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천재 화가 김홍도

2022. 10. 29. 20:2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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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선도

김홍도는 젊은 시절부터 천재적인 실력으로 인정받은 화가였습니다. 십대 후반에 이미 도화서의 화원이 되었고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화진화사에 세 번 뽑히며 정조의 얼굴을 그렸습니다. 정조는 그러한 김홍도를 총애하였으며 도화서의 화가들을 추려 규장각에 배속시켰는데 김홍도는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당시 김홍도의 평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풍속화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많은 소재를 통해 인정을 받은 화가였고 그 중 신선도에서 높은 평가를 받은 화가였습니다. 신선을 그린 그의 그림 중에 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군선도입니다. 그는 역사상 실재했던 인물들을 이 그림에 등장시켰습니다. 신선이라고 해서 과장되거나 신비하게 그린 것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을 부각시켰고 달마도 조선인으로 설정하였습니다. 그는 우리의 정서에 와닿게 그릴려고 했던 화가입니다. 이러한 그림이 가능했던 있는 이유는 이 작품이 주문을 받아 궁중에서 정한 규칙과는 무관하게 그린 그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당시 조선에서는 우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서 중국느낌의 화풍에서 벗어나 우리의 것을 그렸는데 이러한 것은 김홍도의 작품에도 녹아든 것입니다. 이 그림은 김홍도의 개성적인 화법을 통해 그림세계를 유감없이 선보인 김홍도의 말 그대로 회심의 역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삼공불환도

김홍도의 든든한 후원자 정조는 그에게 왕실의 도서관인 규장각을 그리게 하는 등 궁중의 그림 관련 업무를 맡겼으며 정조의 집념으로 만들어진 수원의 신도시 화성의 그림 작업들도 김홍도에서 총괄하게 하였습니다. 이렇듯 당대 최고의 화가인 김홍도는 병풍화의 대가이기도 합니다. 장대한 화면에 무엇을 그릴지 담아내야 했기에 구성과 표현에 신경 써야 하는 대작이고 게다가 고쳐 그릴 수 있는 그림이 아니기에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치밀한 작품이 바로 병풍화입니다. 1801년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의 천연두 완쾌를 기념해 그린 8폭 병풍 그림인 <삼공불환도>는 전원생활의 즐거움을 최고의 벼슬과도 바꾸지 않겠다는 그림으로 특히 이 작품은 중국에서 다루어지는 은거를 한국적인 주제로 바꾸었습니다. 
김홍도는 사실적인 묘사에 있어서도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기로세련계도>라는 작품은 노인 위안잔치를 그린 것으로 무려 250여 명이 넘는 인물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등장인물들이 다 제각기의 표정과 옷차림에도 변화를 주었습니다. 또한 다양한 인물들을 담아내어 현장의 생동감을 찰나에 담아낸 사진처럼 그려냈습니다. 더불어 정조의 수원행차를 그린 <화성능행도병>은 8폭의 병풍화는 묘사가 세밀한데 구경꾼들까지 표현한 치밀한 그림은 역시 현장을 그대로 담아놓은 듯합니다. 당시 화성행차 모습을 알기에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 작품으로써 뿐만 아니라 당시의 행차 모습도 알 수 있는 중요한 사료로서도 가치를 인정받고 있습니다. 
40대가 넘어서 김홍도의 그림 속에서 풍속화가 사라졌습니다. 47세가 되던 해에 그는 한 고을의 사또가 되었는데 정조 어진을 그린 포상으로 얻은 벼슬이었습니다. 그는 지위가 변화함에 따라 그림에도 변화가 생겼습니다. 조선사대부들을 중국풍으로 그리기도 하고 문인화풍의 그림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천재적인 실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일상 속의 소재를 담은 <소림명월도>는 과감한 소재배치를 통해 운치 있는 그림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벼슬자리에서 파직당하고 맙니다. 이후 다시 화풍의 변화를 겪었으니 <삼공불환도>나 <지장기마도>에서 그의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그는 화풍의 변화 속에서도 탁월한 실력을 보여준 김홍도는 조선 최고의 화가였습니다. 하지만 정조의 죽음 이후 김홍도는 후원자를 잃은 처지가 되었고 이는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이어졌으며 이후 그의 사망연대는 알려지지 않은 채 그림만 남기게 되었습니다. 

