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를 지킨 수호자 안용복

2022. 10. 28. 20:2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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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릉도는 동해 가운데에 있는 섬으로 이전에는 우산국이라 불리던 섬이었습니다. 육지로부터 700리~800리 쯤 떨어져 있는 섬이고 강릉이나 삼척에서 높은 곳에서 보면 어렴풋이 보이는 섬이기도 합니다. 이 섬은 지증왕 12년인 511년, 신라의 장군 이사부가 정복하였습니다. 이후 고려 초에 울릉도사람들이 자신들의 특산물을 가지고 와서 왕에게 바쳤습니다. 그리고 조선 대에 들어서면서 육지에서 도망친 사람들이 이 곳에 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태종 대와 세종 대에 울릉도에 군사를 보내 그 곳의 사람을 잡았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울릉도는 임진왜란 뒤에 왜적에게 노략질을 당하여 다시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게 되었다. 근래 들으니 왜적이 의죽도를 점거했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의죽도가 바로 울릉도라고 한다.” -지봉유설-
그러던 안용복이라는 사람이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일본에서 사람을 보내와 따졌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따진 것은 조선에서 보낸 문건 “귀국은 죽도를 경계로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럼 안용복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전투선의 노를 젓는 병사였습니다 그는 일본인들이 거주했던 왜관에 출입을 하면서 일본어에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숙종 19년인 1693년, 여름 그가 타고 있던 배가 풍랑에 밀려 울릉도로 떠내려갔는데 당시 그 곳에는 먼저 떠밀려왔던 일본의 배 일곱척이 있었습니다. 일본인들은 이에 화가나 안용복을 잡아서 오랑도라는 섬으로 끌고 가 감옥에 가두게 되었습니다. 이에 안용복은 오랑도의 도주에게 울릉도와 우산도는 조선의 섬이라며 자신의 무죄를 따졌습니다. 오랑도 도주는 안용복을 백기주도라는 다른 섬으로 넘겨버리게 되었습니다.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을 손님으로 잘 대해주었습니다. 안용복은 그간의 일을 이야기하며 서로 침략을 금하고 친선을 두텁게 하자는 내용을 전달하였습니다. 이에 백기주도의 도주는 이에 동의하고 에도막부의 도주에게 이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에도 막부는 안용복을 돌려보낼 것을 명하게 되었고 울릉도에 일본인이 침략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의 외교문서를 발급해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안용복이 조선으로 가다가 장기도라는 섬에 이르렀습니다. 이 섬의 도주가 대마도의 도주의 사주를 받아 울릉도의 침략을 금지한다고 안용복이 가지고 있던 문서를 빼앗고는 대마도로 납치하게 되었습니다. 대마도 도주는 안용복을 강제로 구금하고 에도막부에 보고했다고 합니다. 에도막부는 이번에도 문서를 다시 발급해주며 안용복을 조선으로 보내라고 했지만 대마도도주는 문서를 다시 강제로 빼앗고 50일이나 안용복을 구금한 뒤 조선의 왜관으로 보냈고 왜관에서도 40일을 갇히다가 동래부에 보내주게 되었습니다. 동래부에서는 안용복의 이야기를 듣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있었던 일을 중앙에 보고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나라의 국경을 침범했다는 이유로 안용복의 2년간의 옥살이를 선고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억울했던 안용복은 떠돌이 승려 5명, 그리고 뱃사공 넷을 데리고 다시 울릉도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그 곳에 가보니 조선의 배 세 척이 먼저 와 고기를 잡고 대나무를 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배도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안용복은 이에 일본인들을 잡을 것을 이야기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이를 무서워하여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더니 일본은 오히려 송도 즉, 독도라고 하는 곳에 고기잡이를 하러 왔다가 우연히 들르게 된 것 뿐이라며 이야기하고는 돌아가버렸습니다. 다음 날 안용복은 송도도 원래 우산도에 속한 섬이라며 우산도로 그들을 따라갔고 일본인들은 도망쳤습니다. 그들이 도망친 옥기도라는 섬까지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 백기주도라는 섬까지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역시 백기주도의 도주는 안용복을 융숭하게 대접합니다. 안용복은 자신을 울릉도에서 범인을 수색하여 체포하는 장수인 수포장이라고 말하며 도주에게 벌어진 일을 자세하게 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이야기에 포함된 것은 바로 대마도주가 벌인 비리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쌀은 한 석에 반드시 15말씩, 그리고 면포는 35척씩, 종이는 한 권에 20장씩 보냈는데 대마도에서 중간에서 떼어먹고 쌀은 한 속에 일곱 말씩, 면포는 한 필에 20척씩 보내왔고 종이는 세 권만 보냈다고 보고한다며 이를 막부에 보고하여 대마도의 도주의 죄를 다스리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안용복의 일행 중에 글을 쓸 줄 아는 이가 있어 이야기를 상소로 쓰게 하였고 이를 백기주도의 도주에게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마도 도주의 아버지가 소문을 듣고 사정을 하게 되어 없던 일로 하자고 하는 바람에 무마되었고 백기주도의 도주는 앞으로 이와 같은 일은 없도록 하겠다며 안용복을 위로하였습니다. 

