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녕대군은 왜 폐위되었을까.
2023. 2. 3. 18:1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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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례의 왕자의 난을 거치면서 왕위에 오른 조선의 3대 임금 태종은 왕권강화에 힘을 쏟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정치적 행보는 후에 뒤를 잇게 하는 제 4대 임금 세종의 치세를 있게 했습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르는 과정까지 태종에게는 비판이 따랐으나 개국 초기의 혼란을 수습하고 후대 임금에게 안정적인 정권유지를 할 수 있게끔 토대를 마련한 점은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럼 태종의 뒤를 이은 세종은 적장자였을까.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태종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세종으로 하여금 왕위를 잇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면 세종은 태어났을 때 왕위 계승 서열에 1순위는 아니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태종에게는 첫째 아들이 있으니 그가 바로 양녕대군입니다.
양녕대군은 태종과 원경왕후의 장남이었습니다. 그가 특별히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조선의 4대 임금의 자리는 그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세자로서 공부를 게을리 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가 왕위를 잇지 못하게 된 것은 의문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가 공부를 소홀히 했던 점이 왕위를 잇지 못하게 했던 요인이었을까.
장남인 양녕대군은 체격도 커서 태종이 마음에 들어하던 아들이었습니다. 세자 시절에는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오기도 하고 당시 태종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고 하니 그가 정치적 능력이 아예 없었던 것도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사신이 많으면 그로 인해 우환도 있을 수 있는데 세자가 가서 그런 일이 없으니 태종의 마음에 들었던 것입니다. 또한 경회루 편액도 그가 썼다고 전해지는데 이정도로 보면 그는 어느 정도 왕의 자질이 없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입니다.
더욱이 그의 아버지 태종은 왕자의 난을 일으킨 바 그것은 당시 세자로 책봉된 방석이 적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태종의 후사의 선택은 당연히 양녕대군이었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왜 그러지 못했을까. 사실 조선의 왕들을 보면 적장자로서 왕위를 계승한 것은 27명의 왕 중에 일곱 명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고작 1/4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적장자 왕위 계승을 원칙으로 하는 성리학질서를 표본으로 하는 조선사회의 의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왕위계승에는 여러 사건들 예를 들면 반정이라던가 후궁의 아들이 왕이 되는 등, 혹은 부왕의 반대에 부딪히는 등 조선의 왕위계승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그가 세자자리에서 폐위된 것의 주요 이유로 바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405년에는 세사전의 내시가 곤장을 맞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공부를 게을리한 세자를 대신하여 맞은 것이었습니다. 사실 왕세자가 받는 수업은 빡빡했다고 전해지는데 세자가 된 양녕대군은 이를 견디지 못한 것입니다. 그럼 당시 조선시대 왕세자는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당시 성리학적인 질서를 중요시하는 조선에서는 선비적인 모습을 강조하여 왕세자를 교육시켰는데 당시 왕실에서는 왕세자를 성리학적 자질을 갖춘 군자의 모습을 갖추도록 교육을 했습니다. 그래야만 많은 백성들에게 존경받고 모범이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왕세자가 받는 교육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일반 사대부 가문의 자제들이 받았던 교육을 받은 것입니다. 왕세자는 8~15세에 이르는 나이에 성리학적 교육과정에 따라 관련된 서적을 탐독했다고 합니다. 왕세자는 성리학수업을 받게 됨에 따라 자연스레 성균관 유생의 신분을 갖게 되는 입학례를 갖추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8세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세자 교육기관인 시강원이 구성되고 사(師)부, 이사(貳師), 빈객(賓客)의 스승과 십 여명의 시강원 관연이 임명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구성된 스승들은 왕세자에게는 왕족을 제외하고 존대해야 할 대상이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왕세자를 교육하는 것은 서연(書筵)이라고 하는데 여기에 속하는 정규강의는 조강, 주강, 석강이고 비정규강의는 소대(召對)와 야대(夜對)가 있다고 합니다. 