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에 표류한 네덜란드인과 하멜 표류기

2022. 10. 27. 20:28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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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지마

1653년 6월 18일 지금의 자카르타인 바라비아를 출발한 배가 있었습니다. 그 배의 이름은 스페르우르호, 하지만 네덜란드 선원들을 태운 배는 8월의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하게 되었고 그 중에는 헨드릭 하멜이란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는 제주관아로 끌려갔고 그들이 나가사키로 향하는 기도교인 정도로만 인식되었습니다. 
 이 일행이 나가사키로 가려고 했는데 나가사키에는 데지마라는 인공섬이 있었습니다. 본래 포르투칼과 스페인이 일본에 진출했지만 그들의 무역품과 같이 들어온 기독교는 문제를 일으켰습니다. 1637년 일본에서 시마바라 농민 반란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를 계기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추방되었고 선교를 배제한 무역만을 하는 조건으로 네덜란드가 데지마에서 제한된 무역을 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황금기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유럽 선박의 4분의 3은 네덜란드가 소유했고 그 소유의 대부분은 동인도회사의 것이었습니다. 전 세계를 휩쓸고 다닌 네덜란드, 그리하여 세계로 진출하는 네덜란드인이 많았으며 그 중에는 하멜 일행이 있었으나 그들의 연락두절로 동인도회사에서 실종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제주도에 떠밀려온 하멜 일행과 소통하기 위해 조선정부에서 파견한 것은 26년 전에 표류했다가 조선에 정착한 네덜란드인 박연이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벨테브레로 조선의 여인과 결혼하고 벼슬을 받았습니다. 그는 조선의 국방력강화에 힘을 보탰으니 중국을 통해 들여온 불랑기를 바탕으로 국산 화력무기 홍이포 개량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훈련도감의 외인부대장이었던 박연이 하멜일행에 던져준 메시지는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적인 메시지였다고 합니다. 
한양으로 끌려온 하멜은 효종의 심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조선의 배들보다 훨씬 큰 배를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온 고국의 면적은 조선보다도 작다하여 중국중심의 세계관에 갇혀 있던 조선 조정을 갸우뚱하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효종은 이들의 이야기를 관심 있게 들어주었습니다. 그는 이에 앞서 박연을 유용하게 활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효종은 왕실 경비인 내탕금으로 그들을 먹여주고 재워주었으며 그들은 임금의 친위대였던 훈련도감의 외인부대에 편입시켰습니다. 
 효종은 북벌을 계획하던 조선의 군주로 상처받은 역사를 봉합하기 위해 송시열, 이완 등을 대거 기용하고 군비를 강화, 성곽을 증개축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리고 무기 개량에도 힘썼는데 이 때 부싯돌이 내장된 수석시 조총이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조총의 개발에 하멜이 개입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헨드릭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린험시에서 기증한 하멜 동상이 하멜기념관 앞에 우뚝 서 있다.

