이를 막게 하였습니다. 이 싸움에서 계수는 한나라 군대를 격파해 대승을 거두었고 크게 패한 발기는 그대로 도주했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고구려와 공손 씨와의 관계는 좋을 수 없었습니다. 

당시 중국은 위, 촉, 오로 분열되어 있었고 오나라는 외교를 통해 위나라를 압박하려 했습니다. 또한 233년 오나라는 공손씨에게 진기한 보물을 보내어 협력을 다짐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손씨는 위나라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오나라 사신들에 대해 냉하게 대해더니 그들의 목을 베어 위나라에 보냅니다. 이에 오나라 사신들 중 일부가 도망하려 고구려에 도착합니다. 고구려 동천왕은 이들을 환영했는데요. 이를 기회로 고구려는 오나라와 우호관계를 가질 수 있었고 이를 통해 고구려는 공손씨세력을 견제하고자 하였습니다. 오나라입장에서는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배후세력이 필요했는데 공손씨 세력과의 우호가 쉽지 않은 마당에 고구려와 손을 잡게 된 것은 좋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나라와 고구려가 생각에 조금 차이가 있었는데요. 오나라는 위나라와 공손씨세력을 견제해야했기에 고구려와 친하게 지내는 것이었는데 다음 해에 오나라사신이 고구려에 도착해 보니 이미 위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동천왕을 만나고 있었습니다. 이에 화가 오나라 사신들은 동천왕을 뵙지 않고 동천왕이 보낸 30여명의 인질을 잡고 위나라 사신들을 만나는 것에 대해 따졌다고 합니다. 동천왕이 이에 대해 사과하고 말 수백필을 보냈는데 오나라 사신들도 인질들을 풀고 진기한 보물을 고구려에게 주고 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은 동천왕을 볼편하게 만들었습니다. 236년 오나라 손권은 다시 사신을 보냈을 때 절교를 선언하고 오나라 사신의 목을 위나라에 보내어 위나라와의 우호를 다짐했습니다. 238년 위나라가 공손연(公孫淵)을 포함한 요동의 동연을 토벌하자 군사 1,000여 명을 보내 위나라를 지원합니다. 위나라내부에서도 이 원정에 대해 반대했으나 고구려의 지원을 믿고 원정을 보냈고  위나라가 연나라를 공격할 때 수천의 군대를 보내 공손 씨의 배후를 공격하니 연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일로 고구려는 위나라로부터 무언가 혜택을 받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위나라와 직접 국경을 맞대게 되면서 고구려와 위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습니다. 4년 후 동천왕은 위나라 요동의 중요한 전략거점인 서안평을 공격합니다. 이에 244년 위나라는 관구검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합니다. 
 사실 이 시기는 244년 4월 흥세 전투에서 위나라가 촉한한테 패배한 직후였는데, 당시 위나라 최대의 척신인 조상이 대대적으로 촉한을 침공했음에도 실패한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위나라가 동북의 고구려를 침공했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동천왕은 위군의 2배인 20,000명의 보병과 기병을 동원했고 고구려군은 비류수 위에서 싸워 위군을 격파했는데, 베어버린 머리가 무려 3,000여 급(級)이나 되었습니다. 양맥(梁貊)의 골짜기에서도 싸워 또다시 격파했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것이 3,000여 명이었습니다. 2번의 전투로 위나라는 6천 여명의 전사자를낸 것입니다. 
‘위의 대병력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병력보다 못하고, 관구검이란 자는 위의 명장이나 오늘은 그의 목숨이 내 손 안에 있구나.‘

당시 동천왕의 패배에 충신 득래가 충고했습니다. 처음 싸움에 승리했다고 자만하지 말고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한 것이었으나 동천왕은 이를 듣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향후 벌어진 전투에 부여와 모용선비도 이 전쟁에 참여합니다. 모용선비는 위나라를 도왔으며 이전 위나라가 공손시 세력을 멸망시킬 때도 도왔습니다. 이들은 그 대가로 많은 식량과 무기, 각종 물품 등을 받고 위나라와 교역할 수 있도록 권리를 얻었습니다. 또한 고구려와 경쟁관계에 있던 부여도 위나라를 도왔습니다. 부여에서 군량이 공급되자 위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함에 있어서 보급로에 신경쓰지 않고 오직 전투에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위나라의 군대를 과소평가한 동천왕은 5천 명의 철갑기병대를 이끌고 너무나 깊이 적진으로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이는 위나라의 유인책으로 이 전투에서 고구려 군사 1만 8천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동천왕은 겨우 1천 명만을 데리고 압록원으로 도망쳤습니다. 이 때 동천왕은 처자식을 데리고 도망칠 정도였다고 하니 고구려는 사실상 멸말 직전까지 간 셈입니다. 
‘지금 추격하는 병사가 긴박하고 도망치기 불가합니다. 신이 죽음을 결의하고 막을테니 임금께선 피하십시오.’ 
 위나라의 장수 왕기가 추격하자 밀우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추격군을 막아 동천왕을 무사히 피신시킵다. 결국 밀우는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적들에게 포위당하여 부상을 입었지만, 밀우가 적을 막는 사이에 동천왕은 산과 계곡으로 숨어들어가 그 곳에서 다시 군사를 조직할 수 있었습니다. 동천왕은 어느 정도 힘을 되찾자 유옥구(劉屋句)를 보내서 밀우를 구출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에 유유도 동천왕에게 계책이 있다고 말하고는 위나라 장수에게 거짓항복을 하면서 음식을 가져갑니다. 그리고 위나라 장수가 이를 먹으며 방심할 때 칼을 꺼내어 위장의 가슴을 찌르니 위군이 갑자기 혼란에 빠졌고 고구려군은 군대를 세 길로 나누어 급히 위군을 공격합니다. 위군이 어지러워져 진을 정비하지 못하더니 마침내 낙랑으로 물러갔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전투는 비류수전투로 불리며 고구려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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