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에 대한 가장 생생한 기록 승정원일기

2023. 1. 9. 07:4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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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정원은 조선시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관청이었습니다. 승정원에 대한 업무에 대해 대체적으로 왕의 비서기관으로 이해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왕명출납과 더불어 제반 행정 사무, 의례적 사항 등을 기록하였으니 그 책은 『승정원일기』라고 합니다. 『승정원』은 유네스코 세계유네스코 기록유산으로 선정될 만큼 중요한 기록물이며 그 양도 무척 방대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건국초기부터 작성된 『승정원』은 임진왜란, 이괄의 난 그리고 각종 화재로 인해 불타 현재는 인조 때붜의 기록부터 남아잇으나 그 양이 288년간 작성되어 3245책 2억2650만자를 남겼습니다. 이는 조선왕조실록의 888책 4770만 자를 훌쩍 뛰어넘는 것이며 중국이 기록한 <이십오사>(3996만자)와 <명실록>(1600만자)와는 더 많은 격차를 보입니다. 그리고 『승정원일기』보다 많은 글자를 쓴 기록물로 중국 청나라 건륭제 때 간행한 『사고전서』가 있는데 중국의 역대기록을 모아놓은 8억자에 수록한 세계 최대 종합자료였습니다. 반면 『승정원일기』는 여러 책들을 모아 놓은 편집본이 아닌 그날 그날 기록을 그 때 담아놓은 1차 기록물로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특히 그 내용도 자세한 데에 가치가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양을 기록한 데에는 기록을 남기는 것에 진심이었던 선조들의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도 이러한 기록물은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 성종 대에는 은대남북원을 두었고 현종대(1009∼1031)에는 중추원에 정3품의 승선(承宣) 4인과 정7품의 당후관(堂後官) 2인을 두어 왕명을 출납하고 그 출납한 공사에 대해 기록으로 남긴 것인데 그 일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대신 다음 왕조인 조선왕조에서 전대왕조의 기록습관을 이어받았습니다. 
승정원의 직제는 도승지 이하 정 3품의 승지 6인과 정 7품의 주서 2인으로 이루어졌으며 『승정원일기』는 주서가 맡아 기록했습니다. 주서는 늘 임금과 함께 하는 사람으로 임금과 조정신하들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을 적어야 했으니 과거시험을 통과한 사람 중에서도 말을 재빨리 한문으로 번역해 쓸 수 있는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주서는 국왕이 국정을 볼 때면 사관들과 함께 그 과정을 기록하고 메모하였으니 이를 초책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재빨리 적어야 했으므로 자신만이 알아보는 필체로 적혔습니다. 그리고 하루치의 하번주서(下番注書)를 정서하는 한편 상소(上疏)나 서계(書啓)와 같은 문자로 된 문건은 서리에게 베끼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이 모아져 그 날의 일기가 되고 이것을 묶어 『승정원일기』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자료들은 1960년부터 1977년까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이를 해서(楷書)체로 고쳐 지금은 누구나 쉽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해놓았습니다. 


