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후 전투 그리고 광해군의 외교정책

2023. 2. 22. 08:5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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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조선의 제 15대 왕이지만 그의 단어에는 왕이란 말대신 군이 붙습니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선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공빈 김씨였습니다. 그러면 그에게 형도 있었을 것이고 그는 임해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성격이 막장이었으니 그러한 이유로 세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일례로 그는 임진왜란 중에 순화군과 함경도로 떠나 병력을 모아야 했는데 본연의 임무는 제쳐두고 백성들에게 온갖 행패를 부리고 다녔습니다. 이에 참다못한 국경인, 국세필 등 함경도 백성들이 일본군의 가토 기요마사와 내통하여 임해군과 순화군을 붙잡아 넘기기까지 했습니다. 그리하여 임진왜란 때 나름 공이 있었던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선조는 세자의 자리에 그의 아들 중 유일한 정궁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올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선조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대북파의 지원을 받아 광해군이 왕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광해군이 재위하던 시절 대륙에서는 명이 후금을 상대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는 임진왜란 당시 자신들이 조선을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조선에게 파병을 요구합니다. 임진왜란 때에는 일본이 대륙정벌을 목표로 하였고고 이에 중국도 표적의 대상이 되었기에 명나라입장에서는 그러한 불씨를 조선 땅에서 잘라버리기 위해 파병한 것이지만 어찌되었든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돕기 위해 명나라군이 파병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을 쉽게 거절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또한 명나라군은 한동안 광해군을 조선의 국왕으로 인정하지 않은 데다가 책봉사로 오는 명나라사신들이 엄청난 양의 은을 요구하였으니 1년치 은이 단 열흘만에 소비되었습니다. 광해군입장에서는 이러한 명나라의 파병 요청이 달갑지 않았으나 당시 조정의 분위기는 명나라를 도와야 한다는 의견이었습니다. 하지만 남의 나라 전쟁터에 우리나라 병사를 보낸다는 것은 아무래도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전 임금 선조의 탓도 컸습니다. 그가 명나라의 은혜를 강조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던 광해군은 생각보다 나약한 명나라의 군대와 그에 따른 행패도 경험했습니다. 당시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이란 이야기도 나돌았는데 얼레빗은 어느 정도 느슨한 빗이고 참빗은 촘촘한 빗으로 일본군이 거쳐간 자리보다 명군이 지나간 자리가 더욱 행패가 심했다는 말입니다. 게다가 당시 광해군은 명나라의 전력이 결코 청나라에 앞선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거기에다 명나라가 누르하치의 근거지로 쳐들어간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어보였습니다. 또한 즉위하고 나서 정권을 안정시켜야 하는 광해군 입장에서는 폐모논의가 진행 중에 있었고 또한 경덕궁 등의 축성문제가 겹쳐 있었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에 대한 파병이 실리적으로 얻을 게 없다는 것도 그의 생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파병에 반대의 뜻을 가지고 버티던 선조도 명나라 황제의 칙서에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내줘야 했습니다. 

