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전 속 이몽룡은 실재했을까.

2023. 1. 7. 07:4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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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룡의 실제 모델로 추정되는 성이성이 살았던 경북 봉화 계서종택 전경

우리나라 고전문학이 대표작 중 하나인 『춘향전』은 조선 숙종 대 이후에 씌어진 소설로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온 살아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현대에 와서는 영화와 드라마 뿐만 아니라 뮤지컬, 발레 등 다양한 문화장르의 소재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는 춘향과 몽룡의 사랑은 물론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신분제도와 탐관오리에 대한 비판, 그리고 권선징악과 더불어 역경과 고난을 딛고 일어선 주인공들이 행복한 결말이 들어 있어 현대의 청자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특히 ‘사랑 사랑 내 사랑아 어화둥둥 내 사랑아’이라는 구절은 춘향전을 노래한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으로 익히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그럼 이러한 춘향의 이야기는 소설인만큼 허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흥미를 끄는 것은 이야기는 허구일지 몰라도 여기에 대한 모티브가 된 실제 이야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소설 『춘향전』의 남자주인공은 이몽룡인데 실제 인물인 성이성을 모델로 했다고 합니다. 그럼 성이성은 누구일까. 성이성은 조선시대의 청백리로 선조 28년인 1595년 경북영주시 동면 문단리외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남원부사를 제수받은 인물로 성이성도 21세인 1607년에 『춘향전』의 무대가 되는 남원으로 가서 5년 가까이 살았습니다. 성이성은 이후 32세 때에 문과에 급제하고 1639년에 호남 암행어사를 제수 받아 남원에 출두했습니다. 그리고 성이성이 52세가 되던 1647년에 호남암행에 나섰으며 53세에 순천에서 자신의 임무를 끝내고 남원에 들렸습니다. 눈보라가 일어 날씨가 나빴던 당시에 그는 굳이 광한루에 들렀습니다. 그리고 늙은 기생 여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아마 늙은 기생과 아는 사람 중에 성이성이 아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이 소설 『춘향전』의 여주인공은 아니었을까요. 
‘思小年事(사소년사) 夜深不能寐(야심불능매) 소년 시절의 일을 생각하느라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럼 성이성은 실제 이몽룡의 모델일 수 있을까. 소설속의 이몽룡과 실제의 성이성은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소설 속의 이몽룡이 승진한 아버지를 따라 남원을 떠난 것처럼 성이성도 아버지 성안의가 남원에서 5년 동안 일하고 떠나면서 함께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소설 속의 이몽룡처럼 성이성도 과거에 급제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몽룡은 임금이 직접 출제하고 당일로 장원급제를 발표하는 알성시에 응시한 것인데 이 시험은 당일날 발표되는 특성 때문에 실력도 실력이지만 운이 많이 작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곧장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내려간다는 것이 소설의 내용인데 실제 인물 성이성은 소설 속 이몽룡보다 한참 늦은 나이인 33세에 과거에 합격했습니다. 하지만 과거시험은 5세 때에 공부를 시작하여 30여 년이 넘는 시간이 투자되어 합격하였으므로 40대에 합격하는 사람이 많았으니 성이성이 합격한 나이 33세의 나이는 특별히 늦은 나이는 아니었습니다. 이후 성이성은 사헌부, 홍문관 등 주로 삼사(三司)의 요직을 거쳤으며 곧은 성품으로 직언을 하여 벼슬길이 쉽지는 않았으나 그러한 인품덕분에 4차례나 암행어사를 지낸바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몽룡과 성이성은 과거에 합격하고 암행어사를 지냈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이성의 유품. 성이성이 어사 출두 때 얼굴을 가렸다는 사선.

