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지리학의 걸작 대동여지도

2022. 10. 30. 20:2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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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여지도

조선 후기 과학의 걸작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입니다. 이 대동여지도는 한 번쯤 교과서에 봤을 만큼 유명합니다. 높이 7m에 달하는 거대한 대동여지도를 보고 있노라면 현대과학이 들어오기도 전에 사람의 힘으로 이토록 윤곽선이 실제와 비슷하도록 그릴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이와 더불어 국가의 무관심 속에 이 지도가 제작되었고 김정호는 몇 차례나 전국을 돌고 백두산을 몇 번이나 올랐으며 그렇게 힘든 지도는 오히려 너무 정확하다는 이유로 불태워졌다는 이야기가 떠오르실 지도 모릅니다. 불과 몇십년 전 김정호의 위인전에 버젓이 들어있던 내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중 대부분이 왜곡되어 있는 이야기며 오히려 당시 김정호는 비변사와 규장각의 군사지도까지 참조하며 지도를 제작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왜곡된 이야기를 극적인 드라마를 제공하며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를 시대가 알아보지 못한 불운의 사나이로 만들었습니다. 

동국지도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다시피 김정호는 과거의 지도를 자료삼아 만들었습니다. 18세기 이후에는 정상기, 윤영 같은 민간인들이 전국지도를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가 김정호의 지도 제작이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상기의 동국지도의 같은 경우 ‘나라의 지형이 손바닥을 들여다 보는 것처럼 분명하다'고 표현할 만큼 감탄을 자아내는 지도로 알려졌습니다. 42만분의 1인 동국지도는 산이 많고 길이 굴곡이 심한 우리나라 지형의 특성에 맞는 백리 척 작도법을 사용하였는데 이는 100리(약 40km)를 1척으로, 굴곡이 심한 곳은 120-130리를 1척으로 차등을 두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실제에 가까운 방위와 거리계산이 가능하게 된 최초의 지도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제작된 조선의 지도에서는 압록강과 두만 유역이 다소 아쉽게 제작되었는데 동국지도에서는 보다 자세히 표현되었으며 독도도 표시되어 우리 영토임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동국지도에서는 2200여개의 지명과 함께 다양한 기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러한 것은 후대의 조선의 지도제작의 큰 흐름이 되었고 김정호에 정상기의 ‘동국지도’를 바탕으로 청구도를 제작하기에 이릅니다. 
청구도는 산맥과 하천이 상세하고 군, 현, 음은 물론 나루, 시장, 고개, 산성, 목장 등까지 기록되어 있는 지도였습니다. 당시 그의 나이 30세였습니다. 그는 이전에도 최한기의 서양식 세계지도인 지구전후도를 간행할 때 목판작업을 했기에 김정호는 이미 이 때에 서양의 지리적 지식과 지도제작법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저술한 지리서인 『여도비지』에 각 군현의 위도와 경도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다음 지도 제작에 경위도를 활용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축적된 지식으로 만든 청구도는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필사본이었기 때문에 널리 보급하기 어려웠고 그리하여 지도의 대중화를 위해 목판본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1861년 분첩절첩식으로 지도를 펴내니 그것이 바로 대동여지도입니다. 이것은 청구도가 나온 지 27년 만의 일입니다. 

