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 이익의 성호사설과 그의 사상
2022. 10. 26. 20:2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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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은 성리학 사회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성리학이 조선사회에 뿌리내리면서 한 편으로는 안타까운 면도 있었는데 뿌리깊이 박힌 이러한 사상 때문에 사회발전을 더디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현실에 적용하여 실용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새로운 학문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상은 이전의 유학과는 전혀 다른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학 속에서 민생을 도모하는 실용성이 깃든 학문을 추구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학문을 연구한 양반 중에 토지를 바탕으로 한 정치, 경제, 사회적 개혁을 꿈꿈 학자가 있었으니 그는 이익이었습니다. 이익은 자신의 호를 따서 성호학파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성호란 호는 근처에 성호라는 호수가 있었는데 손님이 오면 함께 망둥이를 잡았다는 곳에서 유래하였습니다.
성호 이익은 쳥안도 운산에서 태어났습니다. 두 살 때는 아버지를 여의었고 이후 안산에 와서 정착하여 살았습니다. 그의 선친은 한때 사헌부대사헌을 지낸 고관이지만 1680년 경신대출척 때 진주목사로 좌천됐다가 운산으로 유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호 이익은 당쟁이 치열했던 당시 노론에 밀려난 남인 기문의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둘째형 잠으로부터 글을 배웠지만 이익이 26세 되던 해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습니다. 아마 이러한 집안 상황이 그를 집안으로 밀어넣은 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는 평생 관직이 나아가지 않았고 학문에 몰두하며 후학을 양성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것이 바로 『성호사설』로 이 책은 조선 후기의 명저로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성호사설』은 40세에 들어서면서부터 책을 읽고 느낀 점이나 제자들의 질문에 답한 내용을 기록해둔 일종의 백과사전류로 분류되는 책입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80세가 되었을 때 집안의 후손들이 정리해 둔 것으로 사설이라고 하는 것은 자질구레한 글이란 뜻으로 성호 이익은 자신의 글에 대해 낮추어 부른 말들이었습니다. 이 『성호사설』은 천지문, 만물문, 인사문, 경사문, 시문문으로 크게 분류하여 3천 여편이 달하는 항목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지문은 223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천문과 지리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양의 천문 지식을 바탕으로 해와 달, 별, 바람, 비 등에 관한 연구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여기에는 지구가 둥글다고 적혀 있으며 지구의 아래 위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사상을 엿 볼 수 있습니다.
만물문에는 368항목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사물에 관한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주로 복식, 음식, 농사, 가축에 관한 것으로 예를 들면 “떡 속에 콩가루 소를 넣고 솔잎으로 쪄서 만드는데 이는 송병이라는 것이다”이라고 송편을 소개하고 호박에 대해서는 “호박은 북쪽으로는 중국, 남방으로는 일본 큐슈, 오키나와, 동남아, 아라비아 등 다양한 루트로 들어왔을 것이다.”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사문은 990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정치와 제도, 사회와 경제, 학문과 사상, 그리고 혼인 관계, 제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경사문 1048항목에서는 옛날 유교경전과 역사책에 대하여, 그리소 시문문에서는 중국문인과 우리나라 문인의 시와 문장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성호사설은 지은 이익은 당시 조선사회를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당시 붕당이 치열했습니다. 그를 이 붕당의 원인은 세습제로 인해 양반의 숫자는 늘어나는데 관직은 제한되어 있어 붕당은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양반도 생업에 종사해야 한다고 말하며 신분제 타파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토지제도 개혁도 이야기했는데 한전법을 실시하여 양반들의 대토지 소유를 막고 국가의 세금을 늘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과거제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과거와 같이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농사를 짓는 백성 중에서 재능과 덕망이 있는 자를 뽑아 벼슬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성호사설』에서는 환곡의 폐단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이 제도는 흉년이나 춘궁기(春窮期)에 곡식을 빈민에게 대여하고 추수기에 이를 환수하던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익의 마을에서 망한 집 중에 8할에서 9할은 이 환곡과 사채 때문에 그러하다고 적고 있습니다. 환곡은 이자의 10분의 일을 받지만 썩은 곡식이 섞여 있었으며 이동과정에서 흘리는 부분과 오가는 길에 먹는 양식, 그리고 이를 이동시키는 인부들의 품값까지 포함시킨 것입니다. 그리하여 빌린 지 불과 7~8개월이 못되는 사이에 두 배로 갚아야 했으며 당사자가 갚지 못하면 인척까지 찾아가 돈을 받아냈다고 합니다. 이를 위해 고을 수령은 각 마을로 군졸을 보냈다고 하니 그 폐단이 엄청났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익은 토지를 독점하는 부자들을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소전주들을 몰락시켜 빈부격차를 심화시키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막강한 권력이 오히려 법을 무너뜨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국가에서 베풀어주는 혜택은 큰데 가진 사람들의 탐욕은 진나라 멸망시기보다 더 하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와 더불어 그가 주장한 것은 바로 사농합일이었습니다. 실제로 그는 손수 텃밭을 가꾸고, 꿩과 닭을 치고 벌을 키우면서 종일토록 농부들과 농사일에 관해 이야기하는 그는 실천하는 선비였던 것입니다.
이익은 노비제도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고려 태조 때 전쟁이 나면 그 포로를 소유하도록 해 이를 토대로 대대로 노비로 삼았다며 한 번 천한 종이 되면 자자손손 그 신세를 면치 못한다하여 천하고금을 통하여 이런 일은 없다고 비판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그가 안타깝게 여긴 이가 바로 천민 시인 백대붕이라는 사람으로 그는 전함을 수리하고 관리하는 관청인 전함사의 노비였습니다. 백대붕은 임진왜란 때 이일의 부하로 들어갔다가 패전하면서 전사하였습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그의 또다른 저서인 『성호집』에서 양천합일이란 단어로 나타났습니다. 즉, 신분에는 귀천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익은 또한 시가와 문장을 위주로 하는 과거시험에 대해 비판도 하였습니다. 그는 과거와 천거를 함께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농사를 짓는 자 중에 재능과 덕망이 있는 자에게 벼슬을 주어야 하며 해마다 일정한 비율로 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성호사설의 <천지문>에서는 동양의 천문학이나 지리학에 비해 서학이 매우 탁월하다는 입장을 내놓았습니다. 그는 서양의 역학은 중국으로서는 거의 미칠 수가 없다고 기록하며 서양이 첫째이고 이슬람이 그 다음이라고 기술한 것입니다.
이익의 『성호사설』에서는 조선시대의 3대 도적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연산군대의 홍길동, 명종대의 임꺽정, 숙종 대의 장길산을 들고 있습니다. 충청도 지역에서 활동한 홍길동은 낮에도 당상관 차림으로 관아를 습격하였고 임꺽정은 황해도 봉산지역, 장길산은 함경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고 전합니다.
조선시대에도 근친살해는 엄청난 법죄였습니다. 인륜을 거스리는 일에 대해서 엄히 다스린 것입니다. 자식이 아비를 죽이는 일이 일어나면 해당 고을을 강등시키기도 했습니다. 충청도에서는 큰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로 인하여 공홍도로 이름이 바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이익은 몇 년 뒤 원래의 명칭으로 돌아간 들 무슨 의미가 있겠냐며 사람에게 벌 줄 일이지, 땅에게 죄줄 일은 아니라고 비판하였습니다.
“잘못은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명백히 사람이 만들어낸 제도에 있다.” 성호사설 16권 인사문 민빈
이렇게 이익은 성호사설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담아 다양한 사회개혁을 발표했고 이는 후대 실학자들의 성호학파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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