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립외교의 광해군과 친명배금의 인조
2023. 1. 30. 09:37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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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다시 한 번 커다란 난리를 겪어야 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병자호란입니다. 임진왜란 당시 임금은 인조였습니다. 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 인조는 광해군을 왜 몰아냈을까. 사실 알고 보면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겪었으며 당시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조선을 잘 이끌었던 당시 세자였습니다. 그는 국난 당시 흔들리던 민심을 수습하고 왕실을 권위를 되찾는데 노력하였습니다. 그의 세자 시절에 대해 『선조수정실록』은 ‘행동을 조심하고 부지런히 하여 중외 백성들의 마음이 복속하였으므로 선조가 가려서 세웠다.’라고 기록하였으니 그에게는 일찍이 왕으로서의 자질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위기상황 속에서 조정의 대신들을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하여 후계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였고 이에 1592년 4월 29일 광해군은 세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자가 된 지 하루 만에 선조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선조는 명나라로 도망갈 준비를 하며 조정을 둘러 나누어 왕세자에게 분조를 이끌라고 명을 내립니다. 이것은 전례에 없던 일로 전쟁에 대한 책임 일부를 선조가 광해군에데 떠넘긴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속에서 광해군은 전선을 뛰어들며 강원도와 황해도의 여러 고을을 다니며 수령에 달아난 곳에 다시 새로이 수령을 임명하고 지방 관리들의 상소와 보고를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으로 인해 마비된 행정시스템 복구에 세자가 나선 것입니다. 상황이 이러해지자 혼란 속에서도 백성들은 세자를 믿고 따르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선조는 한양을 수복하자 바닥으로 추락한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광해군에게 왕위를 양위하겠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광해군과 신하들은 반대했는데 광해군이 그대로 왕위를 물려받을 경우 이것은 불효이고 이를 막지 못한 신하들은 불충죄를 뒤집어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조는 이러한 정치쇼로 인해 자신의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였는데 재위기간 동안 18번이나 이러한 쇼를 진행하였습니다. 이후 선조의 적장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납니다. 가뜩이나 선조는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적장자가 아닌 광해군을 미워했는데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5번이나 책봉에 퇴짜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영창대군의 등장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607년 선조가 병으로 눕게 되고 4개월 후 세상을 떠나면서 광해군을 후계자로 지명했습니다. 당시 영창대군은 두 살에 불과했으므로 세력도 없었습니다. 당시 명나라에서는 임해군이 있었으므로 광해군이 책봉에 대해 거부해 왔지만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이 역모죄로 죽음을 당함으로써 사실상 명나라는 광해군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광해군은 전후 복구사업, 당파를 가리지 않는 인재 등용, 국방력 강화, 『동의보감』 편찬, 대동법 시행 등의 의미있는 정책을 펼쳤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왕권의 당위성에 대한 불안감 때문인지 그는 1613년에 벌어진 강도사건에서 역모사건을 포착, 여기에 영창대군과 그의 외할아버지 김제남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을 근거로 김제남과 아들들을 처형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보낸 뒤 다음 해 영창대군은 9세의 나이로 잔혹하게 살해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정치적 행위는 그에게 지지를 보내던 측근들마저 등돌리게 하였습니다. 또한 영창대군의 친모이자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덕수궁에 유폐시키고 명칭을 서궁으로 격하시킵니다. 사실상 가택연금시킨 것입니다.
