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해외파병 나선정벌
2023. 1. 31. 09:3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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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서양세력과 충돌을 일으킨 것은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나던 개항하기 직전이 최초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앞서 우리나라는 서양의 세력과 군사적 충돌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러시아군과 맞닥뜨린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임금은 효종이었습니다. 효종은 1649년에서 1659년까지 조선의 왕으로 군림하였습니다. 그러면 당시 조선군이 러시아군과 싸웠던 것은 무슨 이유때문이었을까.
당시 효종은 우리에게 북벌론을 추구했던 인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인조로 바로 병자호란의 치욕을 겪었던 임금입니다. 그가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아마 8년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볼모생활을 했던 것도 영향을 끼쳤을 것입니다. 그리고 청나라에 끌려간 그는 조선의 군사력을 키워 청나라에게 본때를 보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장남은 아니었지만 큰 형 소현세자가 인질생활을 마치고 난 후 귀국하고 곧장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머릿속으로 그리던 북벌론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준비하기 시작했고 당시 조정에서 상당한 힘을 가지고 있던 송시열에게 정예 포병 10만 명을 육성하여 오랑캐들이 예상하지 못한 틈을 타 쳐들어가겠다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효종이 재위하던 시기에는 네덜란드인 하멜 일행이 표류하기도 했는데 당시 무기를 잘 만들던 네덜란드의 사람이라는 것을 감안, 하멜은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소총을 만드는 것에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럼 그가 길러낸 포병들은 청나라를 상대했을까. 당시 청나라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바로 러시아군과 싸워야 하니 군사를 보내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사람들은 러시아를 나선(羅禪)이라는 불렀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나선정벌인 것입니다.
러시아는 1650년경 만주 북쪽의 흑룡강 주변에 나타났습니다. 전세계는 소빙기의 영향 속에 있었고 평균기온은 1도 이상 내려갔습니다. 혹한을 동반한 기상이변과 기근이 반복된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유럽에서 모피가 크게 유행한 것입니다. 특히 담비가죽은 따스하고 부드러웠기 때문에 인기가 많았습니다. 당시 러시아인들은 모피를 팔아 이득을 취하기 위해 시베리아로 진출하였고 러시아 정부가 많은 죄수들을 시베리아로 보내기도 했는데 그 이면에는 고급모피를 얻기 위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피를 얻기 위해 시베리아로 진출한 러시아인들이 만주의 흑룡강가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청나라와 마찰을 빚은 빚었습니다. 또한 이 시기 러시아는 포야르코프와 하바로프로 하여금 원정대를 꾸려 흑룡강가에 가도록 했고 이들은 흑룡강 마을을 점령하고는 군사기지를 삼았고 더 나아가 송화강까지 내려와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또한 청나라는 명나라의 잔여 세력을 처리하고 본토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했으므로 그들 입장에서 이른바 이이제이전략으로 조선의 군대를 이용하기로 한 것입니다.
