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의 승리와 그 과정

2023. 1. 29. 09:3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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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조선을 침략한 일본은 육군과 수군으로 조선을 압박하였고 육지에서의 일본군의 행보는 그야말로 파죽지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계획은 차질이 생겼습니다. 일본군은 자신들의 수군이 바다에서 조선에게 패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일본군은 옥포, 당포, 당항포, 율포 등지에서 연거푸 패배를 거듭하였습니다. 사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수군에게 조선의 수군을 격파하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육군과 합류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그리고 명나라까지 북상하라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수군은 3개의 부대로 조직되었습니다. 그리고 와키사카 야스하루의 1부대를 중심으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수군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일본의 제 1부대는 대선 36척, 중선, 24척, 그리고 소선 13척으로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7월 7월에 견내량으로 이동하였습니다. 여기에는 구키 요시타카가 지휘하는 제 2부대와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제 3부대가 근처의 안골포로 이동하였습니다. 당시 일본의 육군은 금산에서 있었으므로 이들 수군은 이들과 합류하여 북상하여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와 합칠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움직임은 이순신은 미리 간파하고 있었고 이전부터 조선의 수군은 모의훈련을 진행해오고 있었습니다. 

본문에 인용된 '견내량파왜병장' 보고서

7월 7일 조선에게 하나의 정보가 전달되었습니다. 적선 70여 척이 낮 2시 경에 견내량에 들어와 대기하고 있다는 것으로 견내량은 당시 한산도로 들어가는 길목이었습니다. 당시 「이충무공전서」에 기록된 전투보고서 제목은 ‘견내량파왜병장’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럼 왜 제목을 한산파왜병장이 아닌 갠녀량왜병격파보고서라고 했을까. 이순신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있을 이 전투의 대승의 요인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싸웠다는 사실보다 견내량에 있던 적을 끌어내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보고서에 이순신은 "견내량의 지형이 협착하고 또 암초가 많아서 판옥선처럼 큰 배는 서로 부딪혀 싸우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왜적들은 만약 형세가 궁해지면 바다 기슭을 타고 뭍으로 올라가겠기에 한산도 바다 가운데로 끌어내어 완전히 잡아버릴 계획을 세웠습니다."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즉 견내량에서 적군이 패배하면 육지로 도망갈 수 있었기 때문에 한산도 앞바다로 그들을 유인한 것이 전투의 주요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럼 견내량이란 곳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던 곳일까. 이 곳은 통영반도와 거제도가 마주보는 좁다란 바닷길이라고 합니다. 길이가 3km에 이르는 이 곳은 폭이 400m에 달하고 그것도 썰물의 영향으로 물이 빠지면 200m로 줄어드는 곳입니다. 그리고 깊이가 얕은 가장자리는 판옥선과 같이 큰 배는 바닥이 닿을 수 있는 지형입니다. 그리고 암초가 곳곳에 도사리고 있고 조선 간만의 차도 심한 곳으로 물길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항해자들은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는 곳입니다. 한산도 대첩이 벌어진 날, 이곳의 수위가 가장 높은 시각은 오전 9시, 그리고 썰물이 되어 물이 빠져나가 12시쯤 되면 그 속도가 가장 빨라졌습니다. 아마 이순신은 이러한 견내량의 지형조건과 바다의 흐름을 잘 알고 전술을 짰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지형을 이용한 전술을 짜는 것은 오롯이 이순신만의 공은 아니었는데 당시 지방관이던 어영담의 공도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뒤에 항상 바닷가 여러 진에 소속되어 있어 바닷길에 대해 측량하고 정보를 축적해 왔는데 따라서 바다지리에 해박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지식과 이를 적극 수용한 이순신의 결단으로 조선 수군은 한산도 앞에서의 일전을 준비하게 되었습니다. 