기로셰련계도

그가 우리에게 남긴 대표적인 작품은 바로 풍속화입니다. 서당도, 씨름도, 타작도가 대표적인 그의 작품들로 알려져 있는데 이 그림들은 풍속화첩에 수록한 그림들입니다. 풍속화첩에는 25점의 그림들이 있는데 김홍도의 풍속화는 배경을 생략한 채 인물과 주제를 부각시켜 우리에게 당시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또한 여러 매체에서 혹은 교과서에서 김홍도의 그림이 널리 소개되어서인지 우리에게 친근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체에 의한 전달만으로 김홍도의 그림이 우리에게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체 비례를 그대로 재현해내어 우리가 김홍도의 그림에 공감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지나치게 다리가 길거나 짧거나 머리가 크거나 작거나 하는 그런 그림들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신체 사이즈를 정확하게 캐치해 내어 화폭에 담았고 이러한 것으로 인해 우리는 저게 바로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습인 거야 라고 동의를 하게 된 것입니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보면 당시 조선의 서민들의 모습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대장간>이란 그림에서는 열을 보호하기 위해 긴 옷을 , <우물가>, <빨래터>에서는 젊은 아낙네는 젓가슴이 드러낸 옷을 입은 모습을 그대로 화폭에 담아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조선을 모자의 나라라고 할 만큼 다양한 종류의 모자를 쓴다고 기술한 바 있는데 김홍도의 풍속화에도 여러 종류의 모자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서는 서민들의 표정 하나하나가 살아 있습니다. 일례로 <씨름>이란 그림을 보면 이 화폭에 무려 22명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둥글게 둘러앉은 사람들은 제각기 포즈를 하고 있는데요. 관심있게 쳐다보는 사람들과 체면을 생각하지 않고 신발도 벗어둔 채 씨름을 관전하는 양반 그리고 씨름에 관심 없다는 듯 엿을 파는 장수와 다음 판을 준비하는 사람과 씨름을 하는 두 명의 사람까지 어느 하나 허투로 그리지 않은 것이 마치 승부가 나는 찰나를 담은 하나의 사진과 같습니다. <씨름>은 단오날 씨름경기를 그린 것으로 보입니다. 부채가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행해지는 씨름은 왼쪽어깨를 맞대고 왼다리에 샅바를 찬 오른씨름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씨름은 서울 군교에서 행해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허리에 샅바를 매고 하는 지금의 왼씨름과는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김홍도의 <씨름>을 통해 각 지방마다 다른 씨름이 행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리짜기

<서당도>를 보면 훈장선생님과 그 앞에서 책을 던져둔 채 혼나며 서럽게 우는 학생, 그리고 주위에 학생들이 제각기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는 모습이 옛날 서당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그런데 본래의 원근법이라면 멀리 있는 작게 그려져야 합니다. 하지만 이 그림에서는 가장 멀리 있는 훈장선생님이 가장 크게 그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어색하지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선생님이란 존재가 무척 크고 어려운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서당도>의 빗나간듯한 원근법이 오히려 와 닿는 것입니다. 단원 김홍도는 그마저도 계산하고 그린 천재입니다.
<자리짜기>라는 그림을 보면 자리를 짜고 있는 아버지는 사방관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사대부들이 평상시에도 예를 갖추기 위해 썼던 것으로 아버지는 양반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도 몰레질로 실을 뽑아내고 있습니다. 뒤로는 아이가 글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양반이라도 가난하면 노동을 해야 했던 당대의 사정과 그래도 아들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서기를 바라는 모습이 마치 오늘날에 자식이 공부를 잘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대로 담아놓은 것 같습니다. 그밖에 <새참>이란 그림에서는 웃옷을 벗어던진 농사꾼들의 모습이라던가 빨래하는 여인들을 주인공으로 삼은 <빨래터>라는 그림에서 이를 훔쳐보는 양반의 모습이 정겹고 해학이 느껴집니다. 
당시에는 사진도 없었고 아직까지 타임머신이란 것이 발명되지 않아 이 시대로 가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에 김홍도의 풍속화를 꼼꼼히 본다면 당시 서민들의 생활 속을 살짝 엿보는 효과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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