1652년 이를 막기 위해 영고탑이라는 곳에 군사를 보내어 러시아의 남침을 막으려 했지만 무기도 앞서 있고 기세등등하던 러시아군에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청나라는 군대를 꾸려 러시아를 막으려 했지만 이에도 성에 차지 않아 조선에 출병을 요구하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병자호란 때 맺은 조약에 의해 청나라가 출병을 요구할 경우 군사를 파견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효종 5년인 1654년, 청나라로부터 조총과 창을 사용하는 병사 100여명을 뽑아 영고탑을 보내라고 하면서 군사를 보내니 이를 나선정벌이라 하였습니다. 조선 입장에서는 나선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는데 어찌되었든 당시 군대를 구성하여 파견하여 러시아와 조선과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나선정벌은 병자호란 때 맺은 어쩔 수 없던 약속에 의한 것이었지만 효종의 입장에서는 그동안 키워온 포병부대가 얼마나 위력을 발휘할지 숙제를 시험해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리고 파견된 조선군은 100명의 조총수와 취사등을 담당하는 20명의 화병과 30명의 보급병, 군마등이었습니다. 당시 러시아의 병력은 400여 명 정도였으나 조선군은 청나라군과 합세하면 그 수가 1000여 명에 다다라 러시아군보다 많았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러시아군과 몇 번 맞닥뜨린 후 패배한 경험이 있어 방어전을 고수하고 대신 러시아군과 전면전을 펼친 것은 바로 조선군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활약으로 러시아군에 타격을 입혀 퇴각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시 조선군은 벙거지를 쓰고 있었는데 이를 본 러시아군들은 ‘머리 큰 사람이 두렵다.’라는 기록을 남길 정도로 타격을 준 전투였습니다. 이 전투로 조선군은 크게 사기를 얻었으며 청나라도 자신감도 얻어 다음 해에 송화강 근처에서 러시아군을 퇴각시켰습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조선인들에게 미묘한 감정을 들게 하였습니다. 승리는 했지만 이 전쟁의 명령은 청나라 정부, 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오랑캐의 명령에 의해 출병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출병한 신류장군은 『북정일기』속에서 오히려 명나라를 도운 원정과 비교하며 아쉬운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그럼 기록 속에 남긴 러시아군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적은 신장(身長)이 10척(尺)이나 되며 눈은 길고 깊으며 털은 붉고 수염은 헝클어져 마치 해초가 어깨에 늘어진 것 같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러시아군이 곤란하게 만드니 청나라는 다시 조선에게 출병을 요구합니다. 그 때가 1658년, 효종 9년의 일입니다. 당시 효종은 이 요구를 한 번 거절합니다. 남의 나라 전투에 조선의 군사를 두 번이나 출병시킨다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청나라가 거듭 요구하므로 어쩔 수없이 조총수 200명과 기고수(기를 들거나 북을 치는 병사)와 화정(식사를 담당하는 병사)를 포함하여 보냈습니다. 당시 조선군은 청의 대형 함선에 나누어 타고 전투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청나라의 병력은 2500여 명, 러시아군은 약 500여 명의 병력이었다고 합니다. 이 2차 나선정벌에서도 조선군은 크게 위력을 발휘하여 러시아군의 전함 11척 중 10척을 침몰시키고 러시아군의 사령관 스테파노프가 전사하였습니다. 이렇듯 조선군이 러시아군에게 승리를 거둘 수 있던 요인에는 무기도 한 몫했습니다. 당시 조선군의 주력무기는 조총이었고 이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하여 조선을 크게 위협했던 무기였습니다. 하지만 이후 빠르게 우리나라의 군전력으로 흡수한 조총은 여전히 심지로 화약에 불을 붙이는 화승총이었습니다. 그에 반해 러시아군은 부싯돌로 점화하는 발전한 형태의 소총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군의 소총은 반동이 커서 명중률이 떨어지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의 희생자가 없었던 1차 때와는 달리 이번 2차 때에는 8명의 전사자와 25명의 부상자가 나왔고 청군의 피해는 더 컸습니다. 당시 청나라가 러시아전함을 사로잡으려 했기 때문에 그 피해가 컸던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청나라로부터 부당한 대우도 받았는데 조선의 최신식 무기에 위기감을 느낀 청군에게 빼앗긴 것입니다. 게다가 청군 지휘관의 무리한 작전으로 조선군의 피해가 컸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전으로 인해 사망한 조선군을 모두 전쟁터에서 화장하라는 지시를 받아 그대로 따랐습니다.
한편 나선정벌에 나선 신류장군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처럼 『북정일기』를 남겼습니다. 신류장군은 광해군11년 (1619)에 태어났으며 인조 24년 27세의 나이로 무과에 급제하였습니다. 이후 선전관을 거쳐 비변사, 함경북도 병마우후, 수군절도사, 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우포도대장 등 여러 핵심 무관직을 역임했습니다. 그는 무관직 뿐만 아니라 강진현감, 장단부사 등 지방 수령으로 부임해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고 합니다. 그는 조선의 유일한 해외파병군대의 장군으로 승리한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동북아의 긴장상황을 몸소 체험한 장군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신류장군의 이끄는 조선군의 활약으로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당분간 평화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국경협상을 시작하였고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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