한산도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는 조선과 일본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조선이 패배할 경우 일본은 그 길로 전라도를 장악하고 군량미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이 패배할 경우 식량을 현지에서 조달해야 하는 어려움에 처해있던 왜군을 더욱 고립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7월 8일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함대는 견내량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조선수군의 출현을 알아챈 일본군도 움직임이 바빠졌습니다. 조선군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뒤를 쫓다가 조선의 판옥선 5~6척을 보고 일본의 전선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일본군은 조선의 수군을 추격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이순신은 전략으로 일본의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로 끌어내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산도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이어서 설사 일본군의 수군이 육지로 당도하여 도망가더라도 먹을 것이 없기 때문에 섬 안에서 고립되어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조선의 수군을 쫓아가던 일본의 수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학의 날개처럼 좌우로 쫙 편 조선의 수군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이른바 학익진, 조선의 수군은 학의 날개모양으로 일본의 전선을 둘러싼 채 총통을 비롯한 화기공격을 퍼부었습니다. 졸지에 조선의 수군에 갇혀버린 일본의 수군은 순식간에 패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조선은 포를 쏘아서 일본 전선을 불지르는가 한편 갈고리를 걸어 배를 움직이지 못하고 하고 적들을 사살하였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대장인 와키사카 야스하루는 노가 많은 배를 타고 도망쳐 목숨은 건질 수 있었으나 화살을 맞아 겨우 살아남은 정도였고 이 외에 왜의 수군 부장 마나베 사마노조는 한산도에서 왜의 패전 현장을 지켜보며 할복자결했다고 합니다. 당시 왜의 전선은 73척, 그 중에서 살아 돌아간 것은 14척이었습니다. 그리고 왜군의 전사자는 9천 명에서 많게는 4만 명으로 생각되고 있으며 한산도에 기어오른 왜군 400여 명은 당시 이들의 처리를 맡은 원균이 적선이 몰려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이들에 대한 처리를 단념하고 가버려 뗏목을 만들어 도주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조선은 단 한 척의 배도 잃지 않았으며 총탄의 의한 전사자와 부상자들이 다소 존재했을 뿐입니다. 이 한산대첩의 결과로 고니시 유키나가가 평양을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세력을 확장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한산대첩의 결과 조선의 전라도, 충청도, 황해도, 평안도 서해 연안을 보존할 수 있어 군량을 조달할 수 있었고 이 길을 따라 명령도 전달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한산대첩의 승리요인에는 일본군의 오판도 있었습니다. 일본군은 한산대첩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해전에 그리 높은 비중을 두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해전에서의 결과가 당시 일으킨 저쟁에 대한 향방을 가를 것이라고 예상못했을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아마 이러한 방심이 일본의 연패와 대패를 불러온 것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일본의 중앙 수군에 속한 장수들이 대부분 육지전투를 치르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일본 입장에서는 조선의 수군을 격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고 이는 일본군 전략에 있어 한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우리나라 수군의 활약이 임진왜란 초기 승리의 기운을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을 막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고 일본의 수군의 의미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점은 조선의 입장에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한산대첩의 승리에는 정보가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소, 말 등을 돌보는 김천손이라는 사람이 전쟁이 일어나 몸을 피하기 위해 미륵산 정상에 올라갔다고 합니다. 당시 견내량을 보아하니 일본군선들이 막 도착해서 정박하고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대강 칠십 몇 척 정도의 규모였습니다. 그런데 당포 쪽에 조선 수군의 배가 있어 이에 김천손은 조선수군에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고 합니다. 그 첩보 덕분에 조선은 하루 전에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순신은 당시 한산도에서 오후 한 두시가 넘어가면 바람이 바다에서 육지로 부는 것을 알았습니다. 추진기관이 없는 배를 운영하는 시절에 판옥선과 바람으로 일본군을 격파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게다가 당시 전라좌수사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이억기, 경상우수사 원균은 대등한 위치였으나 나이가어린 이억기, 함대수가 적었던 원균 대신 이순신이 지휘하는 것을 약속하고 전투를 지휘하여 한산대첩을 이루어 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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