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고한 백성들의 순교 사건 병인박해

2022. 11. 1. 20:3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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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두산 순교도

1866년 조선 조정(朝廷)에서 가톨릭 교도를 대량 학살한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른바 병인박해사건, 이 사건이 촉발되어 이후에 프랑스가 서해안에 침범하니 병인양요입니다. 당시 조선의 군주는 고종이었으나 나이가 어렸기에 흥선대원군이 섭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흥선대원군을 수식하는 말이자 외교노선은 바로 예전에 쇄국정책이라 불렀던 통상수교거부정책입니다. 그러면 당시 흥선대원군이 통상수교를 거부하고 가톨릭 교도들을 박해했던 데에는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일까요. 외세를 배격한 인물로 알려진 흥선대원군은 천주교를 무작정 싫어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초반에는 우호적이었습니다. 일단 고종의 어머니인 여흥부대부인 민씨가 천주교 신자였고 고종의 유모 역시 천주교 신자였습니다. 일단 주위 사람들이 천주교신자였고 그래서인지 집권초기의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대해 비판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천주교에 대해 흥선대원군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것은 바로 국제정세 때문이었습니다. 1860년 영불연합군에 의해 북경이 함락당합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여겨지던 청나라의 수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은 조선에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점령한 서양세력이 언제 조선을 침범할지 불안감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당시 조선의 국내 상황도 썩 나빴습니다. 반 세기 동안의 세도 정치는 나라를 어지럽게 했고 그에 따라 지방관리들의 부정부패로 촉발된 삼정의 문란은 백성의 수탈로 이어져 이것은 농민항쟁을 야기시켰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철종 대를 지나 12살의 어린 고종이 왕위에 올랐고 흥선대원군이 섭정을 하였습니다. 그는 국내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혁을 실시하고 서원철폐, 군사제도의 개편을 단행하였습니다. 
섭정을 하던 흥선대원군에게 국내 문제와 더불어 앞으로 다가올 국제정세에도 발빠르게 대응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1864년 그가 섭정을 시작하였는데 그보다 4년 앞선 1860년 러시아가 청과 영국, 프랑스사이에 베이징 조약을 중재해준 대가로 연해주를 획득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하여 조선은 러시아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으며 러시아는 언젠가 조선을 노릴지 모르므로 흥선대원군은 이에 대응해야 했습니다. 실제로 대원군에게 함경감사로부터 보고서가 올라왔는데 그것은 바로 러시아의 통상요청이었습니다. 


