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정사 혹은 조선 왕자의 난

2023. 2. 2. 18:1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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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나라나 건국 초기에는 혼란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은 조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특히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왕족들 간의 다툼이 치열했는데 조선 초기에 이것이 표면화된 사건이 바로 왕자의 난입니다. 
‘봉화백 정도전·의성군 남은과 부성군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태조실록』
1398년 무인년에 일어나 사직을 안정시켰다고 하여 무인정사라고도 하는 이 사건은 이방원의 주도로 일어나서 이방원의 난이라고도 합니다. 이 사건은 태조의 왕비인 신의왕후의 왕자들이 중심이 되어 이방석과 정도전 일파를 제거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으로 이로 인해 이방석, 정도전, 남은, 심효생, 이방번 등이 숙청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 이후 태조는 왕위를 차남 이방과에게 양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은 도대체 왜 일어났을까. 
당시 이방원은 간신인 정도전이 역모를 모의하여 왕자들을 해치려 했기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개국공신으로 책봉되는 과정에서 정도전의 입김에 의해 이방원이 제외되었는데 이방원은 고려의 충신인 정몽주를 제거하여 조선 건국에 큰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게다가 이러한 정도전이 세자로 추천한 이는 신덕왕후 강씨 소생인 이방원의 이복동생인 방석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방원의 입장에서는 정도전이 역모를 꾸미고 어린 왕자를 세자를 정했다고는 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실 왕위 계승과정에서 자신을 배제한 데에 따른 불만이 표출된 사건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면 희생당한 이방석과 이방원은 어떤 가족관계일까. 

태조 이성계의 아들로는 개국 이전에 사망한 신의왕후 한씨의 아들인 장남 이방우, 후에 정종이 되는 이방과를 비롯 다섯째로 후에 태종이 되는 이방원 등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로 이방번과 이방석이 있으며 세자 책봉 당시 이방번은 11세, 이방석은 10세였다고 합니다. 반면 이방과과 35세, 이방은 나이가 25세였으며 신의왕후 아들들은 대부분 장성했고 그 중 일부는 조선 건국에 어느 정도 공이 세웠을 것처럼 여겨집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첫째 아들인 이방우가 왕위를 이어야 하지만 그는 1393년에 사망합니다. 따라서 적장자로서 왕위계승권은 이방과에게 이어집니다. 그런데 세자 책봉은 신덕왕후의 소생인 방석에게 이루어집니다. 당시 11세의 방석을 책봉한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항간에는 조선 왕조를 개창한 이후에 맞이한 왕비의 아들이라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아마 이러한 과정에서 신덕왕후가 강력하게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권유했을 것입니다. 일찍이 배극렴과 조준 등을 불러 태조가 세자문제를 논의했는데 극렴 등은 ‘시국이 평온할 때에는 적자를 세우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는 먼저 공이 있는 자를 세워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를 몰래 듣던 신덕왕후가 통곡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이러한 신덕왕후의 마음을 알아서인지 방번과 방석 중 방석을 세자를 택하는데 방번은 광패(狂悖)하다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또한 여기에 정도전 또한 동의했을 것이며 태조 이성계 역시 이를 방석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어찌 되었든 이러한 결정은 고스란히 조선 개국 초기에 피바람이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성계 또한 사랑 때문에 장자를 버리고 어린 방석을 후계자로 삼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정도전은 왜 방석을 후계자로 낙점했을까. 한양을 계획하면서 궁궐이름에서도 알고 있듯이 그가 지향한 것은 바로 재상정치를 지향한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것은 자신의 입지도 고려한 것입니다. 

