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왜 국민투표를 실시했을까.
2023. 2. 5. 18:1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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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는 1948년이 있던 5.10총선거라고 알고들 있지만 이보다 수백년이 앞서 이미 국민투표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조선의 4대 임금 세종이 실시한 것입니다. 물론 한 쪽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국민투표가 아니고 여론조사가 아니냐는 의견도 존재하지만 국민투표의 성향이 더 강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여론조사란 것이 여론의 동향을 물어 정책에 참고하는 것이라면 국민투표틑 정책결정에 국민을 참여시킨다는 것으로 세종대왕은 이를 실천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세종대왕이 국민투표를 행한 주제는 어떤 것이었을까.
‘백성이 좋지 않다면 이를 행할 수 없다. 각 도의 보고가 모두 도착해 오거든 공법의 편의 여부와 답사해서 폐해를 구제하는 등의 일을 백관으로 하여금 숙의토록 하라.’ 『세종실록』
바로 세법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아무래도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여러 가지 사건을 겪을 수밖에 없었고 그에 따라 조세의 수정도 불가피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토지제도와 조세제도가 허물어졌고 손을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고려 말에 등장한 권문세족이 토지를 독점했었는데 이후 토지개혁이 실시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백성들에게 땅을 나누어주었습니다. 그에 따라 그 세금을 어떻게 거두어야 하는지 고민이 생긴 것입니다. 물론 당시 세금을 걷는 방식에 대한 제도가 없던 것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답험손실법’이라 하여서 관리가 한 해 농사의 소출 결과를 직접 조사해 세금을 매기는 과세법입니다. 이 답험손실법이라는 것은 고려말에 도입된 제도로 원칙적으로 경작지 1결당 논에서 현미 30두를 거두고 밭에서는 잡곡 30두를 받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에 조사를 하는 관리관들의 판단에 따라 세금을 깎아주는 방식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서 관리의 일관되고 정확한 판단이 보장되지 않았고 때로는 부패한 관리의 장난에 인해 백성들의 원성도 커져만 갔습니다. 사실 이러한 부작용은 이전 왕인 태종 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태종은 타도 출신의 조사관을 삼았고 그렇게 조사된 결과를 다시 수령에게 점검하도록 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조정에서 내려간 담당관이 심사를 하게끔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백성들의 불만이 사그라든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종 즉위년인 1418년 강원도 관찰사 이종선이 백성들이 부당한 세금 때문에 원망의 목소리가 높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2년 뒤에는 평안도 관찰사 김점도 답험손실법의 폐해를 지적하고 이후 수확량의 조사 권한을 관찰사에게 위임하기로 요청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지속된 보고에 세종은 고민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존의 조세법으로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가 단기간 내에 담당지역의 수확량을 심사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고 그 과정에서 부정과 청탁이 오갔으며 잘못된 제도의 운영으로 부자들이 세금을 덜 내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담이 더 지우는 일이 생긴 것입니다.
그리고 관리들의 비리가 이러한 그릇된 조세포탈을 가져왔으므로 그들의 비리를 줄이도록 하였습니다. 경북 경주에 내려간 판관 금학이 실무조사원 박춘언과 공모해 풍작을 흉작이라 속이고 경작지를 묵밭이라 허위보고한 것입니다. 그러자 왕은 그들을 일개 수군병사로 강등조치하는 강수를 두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역사책도 탐독한 세종대왕은 하나의 방법을 실시하도록 했으니 그것은 바로 공법(貢法)이라는 제도였습니다. 이것은 평균수확량을 근거로 일정한 곡물을 백성들이 바치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백성들은 자신들이 낼 세금을 미리 알게 되어 준비할 수 있게 되고 국가도 안정적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일 수 있다고 판단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급한 제도변화는 백성들에게 혼란만 가중시킬 것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세종의 고민은 과거시험의 문제로도 출제되었습니다.
‘공법이 시행했을 때 일어나는 폐단을 최소화할 방법을 논하라.’
