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죽음은 독살 때문일까.

2023. 1. 12. 07:4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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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유시(酉時)에 상(정조)이 창경궁(昌慶宮)의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였는데 이날 햇빛이 어른거리고 삼각산(三角山)이 울었다. 앞서 양주(楊州)와 장단(長湍) 등 고을에서 한창 잘 자라던 벼포기가 어느 날 갑자기 하얗게 죽어 노인들이 그것을 보고 슬퍼하며 말하기를 '이것은 이른바 거상도(居喪稻)이다' 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대상이 났다" -정조실록 中
1800년 정조가 병상에 누운지 보름 만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세종 이후 성군이라 불리던 조선의 왕이었고 당시 세계사는 근대화를 물결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군주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던 왕의 죽음은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리고 이 정조의 죽음은 조선이 더 나아가지 못하고 망국의 길로 가는 하나의 예고편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죽음에는 의문이 뒤따랐습니다. 바로 독살설입니다. 분명 이러한 의문의 제기에는 조선의 개혁군주의 죽음이라는 아쉬움이 배여 있다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정조는 어떠한 사람일까. 
그는 사도세자의 아들입니다. 영조의 아들이 사도세자였고 사도세자는 자유분방하고 공부를 게을리했고 따라서 보수적인 성격인 영조가 탐탁치 않게 여겼다고 합니다. 물론 여기까지는 사도세자가 요즘으로 따지면 단순히 비행청소년이나 문제아정도로 치부될 수 있으나 문제는 정치적으로 영조와 갈등을 빚었고 무고한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현대의학에서는 사도세자의 병에 대해 진단을 내렸는데 바로 조현병입니다. 그리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그에 따른 위축감과 자괴감이 증세를 악화시킨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게다가 당시 사도세자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한 반대파 노론은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를 이간질했고 결국 사도세자는 영조의 명에 의하여 뒤주 안에 갇혀 죽는 불상사를 겪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노론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정조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염려하여 세손의 자리를 박탈할 것을 영조에게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죽은 마당에 그의 아들까지 죽일 필요까지 없었다고 생각했고 또한 정조는 어려서 책을 읽기 좋아했는데 이 점은 영조를 기쁘게 했습니다. 사도세자의 죽음 뒤에는 세손의 위치였던 정조를 이미 후계자를 낙점해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론세력의 정조 견제는 계속되었는데 영조가 건강이 위중해 정조로 하여금 대리첨정을 시킬 때에도 노론은 반대했으나 소론이 지지함에 따라 가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리청정이 시작되고 3개월 후 1776년 영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25세의 젊은 나이로 정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정조대왕어진

하지만 즉위년에 정조가 머물고 있던 존현각에 자객이 습격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집니다. 당시 정조는 잠을 자지 않고 책을 읽고 있었기에 목숨은 구할 수 있었으나 사건만으로도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배경에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큰 향을 미친 노론 벽파의 홍계희의 손자 홍상범이 있었고 조사 과정에서 홍계희의 조카 홍술해의 아내가 무당을 불러 주술로 정조를 살해하려는 정황과 함께 정조 사후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전군의 추대계획도 밝혀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사건에는 정순왕후 오빠인 김구주와 친밀했던 상궁과 환관까지 참여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조는 언제든지 목숨을 위협받을 수 있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나라를 바로 잡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정조는 근대화와 왕권강화를 위해 일련의 정치를 펴나갑니다. 
  정조는 탕평책을 폈는데 그것은 이전 왕이었던 영조의 탕평책과 차이가 있었습니다. 영조는 강경파를 배재하고 온건한 인물들을 등용한 것이었는데 정조는 왕에 대한 충성이 강한 인물들로 기용하였으며 이로 인해 그동안 배제되었던 남인이 정계에 다시 진출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삼정승에는 노론 김치인, 소론 이성원, 남인 채제공을 임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초계문신제를 당행하여 신진엘리트를 육성하였습니다. 한편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수령들에게 지방의 급한 현안에 대해 중간과정을 빼고 바로 왕에게 보고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육의전을 제외한 모던 시전의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을 단행함으로써 소상공을 키우고 물가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리고 자기 상전에게 의무를 다하지 않고 다른 지방에 몸을 피한 노비를 찾아내어 본 고장에 돌려보내는 노비추쇄를 없앴으며 고아들을 국가에서 거두는 자휼전칙을 마련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눈에 보이는 가장 뛰어난 치적으로 수원화성을 남겼으며 여기에 장용영이라는 군영을 설치했습니다. 그리고 노론을 포함한 대신들이 보는 앞에서 정조는 황금의 갑옷을 입고 장용영의 군사들이 호위를 받으며 대규모 군사훈련을 실시하였습니다. 이는 당시 정조에 대칭점에 있던 노론 벽파들을 위한 무력시위였습니다. 그리고 사도세자의 묘가 있는 현륭원에 총 13차례 방문하였는데 이는 정치적 행보로 비쳐졌습니다. 
신문물 수용에도 관심을 보인 정조가 신해박해를 일으키며 사상수용에 대해서는 보수성을 내비쳤습니다. 이러한 정조의 정치행보에 노론의 벽파도 동참했으며 천주교를 옹호한 채재공이 실각하고 그 자리를 이병모, 심환지 등의 노론의 벽파인물이 대신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노론의 득세를 직감한 정조는 오회연교를 내립니다. 이는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된 자들에 대한 자백을 권고하면서 이에 대해 용서하겠다는 것이며 남인들을 재상으로 등용해 쓰겠다는 것입니다. 이에 노론벽파가 궁지에 몰렸습니다. 이로써 정국은 정조가 쥐는 듯 했으나 역사는 예상치 못하게 흘러갔습니다. 오회연교를 발표하고 나서 보름이 지나 병석에 누운 정조는 당시 보름 뒤에 세상을 떠나고 만 것입니다. 