하지만 방석을 세자로 정한 것은 여러 가지 무리가 따르는 결정이었습니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데에는 그가 조선의 초대왕비인 신덕왕후의 소생이라는 점인데 세자의 친모가 한양 천도 이후에 사망하게 됩니다. 아무리 이복형이라 하더라도 세자의 친모이자 종법상의 어머니인 신덕왕후의 부재는 무인정사의 결정적인 이유였는지 모릅니다. 또한 무인정사의 빌미를 준 것은 신덕왕후의 형제들 중 첫째가 아닌 둘째가 세자로 책봉되었다는 점입니다. 이것은 적장자 왕위 계승원칙을 깬 것이었습니다. 또한 세자가 왕위를 이을만한 자질이 있었는가 하는 점인데 이미 이복형들은 조선의 개국과정에서 일정 공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 검증받은 인물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을 다 제껴 놓고 방석을 세자로 책봉한 것은 태조가 위험을 자초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방석의 세자책봉은 환영할만한 세력이 적었고 오히려 적은 많았습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한 후의 후계자라는 점에서 새로운 세력의 인물이라는 점이 어필될 수 있어야 했는데 신덕왕후는 고려 전통의 명문가인 곡산 진주 강씨 집안이었고 이성계가 고려의 중앙귀족으로 진출하는 데 큰 도움을 준 집안입니다. 어찌 보면 이방석도 고려왕조의 시대적 유산으로 해석될 수 있었고 따라서 방석의 세자 책봉은 여러 가지로 설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황만으로 신의왕후의 아들들이 난을 일으킨 것은 아닙니다. 이러한 왕자들의 불만에 불을 지핀 것은 바로 정도전이 실시한 사병혁파였습니다. 당시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진법훈련에 돌입했는데 이에 왕실과 종친들의 사병들까지 동참시켰습니다. 당시 정도전이 왕실의 사병들까지 끌어들인 이유는 그만큼 군사가 부족했기 때문이고 당시 명나라에서 표전문제로 인해 정도전의 압송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조처에 왕실과 종친들은 거세게 반발했는데 정도전과 왕실세력간의 갈등이 극에 치달을 무렵 태조 이성계가 병을 얻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왕자들의 난에 협력한 사람 중에 이방원의 아내인 원경왕후도 있었습니다. 사병혁파로 인해 왕자들이 보유한 병력들은 무장해제 당했는데 원경왕후가 몰래 무기들을 숨겨둔 것입니다. 그리고 이성계가 아프다고 하여 자식들이 모두 모인 마당에 원경왕후가 아프다는 핑계로 이방원을 따로 불러내어 거사를 도운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정도전은 역모를 계획하고 종실들을 해치려 했을까. 그런데 반역을 일으키려 했다는 정도전은 호위병도 없이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실록에서는 군사들이 들이닥치자 침실에서 작은 칼을 가지고 숨어 있다가 발각되자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도전은 ‘자조(自嘲)’라는 시를 남기고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왕자의 난은 이방원이 주도로 일으킨 것인데 공교롭게도 이성계가 위중했을 때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왕자의 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무인정사가 일어난 2년 뒤인 1400년에 2차 왕자의 난을 이방간이 일으킨 것입니다. 회안공 이방간의 참모였던 박포가 주도한 지라 박포의 난이라고도 불립니다. 1차 왕자의 난 이후의 공신책봉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박포는 이방원에 대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방간을 지목하였는데 사실 방간은 다른 형제들과 달리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아니었습니다. 첫째 진안대군이 음서로 벼슬을 하고 둘째 방과는 이성계와 함께 전쟁터를 누볐으며 동생 이방원은 정몽주를 제거한 공이 있었고 아들 중 유일하게 과거시험에 합격한 이력이 있는 반면 방과는 내세울 것이 없었고 다만 그에게는 정치적 야망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박포가 이방간의 마음을 충동질시켜 군사를 일으키게 하였으나 이방간의 군사적 행동에는 역시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그를 변호해줄만한 편이 없었고 그의 난은 실패로 끝난 것입니다. 이후에 왕은 이방원에게 넘어갑니다. 정종에게 정비인 정안왕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없었고 이방원이 왕위를 이어 태종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왕자의 난 이후에 이방원이 질려버린 이성계는 자신의 연고지인 함흥으로 떠나게 되었고 여기서 태종이 이성계를 모셔오기 위해 사람을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함흥차사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른 후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정책(사병혁파, 호패법실시, 양전사업실시, 사건원 설치, 신문고 설치, 창덕궁 건설, 육조직계제 단행)을 시도하였는데 태종 이방원에게 부정적인 평가가 있는 건 당대 사건 왕자의 난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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