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야기꾼 전기수

2023. 6. 2. 09: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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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직업이 있었는데요.  기이한 이야기를 전해 주는 사람으로 전기수가 있었습니다. 조선후기에 책을 읽어주는 사람들로 전기수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당시 유행하던 소설을 읽어 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을 전후로 중국의 삼국지와 수호지 등이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대상으로 장터에서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러한 전기수가 출연했던 배경은 무엇일까? 한국 문학의 르네상스라고 말할 수 있는 18세기~19세기는 소설의 독자층이 확대되었고, 그에 발맞춰 다양한 책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판소리가 등장함으로 인해 우리‘문학사의 르네상스를 맞이했다는 말’은 과언이 아니었는데요. 하지만 소설이 유행한다 해도 원하는 비싼 책을 모든 사람들이 사서 볼 수 없었고 그에 따라 돈을 받고 책을 빌려주는 세책점이 생겨났습니다. 이곳에서는 대부분 조선인이 창작한 작품이나 한글로 번역한 필사본을 대여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대한 주된 독자층은 글을 아는 양반가 여성들이었습니다. 세책은 담보를 맡기며 책을 빌리고, 돌려줄 때의 책값의 1/10 정도를 대여료로 내는 방식이었습니다. 담보물품은 놋주발부터 은비녀, 담요 등 다양했습니다. 그 인기는 하늘을 치솟아 부녀자들이 책을 빌려보느라 가산을 탕진한다는 비판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세책은 여러 사람들이 빌려봤기 때문에 질 좋은 종이를 사용했습니다. 표지는 삼베로 싸고 책장마다 들기름을 발라 질기게 했습니다. 특히 글자가 닳지 않도록 책장을 넘기는 부분엔 몇 자를 생략하기도 했습니다. 세책주인은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결정적 장면은 다음 권에 넣는 상술을 넣기도 했습니다. 불만이 쌓인 독자들은 책에 낙서나 욕설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책 주인은 보소. 이놈아, 네 놈이 책을 세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책세를 너무 과하게 받는구나.’
 19세기에는 신분과 관계없이 돈 있는 사람이면 여가생활로 소설을 빌려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많은 독자층을 만족시킬 없었습니다.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세책은 주로 서울에만 있었으니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전기수입니다. 이야기꾼은 우리나라 문학 르네상스에 발맞춰 등장한 전문적이고도 직업적인 예능인으로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책을 암기한 후 연기를 곁들여 실감 나게 낭독해 강독을 사로잡았고, 이들은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을 누비며 활약했습니다. 능력이 뛰어난 전기수는 부잣집에 초청을 받아 이야기를 구연했는데 규방에 드나들기 위해 여자로 변장하거나 의원 또는 방물장수 행세도 했다고 합니다. 


 이야기꾼은 크게 성격에 따라 강담사, 강독사, 강창사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강담사는 흔히 가장 일반적인 형태로, 흔히 우리가 지금 이야기하는 ‘이야기꾼’과 가장 가까우며, 강창사는 강담사보다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기능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야기를 창으로 구연하는 판소리 광대가 강창사였습니다. 강독사는 말 그대로 소설을 청중에게 낭독하는 것으로서 ‘전기수’가 그 일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독본을 가지고 있으나, 보고 읽는 것이 아니라 입에 붙은 대로 암송하여 구연했습니다. 이 들은 부잣집에 초대되어 소설을 낭독하는 일이 많았으며, 여성 앞에서 낭독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의 무대는 부잣집만이 아니었으며 글을 못 읽는 많은 농촌의 잠재적인 독자들에 의해 농촌에도 강독사들이 많이 유행했습니다.
“종로 담뱃가게에서 소설 듣던 사람이 영웅이 실의하는 대목에 이르러, 눈을 부릅뜨고 입에 거품을 물더니 담배 써는 칼로 소설책 읽어주는 사람을 쳐 그 자리에서 죽였다고 한다.”(정조실록 정조 14년·1790년 8월 10일 기사에서)
 조선 영조 때의 시인인 조수삼(趙秀三, 1762~1849)이 쓴 『추재기이秋齋紀異』에는 매일 한양의 번화가를 옮겨 다니면서 이야기를 들려주는 전기수의 얘기가 등장합니다. 전기수들은 주로『삼국지』나 『수호지』같은 중국의 고전들과 『임경업전林慶業傳』같은 영웅소설부터 『운영전』같은 애정소설까지 다양한 소설의 내용을 들려줬는데, 단순히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실린 채로 일종의 연기를 했다고 합니다. 자연스럽게 길을 가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멈췄는데, 어찌나 호소력이 짙었는지 심지어는『임경업전』을 듣던 구경꾼이 전기수가 간신 김자점의 모함으로 임경업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들려주자 흥분한 나머지 담배 써는 칼로 난자해서 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뛰어난 전기수들은 많은 인기를 누렸는데, 그러면서 많은 얘깃거리들을 남겼으니 이업복이라는 유명한 전기수는 그의 얘기를 듣고 감동한 어느 부자의 양아들로 들어갔습니다.  전기수 김호주는 부유한 집안에 드나들며 낭독했고 맛깔난 낭독 솜씨 덕에 집을 살 만한 돈을 벌었습니다.