이는 시간대별로 명칭이 붙은 것으로 이렇게 보면 아침, 점심, 저녁, 밤 모두 공부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꼭 그렇지 않고 정규강의는 하루에 한 번만 이루어지고 대부분 주강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이 때 시강원 관원 2명이 들어가 책 내용을 읽고 뜻을 해설해주면 왕세자는 이를 암기해야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정규수업 뒤에는 100번 읽을 것을 권장했다고 하니 이는 ‘독서백편의자현(讀書百遍意自見) 즉, 글을 백 번 읽으면 뜻은 저절로 깨친다는 의미에서 연유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연은 매일 하는 것을 규칙으로 하고 성리학교재를 이용하여 학습하였는데 순서는 소학(小學)』→ 『대학(大學)』→사서(四書)→오경(五經)→역사서(歷史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회강례(會講禮)를 통해 왕세자가 이미 배운 것에 대한 복습이 이루어졌으며 11세 이후에 한 달에 두 번 정도 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배운 내용을 암송하는 것으로 시작하였으며 참석한 관원들과 함께 질의응답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합니다. 이러한 회강례가 끝나고 나면 술자리가 벌어지고 품계에 따라 표범가죽, 비단, 옷감 등이 주어졌는데 그 비용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회강례를 자주 열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왕세자 교육이 빡빡한 일정 속에 치루어지다 보면 강도가 세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마 양녕대군도 그러한 경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공부를 게을리한 양녕대군은 스승과 태종으로부터 질책을 듣는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특히 양녕대군은 매사냥을 즐겨 해서 당시 양녕대군을 가르친 시간원스승들이 힘들어했다고 합니다. 아마 이러한 것에는 태종의 교육열도 한 몫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은 500년을 존속한 나라이지만 제대로 된 왕세자 교육을 양녕대군이 처음입니다. 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는 시점에서 역시 왕세자에 대한 교육도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고 왕세자를 교육시키려 했지만 양녕대군이 이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공부를 하지 않았던 양녕대군에게 왕세자로서 결격사유가 또 하나 있었으니 그가 여자에 빠져있었다는 것입니다. 양녕대군이 열 일곱살 때에는 봉지련이라는 기생을 보고 마음에 들어하여 세자궁으로 끌어들였다가 태종으로부터 큰 질책을 받았고 초궁장이라는 기생하고도 스캔들이 났는데 이 초궁장은 바로 정종의 애첩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리라고 하는 여자하고 만남을 가졌는데 이 여인은 사대부의 첩이었습니다. 당시 태종은 이에 분노하여 어리를 궁에서 내쫓고 세자로부터 반성문을 받아내기까지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는 어리를 다시 세자궁으로 불렀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둘 사이에 아이까지 낳았는데 이후에 이 둘 사이를 갈라놓았지만 세자는 개경에 있는 태종에게 사과하고 돌아가는 길에서 다시 한 번 어리를 만납니다. 이에 주변사람들이 어리에게 비난의 손가락을 해서인지 어리는 자살하고 맙니다. 사실 왕세자가 여자를 만나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된 것 아닙니다. 양녕대군이 추구한 만남이 유교윤리에 어긋났기 때문입니다. 또한 왕세자가 왕의 말을 어기고 금지된 만남을 해온다면 왕으로서도 계속 두고 볼수만은 없는 일입니다. 그리하여 양녕대군은 폐위되었습니다.
양녕대군의 스캔들에 대해 충녕대군은 이러면 안된다고 말립니다. 서울에는 지덕사라는 절이 있는데 양녕대군이 동생을 위해 왕위를 양보한 것이 지극한 덕이다라는 뜻을 지녔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볼수만은 없는 것이 이후의 행보, 계유정난의 과정이라던가 단종복위운동에 대해 단종을 처단하라고 했던 것을 보면 기본적으로 권력욕도 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왕위가 충녕대군에게 갈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누군가가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이어받을 수 있다는 힌트를 주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충녕대군에게는 효령대군이라는 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효령대군은 애초에 태종의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술을 아예 못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었지만 무엇보다 자주 웃는다는 것이 기록된 것을 보면 리더로서 결단력이 부족했다고 판단된 건 아닌가 합니다. 왕위계승문제로 골치를 앓았던 조선 초기 왕실의 고뇌는 앞으로 나올 세종이라는 인물의 등장의 초석이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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