그리고 문과에 합격한 신하들이 치르는 이 시험에서 장원을 차지한 이가 바로 정인지였습니다. 그는 공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로 결정하고 그 과정에서 백성들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가 진행된 것입니다. 당시 호조가 왕에게 공법 초안으로 논밭 구별 없이 경작지 1결에 벼 10말을 거두자는 의견을 내었고 이것을 주제로 국민투표 혹은 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입니다. 그리고 장작 5개월에 걸쳐 300여 명에 달하는 관리들이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의견을 물었습니다. 투표 인원은 17만 2806명으로 당시 총인구의 4분의 1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찬성이 9만 8657명, 반대가 7만 4149명이 나왔습니다. 찬성이 반대보다 14.2%가 많았던 것입니다. 특이사항으로는 전라도와 경상도가 100퍼센트에 가까운 찬성율을 보인 반면에 함경도와 평안도는 반대율이 90%가 넘었습니다. 그리고 지배층에서 반대가 90%, 3품 이하의 관리들은 60.3%의 반대의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급관리인 품관 또는 촌민 층은 찬성이 57.1%, 반대가 42.9%가 나왔습니다. 그럼 지역에 따라 왜 이런 차이가 나왔을까. 함길도와 평안도는 상대적으로 척박한 지역입니다. 아무래도 전라도와 경상도에 비해 수확량이 적을 수밖에 없었고 반대의 의견을 불보듯 뻔했습니다. 이에 세종은 이 지역에 대해 1결당 7두의 세금을 책정합니다. 그럼에도 반대의견이 많이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기존의 세법을 뜯어고치는 것에 대해 부담을 느끼는 고위층들은 반대의견을 많이 표시하고 그리고 이전 왕대부터 실시해온 제도를 함부로 바꾸면 안된다는 논리를 펴게 됩니다. 아마도 세로운 세법으로 바뀌면 자신들이 숨겨놓은 땅이 들통날 수 있어 아마 달가워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영의정 황희 등은 답험손실법을 유지하자는 의견을 내었고 지역특성을 고려하여 공법과 답험손실법을 선택하여 쓰자는 의견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공법을 잘 다듬어 시행하자는 의견입니다. 또한 토질의 차이를 고려하여 그리고 해마다 작황상황을 고려하여 차등과세를 하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견은 경기도와 전라도의 지방관들이 많은 공감을 하였습니다.
어찌되었던 찬성표가 많이 나왔지만 세종은 곧바로 공법을 시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이 제도에 대한 논의만 7년을 소비합니다. 이 기간 동안 답험손실법을 유지하였는데 그 폐단을 꾸준히 보고되었고 충청도 관찰사인 정인지는 상소를 올려 이제라도 공법을 시행하여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 시범운영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도 잡음이 없던 것이 아닙니다. 세입이 더 늘어나자 공법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이 가중되었다는 의견이 뒤따른 것입니다. 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면밀히 관찰한 것은 세종이었습니다. 이전에는 수확량을 평가하는 관리들을 접대하느라 지출이 많았으나 공법이 있어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세금 징수액은 더 늘었으나 오히려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투표를 실시한 지 10년 만인 1440년에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처음 실시되었습니다. 황해도 관찰사는 흉작을 이유로 법 시행을 늦추자는 의견을 내었고 아직도 조정에서는 반대의 의견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3년 뒤인 1444년에 전국적으로 실시됩니다.
이후에 변화는 계속 되었습니다. 세종은 세율의 차등화를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토지대장 작성을 위한 기구가 만들어지니 그것이 바로 전제상정소라는 특설기구였고 결국 전국의 토지경작지를 토질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고 수확량을 기준으로 해마다 9등급으로 평가하는 차등세율이 정해진 것입니다. 그리하여 총 54등급의 과세기준이 완성되었습니다. 이후에도 이러한 공법 실시에 수확이 없음에도 세금을 내야 한다며 불만이 제기되었으나 이후 공법 실시에 대한 평가는 좋아졌습니다.
세종대왕은 즉위 후 10여 년간 가뭄이 끊이질 않았다고 합니다. 그렇기에 이러한 조세제도에 관해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때에 세종의 지시로 『농사직설』과 같은 우리 풍토에 맞는 농법서가 나오고 우리에게 맞는 달력인 『칠정산 내외편』을 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백성과 농업에 대한 세종의 고민은 천민과 여성, 어린이를 제외한 모든 백성이 참여한 첫 국민투표로 이어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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