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건국과 한양의 설계

2023. 2. 1. 18:1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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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1대 임금은 태조 이성계입니다. 그는 본래 고려말의 장수였으므로 본래 왕이 자격이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옛날에는 왕위를 이어받는 과정에서 옥새를 물려받습니다. 이성계도 고려의 옥새를 넘겨받은 셈입니다. 이성계는 전쟁터에서 상당한 전과를 쌓을 만큼 상당히 기개가 있는 사람이었을 테고 엄격했을 텐데 옥새를 넘겨받을 때에는 그 모양새가 사뭇 달랐습니다. 지금에 와서는 이성계의 조성 창건에 대해 쿠데타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을 텐데요. 후대의 이러한 평가를 의식해서인지 이성계는 왕위를 이어받을 생각이 없는데 상황 자체가 그렇게 되어서 어쩔 수 없이 왕이 되었다는 식으로 실록에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날 (7월 16일) 태조는 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했는데 해질 무렵에 이르러 배극렴 등이 문을 밀치고 바로 내정(內庭)으로 들어와서 국새를 청사 위에 놓으니, 태조가 두려워하여 말과 행동을 잃었다. 이천우를 붙잡고 겨우 침문 밖으로 나오니 백관이 늘어서서 절하고 북을 치면서 만세를 불렀다. 태조가 매우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용납할 곳이 없는 듯하니, 극렴 등이 뜻을 합쳐 상소를 올리며 왕위에 오르기를 권고하였다.’ 『태조실록』
조선의 개창에 대해 역성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왕씨의 고려가 이씨의 조선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하루아침에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뀐다면 백성들은 상당히 혼란스러워할 것입니다. 어딘가에서는 반란이 조짐이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조처일까. 이성계는 고려시대 때 문하시중까지 역임한 배극렴 등을 일등공신에 책봉하는 등 구세력을 안고 가는 선택을 합니다. 사실 이들 중에는 조선 건국에 적극적이지 않았던 사람도 있었다고 하는데 고려 때에 고위직을 거친 신하를 다시 공신으로 책봉하여 마치 고려의 신하들도 조선의 개창에 합의한 것처럼 보이기 위한 퍼포먼스가 필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실록에 기록된 1392년 7월 17일은 이성계가 고려의 국왕으로부터 옥새를 넘겨받은 날로 조선의 건국일이 되는 것입니다. 
새로운 국가를 열면서 이성계와 개국세력에게는 고려는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백성들에게 익숙한 국가이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정해진 이름이 바로 ‘조선’입니다. 사실 역사의 정통성을 찾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는데 고조선이란 국가이름은 몽골과의 전쟁, 그리고 이후에 이어지는 원의 간섭기에 사람들의 머리 한 자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보다 앞선 나라 조선이 서서히 자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에는 기자조선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는데 유교를 국가의 질서로 삼으면서 자연스레 조선이란 국호가 떠올랐을 것입니다. 기자란 사람이 아주 예전에 주나라 무왕에 의해 책봉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성계는 조선의 개창에 협조적이거나 반대하지 않는 세력들과 함께 하면서도 고려와 다른 질서를 구상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국호를 ‘조선’이라 정한 것도 그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이어서 이성계가 강력하게 주장한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천도였습니다. 함흥출신인 이성계는 사실 개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고 새로운 국가를 열어나가기 위해서는 천도는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하여 도읍지로 정해진 곳이 바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한양이었습니다. 

도성전도(청구요람)