당시 조선의 주변국제정세는 혼란에 휩싸였습니다. 만주에서 여진족에 후금을 건국하고 치고 올라가고 있었고 이에 당황한 명이 조선에 도움을 요청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광해군은 이를 거절합니다. 임진왜란 이후 그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해 군대가 마땅히 없고 군인들 대부분 실전경험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출병을 거부한 것입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도움을 받았고 명나라의 끈질긴 요구에 결국 명에 파병을 하게 되지만 광해군은 장수들에게 전쟁의 개입을 금지했고 이후의 추가 파병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에 당시 명분의 의리를 중시하던 조선의 대신들 사이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부모에 대한 효를 저버린 광해군이 큰 나라에 대한 충도 저버렸다고 본 것입니다. 게다가 풍수지리설에 빠져 지나친 궁궐 증축에 힘을 쏟으니 공사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국고의 낭비는 심해져만 갔습니다. 이로 인해 임진왜란 때 따놓은 세자시절의 민심도 다 까먹은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1923년 3월 13일 광해군은 인조반정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고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가 다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왕위에 오른 이는 바로 인조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인조가 왕위에 있던 시기에 큰 위기를 맞았습니다. 후금을 세운 여진족이 침입해 온 것입니다. 이전 임금인 광해군은 앞으로 후금이 강성해질 것을 예감하고 명과 후금과의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쳐왔습니다. 하지만 당시 이러한 정책에 서인들은 반대하였습니다. 임진왜란 때에 도와준 명과의 의리를 저버리는 건 배신이라고 생각했고 이러한 외교노선과 그간의 광해군의 정치행태를 문제삼아 인조반정을 일으킨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조 시기에는 조선의 외교노선도 바꾸게 되었습니다. 친명배금정책, 명과 친하게 지내면서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쓴 것입니다. 그리고 인조반정이 일어난 4년 뒤인 1627년 후금이 쳐들어왔습니다. 바로 정묘호란, 그 배경에는 광해군을 몰아낸 조선을 벌한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후금은 당시 명나라와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후에 조선이 있다는 것은 부담이었고 이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조선을 먼저 제압하기 위해 출정하였고 후금의 침입을 받은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갔다가 결국 후금과 강화를 맺었습니다.
하지만 이 일 후에 조정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청의 강함을 인정하고 사대를 해야 한다는 주화파와 후금을 쳐야 한다는 척화파로 나뉜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 내에서 후금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할 사이 후금은 명나라를 야금야금 제압해 나가더니 1636년에는 청이라고 국호를 바꾸고는 청의 지도자 홍타이지는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 사실을 알리러 청은 조선에 사신을 보냈는데 당시 조선은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않겠다고 합니다. 이에 조선은 청의 군대를 다시금 맞이하니 1636년 12월에 발생한 바로 병자호란입니다. 조선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신간 뒤 청나라 군대를 돌려보내려 했습니다. 하지만 정묘호란 때부터 훨씬 많은 14만의 군대를 동원한 청나라 군대는 정묘호란 때처럼 성을 차례차례 함락하지 않고 곧장 한양으로 들이 닥쳤습니다. 그리고 강화도로 가는 길목마저 차단당해 인조는 어쩔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 김상헌의 척화파는 싸워보지도 화의를 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라며 청나라와의 일전을 주장했고 주화파의 최명길은 나라를 망하게 할 수도 있다며 나라를 지킨 뒤 후일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청나라는 조선의 왕자를 인질로 내보내라고 하더니 세자를 요구하였고 나중에는 조선의 왕이 와서 항복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한편 피신간 남한산성에서는 여전히 주화파와 척화파의 대립이 격렬했습니다. 그러던 중 강화도로 피난간 왕실 가족들이 포로로 붙잡혔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조는 청의 요구대로 항복을 하게 되었고 최명길이 항복문서를 작성하게 되었고 이를 본 김상헌을 찢어버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1637년 1월 30일 수항단이란 곳에 인조는 앉아있는 청태종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머리를 세 번씩 바닥에 조아리는 삼배고구두례를 올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이후 각각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표로 대립했던 김상헌과 최명길은 청나라의 수도 심양의 감옥에서 만나게 됩니다. 김상헌은 청나라가 요청한 파병요청반대상소를 올렸다가 잡혀온 것이며 최명길은 명나라와 내통하여 끌려온 것입니다. 당시 감옥에서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마음을 알렸는데 서로가 대립했지만 그것이 모두 조선을 위한 길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 인조의 친명배금정책과 이전의 광해군을 몰아낸 행적에 대해서는 옳은 결정이었는지 의견이 분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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