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건축 걸작 수원화성
2022. 10. 31. 20:2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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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전기에 대표적인 성군으로 세종이 있다면 조선 후기에는 정조가 있습니다. 정조는 여러 업적을 남겼습니다. 1783년에는 자휼전칙(字恤典則)이라는 법열을 통해 굶어죽는 아이들이 없게끔 구제하고자 했으며 초계문신제를 시행하여 여러 인재들을 등용하기도 했습니다. 정조는 신분에 따른 차이를 두지 않았는데 이덕부, 박제가, 유득공이 이 시기에 등장한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용의자나 피의자에게 심한 고문을 가하지 않도록 하는 법률서 흠휼전칙(欽恤典則)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도망간 노비를 추적하도록 하는 추노를 보호하는 법률 노비추쇄법을 폐지하였으며 신해통공을 통해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국가의 허락을 받지 못한 상인들이 활동에 자유를 주었습니다. 그가 정치를 행함에 있어 당파를 적절히 이용하고 자신의 정적을 제거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던 모습에에 당시 신하들에게는 어진 임금으로 보이기 힘들겠지만 적어도 백성에게는 정조는 성군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성군으로 알려진 정조는 아픔을 갖고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실록에서는 사도세자의 병은 겨간조동지후라 하여 가슴이 뛰고 답답해 조급하고 망령된 행동을 했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당시 영의정이자 장인이었던 홍봉한은 병같지 않은 병에 걸렸다고 비꼬았습니다. 왕실의 의사들은 가미이진탕을 달여서 먹이는 등 노력을 했으나 고쳐지지 않았습니다. 학문을 게을리하고 궁녀나 내시를 함부로 죽이는 등 비이성적인 사도세자의 비이성적인 행동에 열이 받은 영조는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합니다. 하지만 이에 주위 사람들도 말리고 애원하였으며 그 중에는 당시 세손이었던 어린 시절의 정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극이 있은 후 영조는 후회하면서 세자에게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립니다. 진실이야 어떠하든 기록에서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에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것은 정조입니다. 정조는 이 일을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능이 있는 수원에다 성을 쌓고 소경(小京)으로 승격시킵니다. 이곳은 수원의 새로운 중심지이자 신도시로서 염두에 둔 것이었습니다.
이 화성은 본래 10년을 목표로 잡고 건축했습니다. 1794년에 축조하여 2년 반 만에 건설된 기적을 이루었습니다. 게다가 흉년 때문에 6개월의 공사중단 기간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28개월만에 지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빨리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은 자재를 표준화시켜 공급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돌의 등급을 정하고 깎고 자르는 것에 있어서도 급을 매긴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미리 다듬은 돌로 현장에 조달하여 쌓은 것입니다. 다산 정약용이 고안한 이 방법은 성의 건설기간을 단축시킵니다.
하지만 결국 성을 쌓는 것은 사람입니다. 돌을 잘 다듬어야 했기에 돌을 다듬는 장인에게는 잔치를 베풀어 힘을 불어넣어주었으며 화성건축에 참여한 백성들에게 일당을 주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의무를 다하기 위해 억지로 끌려나와 해야 했던 역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일당은 왜 주었을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부실공사를 막기 위해서입니다. 돈을 받지 않고 일하는 경우는 대충 하다가 가버리는 수가 생깁니다. 그런데 돈을 받고 하는 일이니 하는 입장에서도 그에 맞는 노동을 제공하기에 성은 견고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무거운 돌을 쌓아 건축한 수원 화성은 무엇으로 들어올렸을까. 바로 거중기라는 기기입니다. 정약용은 성을 효율적으로 쌓기 위해 당시 서양과 중국의 기술책을 참고하여 여러 기기를 발명하였습니다. 이러한 기계들은 사람들의 노고를 덜 수 있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거중기입니다. 거중기는 40근의 힘으로 600배 이상의 무게를 들어 올려 건축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의 땀과 조선의 과학으로 완성된 수원화성. 얼마나 잘 쌓여진 성일까요. 수원 도심 한가운데 있는 이 화성은 조선에사 가장 마지막에 쌓여진 성으로 비교적 옛 모습을 잘 가지고 있는 성입니다. 그런데 이 성은 1970년대 상당부분 복원되었습니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재되려면 해당 유산이 형성될 당시의 재질과 기법이 그대로 보존되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일을 예견이라도 한 듯 선조들은 화성성곽(華城城郭) 축조에 관한 경위와 제도·의식 등을 기록한 책인 『화성성역의궤』라는 책을 남겼고 이를 통한 복원이 유네스코를 납득시켜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습니다.