천주교도 홍봉주가 러시아의 남하에 대항하기 위하여 영불과 동맹을 체결할 것을 건의하였으며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며 흥선대원군과도 친분을 유지하던 남종삼도 천주교도로서 비슷한 건의를 하였습니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를 만나 그들이 중재해 주면 프랑스 군대의 힘을 빌려 러시아의 남하를 막고자 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천주교 신자이던 남종삼은 이를 통해 조선 내의 천주교 확산을 기대했던 것입니다. 당시 조선은 프랑스 예수회 소속의 주교 2명과 신부 10명 등 총 12명이 조선 내에서 포교활동을 하고 있었고 이를 통해 천주교 신자는 2만 3천 여명에 달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흥선대원군과 접촉한 프랑스 선교사 베르뇌는 선교사가 정치에 관여할 수 없다며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고 이 시간동안 흥선대원군의 심경에도 변화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프랑스 선교사가 흥선대원군의 요청에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무래도 군사적 충돌을 우려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의 변화가 일었던 흥선대원군에 의해 남종삼이 처형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의금부에서, 죄인 남종삼과 홍봉주 등의 결안은 다음과 같습니다. …(중략)…러시아에 변란이 있을 것이라는 말과 프랑스와 조약을 맺을 계책이 있다고 한 것으로 말하면, 애당초 명백하게 근거할만한 단서가 없는데 요망한 말을 만들어 내서 여러 사람들을 현혹시켰습니다. 감히 나라를 팔아먹을 계책을 품고 몰래 외적을 끌어들일 음모를 했으니 그가 지은 죄를 따져 보면 만 번을 죽여도 오히려 가볍습니다.” 「고종실록」
흥선대원군의 측근이자 천주교신자이던 남종삼이 사형에 처해진 것입니다. 흥선대원군이 이러한 결정을 한 것은 바로 위정척사 세력의 반발이 거셌기 때문입니다. 당시로서는 흥선대원군이 프랑스 선교사와 접촉하려 한 것이 위정척사 세력에게는 명분이 없어 보였고 또한 성리학을 신봉하는 그들에게 흥선대원군의 이러한 시도는 자신들의 존립자체를 흔들 수 있는 위험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최고 집권자로서 권리를 행사하기에는 당시 조선 양반들의 눈치를 봐야 했는데 자칫 그들에게 약점을 잡히면 섭정자의 자리에서 물러나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물론 흥선대원군에게는 변명이 있을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으려 했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와 같은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고 이에 위정척사세력이 정치적 공격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초조했을 것입니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부인도 천주교 신자였으니 단순히 종교를 포교하기 위한 정치적 행보가 아닌 것으로 비춰질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 남하를 막는 조건으로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겠다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당시 베르뇌 주교는 조선에 도움이 될만한 일을 하고 싶지만 러시아와 나라와 종교가 다르므로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대답을 해왔습니다. 솔직히 당시 베르뇌주교의 심정은 복잡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최고 집권자 흥선대원군은 천주교에 호의적이었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취한 사람들이 신하가 되었으니 천주교의 입지가 불안하다는 이야기를 동료 신부에게 했습니다. 한편  흥선대원군은 이런 위정척사세력의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 대규모 천주교 탄압을 일으키니 그것이 바로 ‘병인박해’입니다. 이 때 프랑스 선교사 12명 중 9명이 학살당했고 이후로 3년 동안 3천 여명이 천주교 신자들이 학살당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탈출한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건너가 프랑스 해군사령관 로즈 제독에게 달려가 이야기하니 이로써 촉발된 사건이 병인양요입니다. 

다블뤼 주교

병인박해는 1866년(고종 3)부터 1871년까지 계속되었던 우리나라 최대 규모의 천주교 박해로 이 사건으로 인해 무려 8000여 명의 희생자를 냈습니다. 그리고 이 때 순교한 프랑스 신부 중에는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인 다블뤼 주교가 있었습니다. 그는 충청남도 당진 신리 지역에 21년간 머무르며 선교활동을 하였으며 조선말도 아주 잘했습니다. 그리하여 천주교서적을 조선말로 번역하고 밤에는 천주교인들을 모아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는 조선의 양반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조선의 양반들은 평민에게 지독한 폭정을 가하고 양반은 돈을 지불하지 않고 평민의 토지를 빼앗았으며 수령이나 관리도 이를 보고만 있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반들은 풍족한 반면 일반 백성들은 굶어죽고 국왕도 거의 수입이 없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다블뤼 주교에게 보이는 조선의 왕은 양반에게도 고통 받는 존재였습니다. 양반에게 비판적이었던 다블뤼가 조선에 애정을 가지고 선교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양반을 제외한 조선사회가 가지는 인간적인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기록에서 조선에서 자선행위는 자연스러운 것으로 기록하고 식사 때 먹을 것을 달라고 하면 거절하지 않으며 일부러 그를 위해 밥을 다시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일꾼들은 지나가는 사람에게 밥을 나누어주었으며 잔치가 벌어지면 언제나 이웃을 초대해 모든 것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여비 없이 떠나는 사람에게 엽 전 몇 닢이라도 쥐어주는 것이 바로 조선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의 모습 속에서 다블뤼 주교는 천주교가 조선에 뿌리내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할아버지가 천주교인들을 많이 죽였으니 내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천주교에 귀의하겠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를 포함한 여러 희생자들에 대한 후손들의 미안함이었을까요. 흥선대원군의 손자 부부인 의친왕 이강과 의친왕비인 김덕수가 속죄하는 마음으로 천주교에 귀의할 뜻을 밝힙니다. 외양적으로는 병인양요와 신미양요에서 승리를 취할 수 있었지만 일본의 운요호 사건에 휘말려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으니 흥선대원군의 병인박해는 국제정세를 제대로 읽지 못하고 섣부른 판단이 부른 조선 후기의 비극이자 조선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는 비극의 첫단추는 아니었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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