당시 국정을 해결하려고 할 때 과거의 기록물을 꺼내 참고하여 해결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 때 참고서가 바로 『승정원일기』입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있는데 『승정원일기』는 왜 기록했을까 싶지만 『조선왕조실록』은 왕이 승하하면 다음 왕 때에 임시로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여 전왕대의 실록을 편찬한 것이고 『승정원일기』는 조선왕조국정에 대한 그날의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두 기록물의 성격은 전혀 다릅니다. 비록 인조 이전의 『승정원일기』는 소실되었지만 그 이후의 기록은 남아 있으니 말 그대로 우리나라 근대사의 공식기록물이고 그 분야도 날씨를 비롯해  정치, 경제, 외교, 문화, 법제, 사회, 자연 현상, 인사, 국왕과 관료의 동정, 국정 논의 등 광범위한 기록이 들어있어 한국과 관련된 여러 학문들의 절대적 자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나이가 차도 결혼하지 못한 사람의 기준을 몇 살로 정함이 좋겠는가?"(영조)/"남자는 30세로 하고, 여자는 25세로 해야합니다."(선혜청 당상 민백상)
"남자는 30세가 좋을 듯하나, 여자를 25세로 하는 것은 너무 늦어 23세로 함이 좋겠습니다"(좌의정 김상로)/"그러면 남자는 30세로, 여자는 23세로 하는 것이 좋겠다" 『승정원일기』 영조 33년(1757) 2월 5일
마치 당시를 생생하게 보는 듯한 기록물이 바로 승전원일기로 조선왕조실록이 일어난 일에 대한 결과를 재수록한 책이라면 승정원일기는 일어난 일을 바로 그 자리에서 기록하여 놓았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 과정에는 왕의 표정과 감정까지도 기록되었습니다. 승정원일기의 세세한 표현은 사건에 참여한 인물을 기록하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영남(嶺南) 지방의 유생(儒生) 1만여 명이 연명(聯名)하여 왕에게 올린 상소가 있었는데 이것은 영남만인소라 했습니다. 그런데 정조 16년 4월 경상도 유생이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 때 올린 사람들 1만 명의 이름을 모두 기입한 것입니다. 
“1629 (인조 7년) 2월 8일 밤 일경에 유성이 천봉성 위에 나와 북쪽 하늘가로 들어갔는데 모양이 병 같았고 꼬리의 길이가 2, 3척 정도였으며 흰색이었다.”
승정원일기는 날짜와 날씨를 함께 기록했으므로 이는 마치 오늘날의 일기와도 같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승정원일기는 날씨에 대한 기록을 장기간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이게 바로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기록하는 일기와는 확연히 다른 면인데 일반적인 사람들이 일기를 쓰면서 맑음, 흐림, 비같이 간단하게 표시하거나 자신만의 느낌을 담아 기입하는 경우가 있더라도 그 이상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에서는 날씨의 변화와 더불어 비의 양도 기록했습니다. 하루에 몇 번씩 비가 올 때면 그때마다 그것을 기록했으니 이러한 비의 양의 기록은 이전의 조선이 측우기를 발명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기상관측내용은 288년간 기록되었고 이를 통해 미래의 이상기후를 예측할 수 잇는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당시 왕은 하늘의 뜻을 헤아려 정치를 행하는 것이었으므로 기상관측은 민본정치에서 나온 것이고 이러한 조선정치의 근본이 승정원일기를 통해서도 나타난 것입니다. 

1725년(영조 1년) 8월 6일 오늘 아침에는 머리 빗고 세수하고 난 뒤로 추워서 오싹해지는 증상이 있는 것 같기는 해도 어제보다 낫다. 그러나 콧속이 매우 후끈거리고 팔다리의 관절도 아프다.“ 
“영조 19년 9월 16일 여민락을 연주하였고 음악이 그쳤다. 정휘량이 화반을 받들었다. 내시가 꽃을 들어 익선관 오른쪽에 꽂았다.”
‘왕이 탑전을 치면서 “바로 경연을 끝낼 것처럼 했으나 벌써 저녁 수라가 들 때가 되었다. 공연히 이 일로 골치를 썩고 있으니 이것도 내 팔자로다.’ 
이렇 듯 승정원일기에서는 진맥기록과 더불어 궁중행사를 생생한 모습, 영조가 한탄하는 인간적인 모습까지 담았으니 조선역사의 살아있는 다큐멘터리 기록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헌은 『승정원일기』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대체로 사실을 두루 갖추고 있어 참고 자료로 삼을 수 있으며 국가의 제도를 근거로 한 등록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역사서의 기능까지 겸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승정원일기』는 당대에서도 아꼈을 국가의 보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 조선은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처럼 기록에 열의를 보였던 이유는 무엇일까. 
“옛사람들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했다. 대개 나라는 형체와 같고, 역사는 정신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큼은 남아 존재하고 있으니, 이것이 통사를 서술하는 까닭이다. 정신이 존속해 멸망하지 않으면, 형체는 부활할 때가 있으리라.”
박은식선생의 한 말은 나라가 멸망하더라도 역사만 있으면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으로 이러한 마음으로 조상들도 성심성의껏 역사를 기록했을 것입니다. 『승정원일기』에서 남아있는 부분의 가장 첫 기록은  인조반정이 일어난 날의 상황입니다. 아마 조선건국초부터 남아있더라면 하는 마음은 있지만 남아있는 부분이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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