당시 명나라의 양호는 전 병력을 네 방향으로 나눠서 누루하치의 근거지인 허투알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웁니다. 그렇게 하여 서로군과, 북로군, 남로군, 동로군으로 나뉘어져 출정하였으며 조선군은 유정이 지휘하는 동로군에 속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전쟁을 지휘하는 명나라 지도부에서는 분열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당시 강홍립은 명나라 동로군이 3만 명이라 했지만 실제로는 1만 여명도 안되는 병력이 있었고 유정은 양호가 자신을 사지로 멀어넣었다는 말을 대놓고 하게 됩니다. 거기에 병사들은 추위와  싸워야 했고 그 외에도 조선군은 식량난에 허덕였습니다. 그즈음 두송이 이끄는 서로군이 누루하치의 후금군대에게 크게 패했습니다. 일종의 각개격파를 당한 것인데  서로군은 후금군을 물리치고 사르후와 자이판을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 소식을 들은 누루하치는 전 병력을 서로군에 집중하였고 이로 인해 서로군의 장수 두송이 전사하고 격파당했습니다. 그리고 누루하치는 두 번째 목표로 마림이 이끄는 북로군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북로군도 전투에 패배하였고 후속하던 예허족의 지원부대는 이 소식을 듣고는 철수하고 이여백이 지휘하는 남로군도 퇴각합니다. 따라서 동로군과 조선군만 남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 때 후금군의 주요 부대가 서로군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가 있다는 거짓정보를 믿은 부대는 허투알라로 진격하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명나라군대는 후금군과의 교전에서 이렇다할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당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유정이 사망합니다. 그리고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패배하고 맙니다. 당시 조선군은 화포를 사용하였지만 바람의 영향으로 화약이 날아가고 불이 꺼져 화포를 쓰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 적이 말을 타고와 휩쓰는 바람에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렇게 패배를 한 데에는 조총의 약점이 드러났기 때문인데 당시 전장식 화승총의 유효살상거리는 아무리 멀어도 50m, 그리고 재장전하는 데에 걸리는 시간은 30초에서 1분, 그리고 쏘았다하더라도 불발됐을 수도 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조총부대의 효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장창부대같은 엄호부대가 있어야 했는데 그러한 부대의 부재로 참패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결정적으로 조명연합군은 병력 수는 후금보다 많았지만 앞서 이야기한대로 이를 네 갈래로 나누어 대적하는 바람에 각개격파당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그에 반해 후금은 팔기병이 주축이 된 부대로 이 부대는 군사조직인 동시에 사회조직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팀워크가 좋은 군대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산악전에 강했는데 기병이지만 산과 평야를 이용하여 전투를 벌이는 능력이 탁월했습니다. 또한 보급에도 문제가 따랐으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척계광 장군이 선보인 절강병법을 도입했는데 이 방법으로 훈련된 부대로 후금을 상대하기에는 무리가 따랐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북방민족의 경우 겨울에 싸우는 것에 익숙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여름에 하는 게 더 옳을 수도 있는데 명나라의 재촉에 겨울에 출병하여 더욱 어려움이 컸습니다. 이 사르후전투의 여파로 명나라는 주력부대를 대부분 잃게 되었으며 당시 명나라 남부에서는 농민봉기까지 일어나 어려움이 더했습니다. 

1619년 사르후전투에서 명-조선연합군을 격파하고 대청제국의 기틀을 세운 누르하치의 동상

‘교린의 일은 우리 한(汗)이 몹시 바라던 것이다. 여러 장수들이 조선을 헐뜯는 말을 할 때마다 우리 한은 한사코 막으며 말하기를 “우리가 명나라와 원수가 된 것은 싸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명나라가 여러 가지로 속이고 해를 주기 때문에 부득이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대해서는 본래 원수가 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적국이 많은 것은 우리에게도 이롭지 않다. 어찌 싸움에서 항상 이기기만 하겠는가. 내가 죽더라도 너희들은 반드시 나의 말을 기억해 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광해군일기』
조선 측의 기록에 따르면 후금에서 먼저 무장을 풀자는 제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한 데에는 무리한 싸움을 벌여 인명피해를 늘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한편 청나라 측에서는 조선군이 먼저 자기들은 어쩔 수 없이 싸움에 참가했다는 말하며 항복을 제안했다고 합니다. 그러면 후금의 생각은 어땠을까. 후금의 상대는 명나라였습니다. 따라서 조선과 대립각을 세워봤자 이득볼 것이 없었습니다. 물론 싸움에서 후금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조선과 우호적인 관계를 해두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한편 이와 관련하여 광해군이 강홍립에게 과연 밀지를 보냈을까 하는 궁금증이 나옵니다. 정말 싸우지 말고 항복하라고 했는지 정확한 상황을 알 길은 없어도 광해군이 싸우는 상황을 봐서 후금에 항복하라는 지시를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조선조정내에서는 이렇게 항복한 강홍립을 두고 그 가족들을 처벌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왔지만 광해군이 강홍립을 보호합니다. 임진왜란을 겪어본 광해군입장에서는 명과의 사대관계는 버릴 수 없었고 그렇다고 후금을 적으로 두어 부담을 늘릴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름의 외교정책을 펼친 것인데 조정에서는 재조지은을 들먹이며 광해군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광해군의 외교노선은 인조반정의 명분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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