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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평통보
조선 초기에 저화라는 지폐가 처음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은 이런 화폐보다는 쌀이나 면포 같은 현물거래를 선호했습니다. 때문에 조선 초기 화폐정책은 경제적 목적을 위한 화폐정책이라기보다는 재정정책이라고 평가되는데, 쉽게 말해 백성들에게 돈을 얻어내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이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동전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이러한 저화를 보완하자는 의미에서였습니다. 동전은 실물 가치를 어느 정도 보증하므로 신뢰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예측에서 세종 5년(1423년) 조선통보를 발행했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습니다. 화폐 사용 경험이 부족했고 화폐에 대한 불신이 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벌어졌을 때, 조선에 들어온 명군이 은화를 가지고 물건을 사려고 해도 물건의 매매가..
2024.06.23 -
세계문화유산 서원
지난 2019년의 일입니다. 조선시대 핵심 이념인 성리학을 보급하고 구현한 장소인 서원(書院) 9곳을 묶은 '한국의 서원'(Seowon, Korean Neo-Confucian Academies)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되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결정하는 세계유산위원회(WHC)는 6일 아제르바이잔 수도 바쿠에서 진행 중인 제43차 회의에서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으로 등재했습니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은 모두 9곳입니다. 영주 소수서원을 비롯해 안동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경주 옥산서원, 달성 도동서원, 함양 남계서원, 정읍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논산 돈암서원입니다. 서원은 조선시대에 유교의 성현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학자를 키우기 위해 전..
2024.06.19 -
신문고
이방원은 태조 이성계와 신의 왕후 한씨의 다섯째 아들입니다. 그는 아버지인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의 왕대비를 움직여 고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공양왕을 왕의 자리에서 끌어내린 사람도, 끝까지 고려를 버릴 수 없다며 버티던 고려의 충신 정몽주를 제거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선이 세워지고 나자 이방원은 정치에서 점점 밀려나기 시작했습니다. 태조 이성계는 자신을 도와 고려를 무너뜨리고 조선을 세우는 데 힘을 모았던 사람들에게 ‘공신’이란 칭호를 내립니다. 벼슬을 주고, 땅도 주었지만 정작 이방원의 이름은 없었습니다. 조선 개국 때 충분히 공을 세웠다고 생각했지만, 세자 자리마저 막내동생에게 밀리고 말았습니다. 맏형은 조선이 세워진 그 다음해에 죽었기 때문에 ..
2024.06.16 -
용비어천가
대한민국 포털사이트 양대산맥인 네이버와 다음카카오는 사용자들에게 위치를 기반으로 한 지도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용자들은 각 장소를 방문한 뒤 별점과 함께 간단한 후기와 소감을 남길 수 있습니다. 이런 별점 평가는 주로 식당이나 카페에 대한 만족도를 기록하는 데 쓰여, 다른 네티즌들이 방문 여부를 결정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2024년) 이런 별점 후기가 독특한 곳에 쓰이고 있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국민들이 조선시대 왕릉을 방문한 뒤 별점 평가를 매기고 있는 것으로 해당 왕의 업적에 따라 별점이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 조선왕조에서 가장 높은 별점을 받고 있는 인물은 단연 세종대왕입니다. 현재 다음카카오에서 여주시에 있는 ‘영녕릉 세종대왕유적지구 세종대왕..
2024.06.13 -
고려 시대에는 어떻게 조세를 옮겼을까.
예나 지금이나 조세는 국가 재정의 원천이 된다는 점에서 국가와 사회 운영에 매우 중요합니다. 또 조세 제도는 각 사회의 역사, 문화, 경제 상황 등을 반영한 역사적 산물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어, 전통 사회와 현대 사회는 조세로 납부되는 물품이 다릅니다. 각 사회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조세 제도의 내용도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습니다. 현대 사회의 조세 물품이 돈(화폐)인 데 반해 전통 사회에서는 곡물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전통 사회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고, 농산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생산 물품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나라 중세 사회에서 조세 제도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었을까? 무엇보다 당시의 토지 제도와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려시대 사람들은 토지를 경작해 생산한 곡물의 ..
2024.06.09 -
조선 건국 세력이 고려 불교를 비판한 이유
조선 전기에 도병마사, 경기도관찰사,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인 남재는 태조 이성계에게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 동방으로 말한다면, 신라가 불교에 미혹하여 그 재력을 다 없애서 탑묘가 민간에 절반이나 되더니, 마침내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의종은 3만 명의 중들을 공양한 것이 한 달에 10여 곳의 절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임천에서 탄식함이 있었으며, 공민왕은 해마다 문수법회를 개최하고 보우와 나옹을 국사로 삼았지만, 고려의 멸망을 구원하지는 못하였습니다.’ 남재는 불교를 믿으면 나라가 곧 망하게 된다고 비판한 것입니다.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도 불교에 대한 내용을 「훈요 십조」에 담았습니다. ‘내국가의 대업은 여러 부처의 호위를 받아야 하므로 선(禪) · 교(敎) 사원을 개창한..
2024.0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