하지만 조선후기에 모든 계층이 소설과 전기수를 좋아한 것은 아닙니다. 정약용은 소설을 두고 “황당하고 괴이한 이야기가 사람의 교만한 기질을 고취시키고, 시들고 느른하며 조각조각 부스러지듯 조잡한 문장이 사람의 씫식한 기운을 녹여낸다.”라고 하렸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도 여인네들이 세책방에 들락거리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당시 책을 좋아하고 규장각을 설치한 정조도 소설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정조는 『삼국지』, 『수호전』등의 소설류를 패관소품이라 명명하고 수입을 금지시켰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문체반정을 통해 자유로운 글쓰기를 탄압했으며 장원에 급제한 이옥은 이와 관련하여 합격이 취소되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이야기는 불온한 것으로 취급받았습니다. 글공부를 해야 할 선비나 바른 마음을 가져야 할 여염집 아낙네가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쓸데없는 이야기에 빠져들면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다는 논리였습니다. 개혁군주로 잘 알려진 정조는 선비들의 문체가 바르지 못하다면서 검열을 해서 반성문을 바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회적인 분위기 때문에 전기수 역시 탄압과 손가락질을 받았습니다. 사대부 집안의 안채에 드나들던 전기수는 문란하다는 죄목으로 포도청에 끌려가서 죽음을 당했습니다. 이업복도 자신을 양자로 들인 부부의 딸을 겁탈했다는 소문에 시달렸습니다. 하지만 서민들은 책과 문자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재미있는 얘기를 들려주는 전기수에 열광했습니다.  
一. 읊조리듯 노래하듯 읽어라. 二. 가슴으로 외워라.
三. 눈길, 표정, 자세를 청중에게 맞춰하. 四. 이야기가 고조되는 부분에서 잠시 멈춰라. 
전기수는 요전법(邀錢法·돈 얻는 법)이라는 기술을 사용했습니다. 핵심은 침묵에 있었습니다. 심청과 심 봉사가 만날 때, 이몽룡이 춘향의 옷고름을 풀 때, 다음이 몹시 궁금한 대목에서 전기수는 침묵했습니다.
‘노인이 전기소설을 잘 읽었기 때문에 몰려들어 구경하는 사람들이 주변을 빙 둘러 에워샀다. 소설을 읽어가다 몹시 들을만한, 가장 긴장되고 중요한 대목에 이르면 갑자기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러면 사람들이 그 대목을 듣고 싶어서 앞 다투어 돈을 던지면서 ’이게 바로 돈을 긁어내는 방법이야.‘라고 했다.’ 『추재기이』
 청중은 다음 장면이 알고 싶어 앞 다투어 돈을 던졌습니다. 전기수는 돈이 웬만큼 쌓였다 싶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목청을 돋우었습니다. 영조 때 무신 구수훈이 쓴 ‘이순록(二旬錄)’ 속 전기수는 용모가 고왔습니다. 한번 들으면 다시 찾지 않고서 못 배길 만큼 낭독 솜씨도 빼어났는데 이 전기수는 여장을 하고 양반집 안방을 들락거렸습니다. 안방마님 여럿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가 포도대장 장붕익에게 체포돼 비참한 최후를 맞았습니다. 그리고 조선후기 소설 열풍에 힘입어 책보따리 장수 책쾌도 활약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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