수워화성의 성벽은 기존에 지어진 것보다 낮은 성벽을 가졌습니다. 이는 당시 최첨단 무기인 화포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적이 오르지 못하도록 높게 쌓아야 하는 것 아닌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고대에 지어진 성곽은 높은 성벽이었습니다. 그 옛날에는 보병과 기병이었기 때문에 높은 성벽이 위력을 발휘하였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높은 성벽은 오히려 화포에게 취약했습니다. 그리고 성을 쌓는 석재도 이전과 달라졌습니다. 옛날에 지어진 성의 성벽에 쓰인 석재보다 크고 길이를 길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심석이라는 것을 두었습니다. 예를 들면 테트리스할 때 네모블럭과 기역자 모양의 블록을 생각하시면 되는데요. 기역자블록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심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 보면 둘 다 네모모양이지만 심석에 해당하는 돌은 실제로 더 깊숙이 들어가서 옆에 있는 돌과 맞물리도록 합니다. 그렇게 하면 화포의 공격에 좀 더 버틸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수원화성의 특징은 돌로 된 성벽과 벽돌로 된 성벽이 둘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병행하여 쌓은 이유도 역시 화포의 공격에 대비한 것입니다. 돌로 쌓은 곳에 화포의 공격을 받게 되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잇습니다. 하지만 벽돌은 화포의 공격을 받더라도 일부만 파손됩니다. 그리하여 돌로 기본으로 성을 쌓되 공격에 취약한 부분은 벽돌로 쌓았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외적으로도 아름다움을 가져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몸을 숨기며 적을 공격할 수 있는 900여 개의 타를 두었는데 여기에는 3개의 구멍이 이써 2700여 개의 구멍에서 총으로 위협을 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벽에 설치된 현안이라는 구멍은 뜨거운 물이나 오물을 흘려보내 적에게 타격을 입히는 시설이었습니다. 초소의 기능을 가진 돈대에서 유래한 동북공심돈은 자신의 몸을 숨기고 총과 포로 공격할 수 있었으며 북공심돈은 성벽앞쪽으로 노출되어 사방으로 공격하는 시설이었습니다. 그리고 포루를 두어 성벽 아래에서도 공격이 가능하도록 하였으며 성문을 둘러싼 웅성은 사방에서 포위 공격하는 시설로 수원 화성의 4대문에 모두 배치시켰습니다. 성문 옆에는 측면으로 돌출된 적대가 있어 성문으로 들어오는 적에게 측면공격을 가하도록 하였으며 성문이 불탔을 것을 경우를 대비해 오성지를 두어 물로 불을 끌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직선을 된 성벽에는 치를 두어 측면공격을 하도록 하였는데 치의 간격을 고려하여 건설하였으니 이는 이중 공격이 가능하게 하였으며 적으로 하여금 적이 숨을 수 있는 사각지대를 없앤 것이었습니다.
수원화성은 전투능력이 좋은 성으로 그야말로 난공불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정조는 수원화성에서는 군사훈련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상당한 병력이 투입된 훈련을 통해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권위와 군사적 힘을 과시했을 것입니다. 특히 정조의 친위부대 성격을 지닌 장용위에서 비롯된 장용영이 수원화성의 군사훈련의 주력부대였습니다. 당시 수도 한양과 가까웠던 수원은 충청, 전라, 경상으로 가는 길목이 있었기에 군사적 요충지로 역할을 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정조는 정치적 이상을 실현할 곳으로 수원을 선택했으며 그리하여 여기에 조선 최대의 군영을 두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며 신하들에게 그 위엄을 알리는 장소로 활용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서양의 건축기술이 활용되어 과학적으로 건설된 수원 화성은 조선에서 가장 강력한 성이자 건축걸작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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