『춘향전』의 결정적인 장면은 바로 암행어사가 출두하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암행어사는 지방수령을 탐문하고 감시하다가 부정을 발견하게 되면 어사출두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봉고파직(封庫罷職)이라는 힘을 가졌는데 봉고는 창고를 봉한다는 의미로 수령의 경제권을 박탈하고 파직은 왕의 대리인으로 수령의 벼슬을  파직시킬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다만 성이성이 남원에서 암행어사를 출두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한편 성이성은 어사의 신분으로 남원을 지나간 적이 있어서 남원지역에서 어사출두를 했으나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결적적인 자료는 창녕 성씨가문이 가지고 있는 책 『교와문고』에 실마리가 있는데 이 책에 어사출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런데 『교와문고』에 있는 어사출두장면과 『춘향전』에 나온 장면이 매우 유사합니다. 게다가 소설 속의 이몽룡의 지은 시와 『교와문고』에서 성이성이 암행어사의 신분으로 잔치에서 읊었다는 시가 몇 글자만 다를 뿐 거의 동일하다고 합니다.
금준미주천인혈 金樽美酒千人血 (금술잔의 좋은 술은 만백성의 피요,)
옥반가효만성고 玉盤佳肴萬姓膏,(옥쟁반의 맛좋은 안주는 만백성의 기름이라).
촉루락시민루락燭淚落時民淚落 (촛농 흐를 때 백성의 눈물이 떨어지고) , 
가성고처원성고歌聲高處怨聲高, (노래 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도다).
 그가 읊은 시는 바로 ‘금준미주’라는 시로 이 시는 『난중잡록』이라는 책에서도 보인다고 합니다. 그리고 『난중잡록』의 저자는 조경남으로 조경남은 광해 2년 2월 3일의 일기에서 우리나라에 온 명나라 장수 조도사가 이와 비슷한 시를 이야기하여 들은 것을 적었다고 합니다. 이 조경남은 성이성의 암행일지에도 등장하는데 소년 시절에 그에게 글을 가르쳐준 스승이라고 합니다. 
그럼 소설 『춘향전』의 조선과 실제의 조선의 모습은 얼마나 같을까요. 『춘향전』속의 이몽룡은 남원 부사 이한규의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 남원에 왔다가 춘향을 만났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부임한 곳에 가족이 전부 데리고 올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가족을 데리고 올 경우 그 가족에 대한 비용도 정부가 부담해야 했고 가족들에 대한 부정청탁이 이루어질 공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다 아들이 따라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아마 성이성도 이러한 경우는 아니었을까요.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간 뒤 1년 만에 장원에 급제하여 암행어사가 되어 돌아온다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고 게다가 조선에서는 갓 급제한 인물이 암행어사로 발탁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암행어사는 제비뽑기로 파견지를 정했는데 전국 군현이 360여 개이고 이 중 남원으로 올 확률은 더욱 낮아집니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호남지역 전체를 감찰했다고 하나 실제로는 파견지 말고는 갈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가장 극적인 장면 암행서사 출두야 하는 장면은 실제로는 차분하게 진행되었다고 합니다. 그럼 암행어사가 출두하는 장면에서 마을 수령이 숨고 향리들이 도망가는 장면은 실제로 있을 수 있는 장면인지 아니면 그냥 민중들의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한 극적인 장치였는지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성이성의 유품

어찌되었던 소설과 현실의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성이성이 소설 속의 이몽룡의 모델이라고 하지 않아도 될까. 그러면 성몽룡이 되어야 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감추고 싶은 비밀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마 당시 청백리였던 성이성이 10대 시절 남원에 있으면서 기생과 사랑을 즐겼다고 하면 당시로서는 백성들 사이에서 안좋게 입에 오르고 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성이성이 수십 년이 흐른 뒤 남원 광한루를 들른 것은 공무 수행차가 아닌 소년시절의 사랑을 만나보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에게 들려온 소식은 그 기생은 죽고 없다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춘향전』과 같은 이야기가 강원도 영월에서 전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바로 기생 고경춘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소설의 배경보다 후대인 영조 때 있었던 일로 고경춘 역시 명성이 자자한 기생이었는데 열다섯살이던 해에 영월부사 이만회의 아들인 이수학이 과거에 급제하고 돌아오면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하고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떠납니다. 그리고 영월부사로 신광수가 오게 되었는데 그가 경춘에게 수청들기를 강요하나 이를 거부하다가 끝내 단종을 모시던 시녀들이 투신한 금강정 낙화암에서 몸을 던졌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지방관의 자제와 기생간의 사랑이 간혹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나 해피엔딩은 이룬 것 같지 않습니다. 아마 『춘향전』은 헤피엔딩을 바라는 민중의 마음을 담아 만들어진 우리 민족 역사상 가장 극적인 소설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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