정조가 자신과 대립각을 세운 인물로 알려진 심환지(沈煥之·1730~1802)에게 보낸 비밀편지


그럼 정조는 어떻게 죽음에 이르게 되었던 것일까. 독살설일까. 아니면 병에 의한 자연사였을까. 독살설의 핵심 중 하나는 바로 연훈방입니다. 이치료의 중심은 바로 경면주사인데 경면주사는 붉은 빛을 띠는 천연광물로 이것을 가루 내서 쓰며 태웠을 때 나는 연기를 환부에 쐬어 치료하는 민간요법으로 종기 치료에 흔히 쓰이는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경면주사에 대해 부작용은 『본초강목』에서도 언급하고 있는데 불에 닿으면 사람에게 위험한 물질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불을 쏘이면 수은과 황으로 분리되는데 정조가 이 연훈방 치료로 인해 수은이 몸으로 유입되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연훈방에 의한 치료기간이 짧고 그로 인해 양 자체가 적다고 하니 수은의 의해 중독으로 사망가능성을 낮게 보았습니다. 실제로 연훈방을 썼을 때 정조의 종기에 고여 있던 피고름이 한 바가지 빠져나와 이불과 옷을 적셨다고 하니 이것에 대해 호전인지 악화인지 알 길은 없으나 혜경궁 홍씨가 종기로 고생했는데 많은 피고름이 나오면서 나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호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정조는 종기가 있었는데 이와 더불어 몸속에 화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이를 다스리는 약을 사용하자고 제안합니다. 하지만 도제조 이시수는 경옥고를 비롯해 육군자탕과 생맥산, 팔물탕을 추천했는데 이는 몸에 열을 더하는 약재였습니다. 이와 동시에 연훈방과 성전고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종기가 아직 다 치료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경옥고는 종기치료에는 오히려 해가되는 약이므로 현대의학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처방이라고 합니다. 한편 치료할 적에 이미 그의 종기는 커져있었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애초에 치료시기를 놓친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내놓았습니다. 그리고 연훈방 등을 단시간 내에 사용하여 다량의 출혈이 발생하였으므로 이것이 정조를 더욱 위독하게 만들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국 정조에 대한 처방이 잘못되었다는 것인데 당시 궁궐 주치의는 심환지였고 그는 노론강경파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따라서 독살설에 대한 의구심을 거둘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을 야기한 오회연교에 대해선 친벽파인 이만수를 병조판서에 임명하고 역시 벽파의 인물 이서구를 중용하겠다고 하였으니 과연 오회연교의 화살은 사실 벽파가 아닌 시파를 노린 것 아니냐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가 쓴 수기인 『한중록』에서 독살가능성을 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각에서는 정조의 죽음을 병사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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