한양은 지금의 서울이기도 합니다. 서울은 대한민국의 수도이자 조선의 도읍지였던 곳입니다. 이전인 고려시대에서도 개경에 이은 대도시로 자리하는 곳이었고 남한강과 북한강을 끼고 바다와 가까워 교통이 편리한 곳이었습니다. 옛날에는 수로나 해로를 이용한 교통로를 이용했고 당시 서두어들인 호남 지역의 세곡들 역시 서해안을 거쳐 한강으로 들어왔으므로 지금의 서울은 개경을 제외한 최고의 수도후보였을 것입니다. 그렇게 정해진 수도 한양은 북으로는 북악산, 남쪽으로는 목멱산, 동으로는 낙산, 서쪽으로는 인왕산이 있는 곳으로 이렇게 둘러싸인 곳은 수도방어에 유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국가의 수도가 된 한양에 도성을 쌓고 그 주위로 네 개의 대문과 소문을 만들었습니다. 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이라 하였으며 이러한 이름은 인의예지라는 유학의 사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다만 지(知) 대신 정(靖)자를 써서 숙정문이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가운데에 보신각을 넣어 인의예지신이 완성되었습니다. 이 대문의 이름을 지은 사람에 대해서는 확실한 기록은 없으나 정도전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그가 한양 설계의 책임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이름은 지은 궁궐 이름이 바로 경복궁입니다. 
경복궁의 전각에도 이름이 있는데 이러한 것에 정도전이 관여하였으니 여기에는 정도전이 가지고 있던 정치사상도 알 수 있습니다. 경복궁의 가장 중심이 되는 전각인 근정전은  ‘임금이 정치를 부지런히 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사정전(思政殿)은  ‘생각을 하면서 정치를 하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궁궐의 의미는 마치 한 나라의 군주에게 주는 메시지와도 같다고 느껴지는데 당시 조선도 여타 다른 나라들처럼 세습군주제인 나라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왕위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아 권력을 쥘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에 대해 정도전의 우려와 그로 인한 폐해를 막기 위한 조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정도전은 지금으로 따지면 의원내각제에 가까운 정치체제를 꿈꾸었으며 이는 임금은 상징적인 존재로 머물게 하고 나라의 일을 능력 좋은 재상이 이끌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새 왕조 조선의 도읍지 한양 안에 지어진 경복궁은 사실 흥선대원군 때 중건된 모습입니다. 애초에는 칠백여 칸이 넘는 규모였는데 중건되면서 7000여 칸이 넘는 규모로 증축되었습니다. 당시 조선 초기에는 궁궐을 너무 크게 지으면 재정적인 압박과 백성의 수고가 가중되므로 왕과 관련된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으리으리하게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조선은 개창한 것은 이성계였지만 한양과 조선의 정치체제를 설계한 것은 정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정도전에 대해서 당시 주변국인 명나라에서 압송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른 바 표전문 사건을 일으킨 것입니다. 때는 1396년, 당시 조선에서는 명나라에 중국의 황제에게 또는 황태후, 황후, 황태자에게 글을 올리곤 했는데 이 글들을 전자는 표문, 후자는 전문이라 하였습니다. 그런데 명나라에서 조선 건국 초기에 표전문의 글귀가 예의가 어긋난다고 트집을 잡은 것입니다. 명나라 초기에는 문자옥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는 명태조 주원장과 관련있는 일이었습니다. 주원장은 과거 도적이기도 했고 중으로 생활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것을 연상시키는 글자의 사용을 금했던 것입니다. 예를 들면 도적 도(盜)라든가 도둑 적(賊)같은 글자들의 사용을 금했습니다. 그리고 중 승(僧)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스님을 연상시킨다는 이유로 빛 광(光)도 금지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로 명나라에서는 문신들이 화를 입는 사건들이 있었는데 이를 조선이 보낸 외교문서에도 적용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글을 작성한 사람을 압송하라고 하면서 정도전을 지목한 것입니다. 사실상 트집을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정도전이 요동정벌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하는데 사실상 실제로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으므로 진위여부는 알 길이 없습니다. 요동정벌을 계획했다가 회군하여 세워진 나라가 조선인데 다시 요동정벌을 추진한다는 것은 쉽사리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고 그리고 당시 명나라는 체계가 잡혀가던 시기여서 위화도 회군시기 때보다 더욱 실현성이 없는 계획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도전은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결국 명나라로 가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명나라의 요구를 들어주게 되면 다음에도 계속 불합리한 것을 요구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도 명태종의 죽음과 왕자의 난을 통한 정도전의 죽음으로 인해 일단락되었었습니다. 조선은 이성계는 건국했지만 그 과정에서 정도전이 많은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는 백성을 위한 국가라는 생각이 작용되었습니다. 역성혁명을 통해 세워진 조선이지만 그 과정에서 여론을 의식하고 민본에 의한 정치를 행하라는 국가의 건국이념을 투영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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