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과 집현전

2023. 2. 4. 18:1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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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을 창제한 분은 조선의 4대 임금인 세종대왕입니다. 하지만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초중고 교과서에서도 잘못 알려지고 있는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한글을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공동 창제했다고 하거나 세종대왕이 글자를 만들라고 지시를 하고 집현전학자들이 만들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는 지난 2018년 한글문화연대에서 밝힌 자료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한글은 세종대왕이 눈병이 시달려가며 몸소 만들었고 집현전 학자들이 세종의 가르침과 지시에 따라 한글 안내서인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 참여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집현전 학자들이 만든 건 훈민정음이 아니라 제목이 『훈민정음』이라는 책입니다. 이러한 오류를 범하게 된 데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초증등교과서인 잘못된 내용기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을 참고하여 편찬한 참고서와 사전이 인터넷에 올라가고 잘못된 인식이 더욱 퍼졌다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한글창제와 관련한 오류의 중심에 있는 집현전은 어떠한 곳일까. 세종대왕은 학문을 좋아한 왕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따라서 세종대왕이 설치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이러한 집현전의 설치는 이미 고려 인종 때에 이루어졌습니다. 집현전의 뜻은 현명한 사람들을 모아놓았다는 말로 고려 때 있던 기관을 조선 시대에 다시 부활시킨 것입니다. 당시 이러한 집현전의 부활은 건국 초기에 해결해야 할 숙제가 많았던 조선에게 필요한 기관이었을 것입니다. 비단 학문연구기관으로서 뿐만 아니라 국정자문기관으로 역할을 한 것인데 고려에서 조선으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수많은 인명의 희생들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두 번의 왕자의 난도 들어갈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인재가 부족했던 조선에서는 다시 사람을 발굴하여 나라의 시스템에 도움이 되게끔 구성하는 게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조선 건국에 참여했던 학자들도 이제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새로운 인재의 육성과 기관의 설치는 필수적이었습니다. 
1420년 집현전의 직제가 정비되었습니다. 집현전은 궁중에 두고 “문과 가운데서 재주와 행실이 있고, 나이 젊은 사람을 택해 집현전에 근무하게 해, 오로지 경전과 역사의 강론을 일삼고 왕의 자문을 대비했다.”고 『세종실록』에 기록한 바 조선건국 초기에 세종대왕은 집현전을 학문중심기관으로 삼고 이 기관으로 성삼문, 정인지, 최항 같은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이러한 집현전에서 했던 중요한 일은 왕과 신하의 학술 토론인 경연과 왕세자에 대한 교육인 서연을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전문 지식을 가진 학자들이 왕과 왕세자가 바른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리고 외교문서 작성, 과거시험의 시험관, 실록 편찬 참여 등의 임무를 가지기도 했습니다. 세종대왕은 이러한 집현전학자들이 학문에 연구할 수 있도록 많은 책을 내려주기도 하고 학문에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고 합니다. 

진관사 대웅전의 모습. 조선 세종 때부터 시행된 ‘사가독서’ 제도의 시행처였다.

