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량왜관은 어떤 곳이었을까.
2023. 1. 11. 07:4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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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량왜관은 조선 전기 부산포 왜관, 임진왜란 직후 설치된 절영도 왜관, 1607년(선조 40) 조성된 두모포 왜관에 이은 네 번째 왜관으로 일본의 외교와 무역이 진행된 곳입니다. 이 곳은 임진왜란 이후 전쟁의 상처로 양국 간에는 국교가 단절되었으나 그렇다고 가까운 두 나라가 마냥 연을 끊고만 살 수는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설치된 것이 바로 왜관입니다.
이러한 왜관은 조선초기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러한 왜관의 설치는 일방적인 성격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왜관이 있으면 일본에도 조선관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러한 왜관 설치는 왜구출몰에 의한 회유책이었습니다. 당시 왜구의 근거지는 대마도라 여겼으며 이 곳은 경제적으로 자활이 어렵고 무역에 의존해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들에게 활로를 제공하는 한편 이를 통해 왜구를 줄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 효과는 있었습니다. 다만 삼포지역에 거주하는 왜인들이 불법행위를 저지르는 일들이 일어났고 지정된 거주 지역을 벗어나거나 밀무역, 불법어로, 인신매매를 일삼았던 것입니다.
“삼포는 일본인에게는 낙토(樂土)지만 조선의 입장에서는 뱃속의 종기”
1503년 연산군 때 허조가 올린 상소는 이러한 왜관 설치의 부작용을 잘 말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중종은 삼포 주변에 목책을 설치하고 밀무역등을 차단, 세금을 부관하겠다고 통고하니 1510년에는 삼포의 일본인들이 대마도와 힘을 합쳐 폭동을 일으켰고 이 일로 부산첨사가 실해되고 동래부사가 포로로 잡히는 삼포왜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강력한 진압책으로 사건은 해결되는 듯 했지만 1544년 다시 사량진왜변이 일어납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나서 조선과 일본은 단절되었지만 무역에 의존해야 했던 대마도는 조선정부에 무역의 길을 열어달라고 부탁합니다. 사신을 보내 사과도 하고 조선인포로도 송환도 해보고 했지만 조선의 반응은 차가웠습니다. 이에 대마도는 막부를 움직여 재침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당시 조선은 누르하치가 일으킨 후금도 상대해야 했기에 이러한 대마도사신의 협박성 발언은 골치아픈 것이었습니다. 이에 절영도에 임시왜관이 설치되었습니다. 하지만 기존 절영도에서 왕래해야 하는 동래가 너무 멀다고 하니 두모포에 새로운 왜관이 생겼습니다. 그러면서 일본과 대마도는 조선이 1627년 정묘호란을 겪자 무기원조 등을 제의하며 꼬드겼고 1636년 병자호란으로 인해 조선이 청이 굴복하자 일본의 요구는 더 거세졌습니다. 왜관이 머무는 사신의 상경을 허락하고 일본인에 대한 접대수준을 높여달라는 것입니다. 사실 교역이 늘어나게 되었고 일본의 거주자가 늘어남에 따라 조차지를 확자 이전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보였습니다. 그리하여 초량지역으로 확장이전하게 되었고 이를 초량왜관이라 부릅니다. 1678년에 생긴 초량왜관은 두모포왜관의 10배가 넘는 공간이었고 일본이 네덜란드 상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데지마보다도 20배 정도 더 컸습니다. 그리고 이 곳은 조선이 강제하기 전까지 200여 년 동안 조선속의 저팬타운이 되었습니다.