하지만 조선에서 계속된 억류생활을 할 수 없었던 이들 중 일부는 청나라 사신의 귀환길에 갑자기 나타나 탈출을 시도합니다. 조선입장에서는 청나라에 외국인을 숨기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껄끄러워지고 이는 내정간섭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에 조선정부는 청나라사신을 매수하여 이를 무마시킵니다. 그리고 이들은 전라도 병영성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이곳은 군사요충지이기도 했는데 한양에서의 생활보다 자유로웠다고 그들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멜의 보고서에는 없지만 이들 중 1명은 조선인 아내를 맞이하고 아이를 낳았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하멜의 보고서에 없는 이유는 조선에서의 힘든 생활을 기록하여 보상금을 받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1666년 남아 있던 16 중 8명이 나가사키로 탈출합니다. 그들이 탈출하게 된 이유에 대해 나가사키 지방관에서 심문을 통해 밝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매우 불안했다고 합니다. 효종이 승하하고 중원의 지배자로 청나라가 그 위치를 공고히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조정은 붕당으로 권력투쟁이 한창이었는데 당시 조선 현종 집권기에 가뭄과 전염병, 기근이 조선을 덮쳤습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멜 일행을 조선정부에서 방치하였고 결국 전라좌수사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습니다. 특히 지방관이 누구냐에 따라 이들의 생활이 극과 극을 달렸습니다. 결국 네덜란드에 대한 그리움과 조선에서의 어려운 생활이 겹치며 이들의 탈출은 살기 위한 최후의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도착한 나가사키에서 그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난파선의 규모와 항해목적, 조선에서의 생활, 조선의 군사, 경제, 풍습, 종교 및 대외관계, 탈출경위와 조선의 입장 등 54개 항에 대한 질문을 받았습니다. 이 내용은 막부에 보고되었고 막부는 이를 통하여 국제 정세를 파악하였습니다. 즉, 조선의 중요 정보가 단 한 번의 심문으로 일본에 넘어간 것입니다. 한편 에도막부는 하멜일행을 조선이 억류한 것을 두고 외교문제로 비화시켰습니다. 네덜란드인들은 그들의 오래된 속국으로 을미약조에 따르면 표류한 배를 서로 통보해주기로 했는데 이를 조선이 어겼다는 것입니다. 이에 조선은 남만인들이 일본인들과 말과 생김새가 달라 그들의 속국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으며 조선정부에서는 그들과 말과 통하지 않아 그들의 목적지가 어딘지 몰랐다고 둘러댑니다. 이에 일본 정부는 조선에 박연이라는 귀순자가 있는데 몰랐을 리 없다고 반박하자 조선정부는 박연이 표류했을 때 왜관에 인계해려고 했으나 일본이 거부했지 않았느냐며 맞받아치는 바람에 사실상의 대화는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일본은 이 문제를 크게 부각시켜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과의 무역을 제한했는데 막부는 이에 대한 완화를 요구한 것입니다. 당시 일본은 전 세계 은 3분의 1을 생산할 정도로 막대한 은 생산국이었는데 은은 일본 내에서 결제수단이기도 했습니다. 이 은으로 중국의 비단도 사곤 했는데 17세기 중반이 되자 일본 내 은 부족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당시 중국은 일본과의 무역을 하지 않았으니 비단은 조선을 통해 들어왔고 조선을 거친 비단에 대해 일본은 더 많은 은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의 은 생산량도 급격하게 줄어들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었고 에도막부는 일본의 은 유출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은 대신 데지마로 들여온 물건 즉, 후추, 향목, 백반, 사슴가죽 등이 조선으로 넘어갔습니다. 어찌되었던 당시 무역수지 적자국이던 일본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조선이 하멜일행을 억류한 것을 빌미로 삼은 것으로 보입니다. 

하멜 표류기

1668년 하멜 일행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억류기간 작성된 보고서를 근거로 밀린 급료를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이 자료는 동인도회사에서 다른 의미로 중요한 자료였습니다. 그 자료가 우리가 알고 있는 하멜 표류기로 하멜이 그동안의 사정을 꼼꼼히 적었던 이유는 그가 무역선에 탑승하여 배의 관측과 배에 대한 여러 기록들, 그리고 무역 거래를 적어야 했던 서기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적은 그의 보고서는 하멜표류기로 유럽에서 간행되어 코리아란 이름이 자세하게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669년, 네덜란드는 조선과 직교역을 하기 위해 코레아란 배가 진수되었습니다. 네덜란드는 조선과의 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고자 했고 중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과의 직교역에 실패하고 조선에 남아있던 네덜란드인 8명만 데려왔습니다. 이를 막은 것은 일본이었습니다. 화란, 즉, 네덜란드가 조선과의 직교역을 할 경우 일본이 데지마를 폐쇄하겠다고 한 것입니다. 동인도회사에서는 데지마에서의 무역이 엄청 큰 것이었기 때문에 이를 포기할 수 없었고 일본은 이를 통해 서양의 문물을 차곡차곡 수입하여 발전시켜나갔습니다. 일본의 방해로  조선이 좀 더 이른 시기에 서양문물을 접할 기회를 차단당한 것입니다. 당시 조선 정부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될 수도 있는 문제이지만 한편으로는 네덜란드 배 코레아호가 조선에 당도했더라면 어떤 식으로는 조선이 역사적으로 중대한 결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일본이 스스로 막아버렸기 때문에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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