집현전은 학문연구기관인 만큼 조선의 수재들이 몰려들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박팽년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식년시가 있었는데 이 시험은 3년마다 33명의 인재를 선발하였습니다. 여기서 정인지는 수석으로 합격하였고 신숙주는 3등으로 합격하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집현전을 거쳐간 학자들이 96명 정도 되었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식년시 5등 안에 들었던 그야말로 당대 조선의 뛰어난 두뇌들이 다녀간 기관이 바로 집현전입니다. 세종대왕은 성군으로 현대 우리 일반인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의 뛰어난 리더쉽과 더불어 인정받는 것이 바로 인재경영입니다. 이러한 인재경영의 한 축에는 세종대왕이 부활시킨 집현전이라는 기관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럼 집현전에 속해있으면서 학문에만 정진할 수 있었던 관리들은 좋기만 했을까요. 
‘집현전 관원들이 모두 싫어하고, 대간과 정조로 진출을 희망하는 자가 많다.’ 『세종실록』
지금에서야 집현전이 세종을 대표하는 학문연구기관으로 인식되지만 당시 학자들에게는 피하고 싶고 속한 사람들에게는 빠져나오고 싶은 그런 기관이었던 것 같습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이어지는 과도한 업무에 집현전의 관료들은 스트레스가 쌓였고 이에 대한 불만이 쌓여갔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집현전에 장기근속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정창손은 22년, 최만리가 18년, 박팽년은 15년이니까 장기간 근속하면서 지쳐갔을 것입니다. 이러한 고충을 세종대왕이 알았을까. 세종대왕은 하사품으로 귤을 내리기도 했는데 이는 왕에게 진상되던 귀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조촐한 술자리도 갖도록 했으며 사헌부는 근무태도를 감찰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기관이 집현전을 감찰하려는 것도 세종대왕이 막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유급휴가로 볼 수 있는 사가독서제도도 도입했다고 합니다. 사가독서제도는 3개월 동안 월급 받으면서 책만 읽을 수 있는 제도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집현관(集賢官)을 제수한 것은 나이가 젊고 장래가 있으므로 다만 글을 읽혀서 실제 효과가 있게 하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각각 직무로 인하여 아침저녁으로 독서에 전심할 겨를이 없으니, 지금부터는 본전(本殿)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전심으로 글을 읽어 성과(成果)를 나타내어 내 뜻에 맞게 하고, 글 읽는 규범에 대해서는 변계량(卞季良)의 지도를 받도록 하라.”
이러한 사가독서의 시작은 집에서 틀어박혀서 책을 읽을 수 있는 재가독서의 형태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도 곧 폐단이 나타났습니다. 지인들이 집으로 찾아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할 수 없이 절로 들어가라고 지시를 내리기도 했으며 이미 세종대에 산사독서(山寺讀書) 혹은 상사독서의 형태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가독서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합니다. 사가독서의 기간은 대개 6개월의 기간이었는데 어찌되었던 나라에서 행하는 일이니 통제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이 제도에 참여하게 된 관리들은 자신이 읽은 책의 권수를 매 절 첫 달에 적어서 제출하고 매달 세 차례 읽은 책의 내용에 대한 논문을 제출하며 사가 독서를 마칠 때에는 결과물인 월과를 제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성적과 시상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사가독서라는 제도가 항시 존재했던 것은 아닙니다. 세종 8년 1426년에 처음 실시되었으며 이 때 권채, 신석조, 남수문 등이 선발되었습니다. 이후 세종 24년에는 박팽년, 신숙주, 이개, 성삼문, 하위지, 이석정 등이 참여할 수 있었고 서가독서가 3차로 이루어진 때에는  문종 1년이었습니다. 이 때에는 홍응, 서거정, 이명헌이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가독서가 단절된 때가 있으니 그 때가 바로 세조가 왕위가 찬탈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집현전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성종 때에 집현전과 비슷한 성격의 기관인 홍문관이 생겼고 학자들에게 다시금 사가독서제도가 적용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는 사가독서는 주로 절에서 이루어졌는데 성종 초기에는 사가독서는 궁궐에서 가까운 장의사에서 진행되었으며 이후 서거정의 건의에 따라 독서당을 두도록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1492년에 만들어진 남호독서당이었습니다. 
그리고 집현전에 장기간 근속하고 학문에 정진하면서 관료들은 고관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으로 삼았습니다. 여기를 거쳐간 강희맹, 강희안은 판서의 지위까지 올랐고 노사신은 영의정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서거정은 『동국여지승람』과 『동국통감』을 저술하였고 사육신과 생육신 사이에서도 집현전 출신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집현전 학자인 신숙주와 세종대왕 사이에는 세종대왕이 리더쉽을 알려주는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 겨울밤, 세종대왕이 불이 켜져 있는 집현전에 들어갔는데 신숙주가 엎드려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세종대왕은 자신의 용포를 덮어주었다고 합니다. 세종대왕은 집현전이라는 기관을 통해 관료들로 하여금 학문에 매진하게 하고 때로는 과도한 업무를 부여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따스한 제스처로 그들를 품고 나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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