안용복이 조선에 도착하자 이 일을 알게 된 조선정부는 이들을 붙잡아 서울로 이송하게 되었습니다. 나라의 허락 없이 외국을 출입하여 분쟁을 야기했다는 이유로 사형에 처하려 한 것입니다. 오직 연돈녕 부사였던 윤지완만이 사형에 반대했습니다. 그는 윤지완은 대마도가 예전부터 사기를 친 것은 조선이 에도 막부와 직접 연결될 수 없었던 탓이 크다며 이를 안 대마도에서 두려워할 것이라며 안용복을 처벌하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이에 영중추 부사였던 남구만은 이 사건에 대해 세 가지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첫째는 안용복 덕분에 대마도의 비리를 알게 되었으니 울릉도를 둘러싼 분쟁에 대해 따져봐야 할 것이고 에도막부에 사신을 보내 대마도의 사기에 대해 직접 조사하겠다고 하면 대마도의 도주는 이를 두려워하여 자백할 것이며 이 방법을 가장 좋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두 번째로 내세운 것은 동래부를 통해 대마도에 서신을 보내고 먼저 안용복이 마음대로 글을 올린 죄를 말하고 나서 대마도에서 죽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거짓말한 것과 공문을 빼앗은 잘못을 따진 뒤, 회답을 기다리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에 안용복에게 죄를 물을 생각이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셋째는 대마도의 교활한 사기를 따지지 않고 안용복에게만 죄를 묻는 것인데 이는 오히려 저들을 좋게 하는 것이라며 이는 가장 안좋은 방법이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이에 남구만의 의견 중에서 조정은 두 번째 의견을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대마도도주는 스스로 굴복하고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전 대마도 도주의 잘못이라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두 번 다시 울릉도에 오지 않을 것을 다짐했습니다. 대신 안용복에 대해서는 죄를 감하여 사형 대신 귀양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현재 일본은 독도를 일본의 땅이라 주장하며 그들의 교과서에도 그러한 이야기를 싣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2005년에는 무라카미 가문의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여기에는 안용복을 취조한 문서였습니다. 당시 안용복은 조선의 팔도지도를 꺼내 보이며 강원도에 울릉도와 독도가 속하고 있음을 알리고 있습니다. 
‘강원도 안에 자산도라는 섬이 있다.’ -무라카미가 문서-
그리고 돗토리번의 공식문서인 이나바지에서는 안용복이 말한 자산도를 우산도로 우산도는 일본말로 송도, 즉 독도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편 1696년에는 죽도도해금지령을 내려 에도막부는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땅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습니다. 하지만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 칭하고 강제로 시마네현에 편입시킵니다. 그리고 1906년 독도시찰단을 파견해 주인없는 땅 독도를 접수했다고 알린 것입니다. 이는 독도가 일본의 고유영토라는 것과도 대치되는 것입니다. 
독도가 한국땅이라는 근거에 있어 안용복의 행동과 발언은 가장 결정적인 것입니다. 만약 우리 역사 속에 안용복이 없었더라면 독도가 대한민국 땅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것에 힘을 잃어버렸는지 모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안용복의 업적은 현대에서도 그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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