대동지지

대동여지도는 축척이 청구도와 같은 16만 분의 1이고 청구도에서 사용되었던 경도와 위도를 이용한 지도제작법이 대동여지도에서도 활용되었습니다. 이렇게 지도의 제작법은 청구도와 비슷하지만 그 내용은 청구도를 능가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의 가치는 지도 본연의 기능인 정확성에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지도와 비교해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이 대동여지도는 청일전쟁 당시 일본군이 전투에 활용했을 뿐만 아니라 1900년대 초 일제가 5만 분의 1지도를 만들 때 참조하기도 했습니다.
대동여지도를 만들 때 김정호는 당시의 여러 지도를 활용하였습니다. 그 지도들은 아마 서로 다른 축척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지도들을 같은 축척으로 만들어놓고 서로 맞추면 직접 전국을 돌아다니지 않고 지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동여지도는 관리와 보관에 용이하게끔 분첩절첩식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모두 접을 경우 22개의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0센티미터 정도의 책처럼 되는데 이를 연결하면 거대한 지도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결된 대동여지도에는 기호를 활용한 것이 이전의 지도와 다른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의 지도에서는 지도 안에 많은 정보를 보여주기 위하여 설명이 가득했습니다. 이러한 제작을 통한 지도는 여백이 없을 정도로 빼곡이 글씨로 가득찼는데 대동여지도는 여러 기호를 사용하여 지도 안에 다양한 내용을 실용적으로 수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대동여지도가 현대의 지도와 다른 점은 바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국토관이 반영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땅을 사람의 몸으로, 산줄기를 뼈대로, 강줄기를 혈맥으로 생각하여 지도에 표현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산줄기의 경우 동해안,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강을 양분하는 큰 산줄기를 대간, 정간이라고 표현하였고 강은 산을 건너거나 산이 물을 넘지 못하도록 하는 원리에 따라 산줄기와 물줄기를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제작한 청구도에서는 산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는데 대동여지도에서는 높은 산일수록 두껍고 크게 표시하였고 백두산은 산봉우리를 하얗게, 칠보산은 마치 보석이 박혀 있는 모양으로, 금강산은 일만 이천봉이라는 별칭답게 무수히 많은 봉우리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리고 대동여지도에서는 청구도에서 표현되지 않은 도로와 물길이 나와 있습니다. 도로는 직선으로 물길을 곡선으로 표시하였고 도로의 경우 10리마다 방점을 찍었는데 높낮이와 구불구불한 정도를 모두 염두에 두고 찍은 것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정보를 담은 대동여지도는 지도 하나만 염두에 두고 제작된 것은 아닙니다. 김정호는 “지지가 지도의 근본”이라고 했듯이 대동여지도는 <대동지지>의 부록으로 편찬된 것입니다. 즉, 일종의 지리부도인 셈입니다. 김정호가 만든 <대동지지>는 32권이나 되는 방대한 책입니다. '대동지지'는 1861년부터 1866까지 김정호가 편찬해 낸 지리서입니다. 생각해보면 지도에는 많은 양의 정보를 한꺼번에 담는 것에 한계가 있습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지지의 존재이고 <대동지지>와 대동여지도는 상호 보완적인 관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김정호가 대동여지도에 앞서 청구도를 제작했다고 했습니다. 그리하여 청구도는 <동여지도>와 짝을 이루고 동여도는 <여도비지>와 짝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작한 경험을 바탕이 대동여지도의 결실로 이어진 것입니다. 
 ‘김정호는 그동안 팔도를 세 번이나 돌아다니고 백두산을 여덟차례나 올랐다. ……얼마 후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김정호는 대동여지도를 어느 대장에게 건네주었다. …… 외국을 배척하던 대원군은 지도판을 압수하고 김정호 부녀를 잡아 옥에 가두었다. 부녀는 그뒤 옥중에서 고난을 당하다가 죽었다.’ -조선어독본-
이 내용들은 일제가 김정호의 재능을 몰라본 대원군의 무능과 위선을 강조하고 자신들의 통치를 합리화시키기 위해 만든 이야기였습니다. 따라서 대부분 사실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의 근원은 김정호처럼 서양의 천문학과 지도학을 공부하여 정밀한 지도를 만들었던 일본인 가케야스가 만든 지도가 독일인에게 유출되자 일본정부에서 그를 잡아가두고 옥사하게 만들었는데 자신들의 이야기를 김정호에게도 적용시킨 것입니다. 가케야스가 <대일본연해여지전도>는 대동여지도에 비해 13년이 앞서 제작된 정밀한 지도입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정확하고 세밀한 지도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그래도 <대동여지도>가 중국이나 일본에서 동시대에 제작된 지도와 비교하여 갖는 의의라면 조선의 전통제작방법이 투영된 독창적이고 세밀한 지도라는 점입니다. 또한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것처럼 김정호가 직접 돌아다니며 제작한 지도는 아니지만 그가 지도를 연구하고 그간에 받아들이고 축적한 지식으로 일궈낸 걸작이자 나만 보는 지도가 아닌 백성들 모두가 공유하기를 바라는 애민정신에서 비롯된 작품으로 여기에는 김정호가 우리 국토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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