초량왜관은 10만 평에 이르는 공간으로 동서관으로 나뉜 곳이었습니다. 왜관사람들은 동관에 거주했고 용두산 서쪽에는 일본에서 파견되어 건너온 사절단이 묵을 수 있는 서관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동관은 해안가를 따라서 수많은 건물들이 있었고 매달 3일과 8일에 장이 서는 개시대청, 왜관을 관리하는 건물들과 상가, 사찰, 신사, 부두, 창고, 출입문 등이 있었습니다. 이 곳의 거주자들은 가족이나 여성 없이 성인남자들로만 구성되었고 동래부의 허가 없이는 왜관 밖으로의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 쌀, 채소, 생선 등은 왜관 수문 밖 새벽시장에서 구매했으며 조선에서 나지 않는 일본의 물건은 대마도에서 공수해온 것으로 생각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왜관에서 생활한 사람들의 생활은 어땠을까. 일본에도 초량왜관과 비슷한 곳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은 일본이 조선과 무역하기 위한 곳이 아닌 네덜란드 상인들과 교역하기 위한 곳으로 만들어진 인공섬 데지마였습니다. 1636년에 건설된 데지마는 초량왜관과 비슷한 목적에서 설치되었는데 바로 외세세력으로부터 자국을 보호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그러다가 1639년 그리스도교를 포교하려던 포르투갈인을 내쫓고 네덜란드인을 살게 한 것입니다. 데지마를 통해 일본은 난학을 꽃피울 수 있었고 데지마에 파견된 네덜란드 의사였던 지볼트(1796~1866)는 나가사키 근교에 나루타키학원을 개설해 일본인에게 의학, 과학, 조사·관찰 방법, 기구 사용법 등을 가르치는 등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곳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초량왜관은 학문적인 교류장소나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는 장소로 활용되지 못했고 오히려 밀무역, 매매춘, 빚 등의 부정적인 요소가 드러나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사례 하나만 본다면 1693년 11월 26일 새벽에 이치하시 시로우에몬이라는 사람이 자살미수사건이 있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집이 가난했는데, 9년 전부터는 부친의 대출금 등이 겹쳐 더욱 힘든 생활을 해 왔다. 약 2년 전 왜관 내 술집에 고용돼 쓰시마에서 부산포로 건너와 다소 돈을 벌어 조금씩 빚을 갚아 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빚도 많이 남은 상태에서 쓰시마로 돌아가게 되어, 빚 독촉 속에 수많은 걱정으로 이리저리 고민하던 중에 우울에 빠져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덧없고 한 많은 이 세상을 더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새벽에 자살을 시도하게 되었다.”
아마 부산초량왜관이 근무하는 것은 일본인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던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은 그를 슬프게 했습니다. 부산초량에서의 생활의 만족보다는 빚을 다 갚지 못한 채 이 곳을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본다면 고국으로 돌아간다면 초량에서 했던 돈벌이만큼 좋은 일자리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초량왜관에서 거래되었던 것 중 대표적인 것은 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은이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비단도 쓰시마섬을 거쳐 일본으로 들어갔습니다. 당시 일본에서는 조선의 인삼이 명약이라 소문났으므로 수요가 많았고 당시 쇼군 요시무네는 조선의 인삼을 일본화를 계획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왜관에는 가마가 설치되었고 도자기 굽는 제작과정에 일본인을 참여시키면서 조선 다완(茶盌)을 일본화하기도 했습니다. 일종의 산업기밀유출이었습니다.
“동래 왜관(倭館)은 부산진(釜山鎭) 아래에 있어 우리 수군의 허실을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또 물자를 교역할 때 기강이 엄하지 않고 금령(禁令)이 해이하여 왜인과 아국인의 출입이 무상합니다. 왜인 가운데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자가 매우 많아 우리나라 사정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모조리 탐지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생긴 이래 변방의 방어가 튼튼하지 못하고 방어의 금령이 주밀(綢密)하지 못한 것이 오늘날처럼 심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1635년 10월 암행어사로 경상도 일대를 순행하던 윤계의 보고 내용입니다. 두모포왜관에서 조선의 수군 정보가 새어나갈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실제로도 이곳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과 접촉이 빈번했고 관련 정보가 유출된 정황이 포착되었고 문제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 외에도 교간사건도 있었는데 조선 여인이 왜관에 체류하고 있던 일본 남자와 정을 통한 사건이었습니다. 일본의 매춘사건으로 인해 조선과 일본사이에 조약이 맺어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누설죄가 포함되었는데 상인이나 역관이 조선의 실정을 왜인에게 발설할 경우 처벌한다는 내용이었는데 잘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그럼에도 왜 왜관을 유지했을까. 조선은 이를 평화의 수단으로 보았고 이를 통해 조선의 국방비를 절감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다준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은 일본에 조선통신사를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한일우호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조선왜관은 성격이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초량왜관의 우두머리가 머물던 관수가는 관리청으로, 이후 일본영사관으로 바뀌었으니 이 영사관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교두보이자 전선사령부역할을 하였습니다. 초량왜관은 1870년대 메이지 정부가 주장한 정한론의 전진기지로 변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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