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신윤복은 왜 금기를 소재로 삼았을까.
2023. 1. 8. 07:4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728x90
신윤복은 조선시대 후기의 풍속화가로 특히 여성들을 주소재로 삼은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의 그림이 주목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성문화에 대해 드러내놓는 것에 대해 금기시하고 성리학적인 유교질서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던 때였지만 신윤복의 그림은 18세기의 모습의 풍속을 가감없이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신윤복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인 미인도는 옷고름을 풀려고 하는 조선여성의 전신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림과 함께 그림에는 적혀있는 문구가 있습니다.
‘盤礡胸中萬化春 筆端能與物傳神(반박흉중만화춘 필단능여물전신)’
‘가슴속 깊은 곳에 서려 있는 춘정, 붓끝으로 능히 그 마음 전하도다.’
이 연인은 가채모양의 머리를 한 것으로 보아 사대부가 아닌 기생으로 보이는데 착 달라붙은 저고리에 주홍색 허리끈으로 몸을 감싸고 있지만 노리개를 손으로 살짝 잡아든 모습으로 옷고름을 풀려고 하는 모습은 관능적이라 할 수 있으면서도 우아함과 품격이 동시에 담겨 있습니다. 그림 속 여인의 머리는 트레머리라고 하는 일종의 장식용 가발인데 이것이 사치가 심해 영조 때에는 금지했다고 합니다.
신윤복이 그린 여성들의 그림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단오풍정’이라는 그림에서는 단옷날 여인네들의 몸을 씻는 모습이 현실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특히 다홍색 치마를 입은 여인네가 그네에 오르려는 모습이 시선을 빼앗는 가운데 그 냇가의 여인네들을 몰래 훔쳐보는 두 동자승의 모습이 익살스럽습니다. 또한 신윤복의 그림에는 당시 조선사회가 역성들을 억박했던 모습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중 ‘니부탐춘’은 두 여성이 두 개의 교미를 바라보는 장면인데 무릎을 세운 과부는 이를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고 댕기머리의 소녀는 이 광경이 망측스러운지 손으로 과부의 허벅지를 꼬집고 있습니다. 당시 여인네들의 바깥출입이 자유롭지 않았는데 개들은 아마 담장 밑에 구멍을 통해 드나들며 애정을 키워온 것으로 보입니다. ‘월하정인’이 남녀간의 은밀한 사랑을 포착한 모습이라며 ‘월야밀회’라는 그림은 달밤에 이루어지는 애정을 더욱 과간하게 표현했는데 우연히 이를 본 여인의 모습도 함께 그려졌습니다. ‘기방무사’는 ‘기방에 아무 일도 없었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두 남녀가 방안에서 애정행각을 벌이다 문 여는 소리에 화들짝 놀라 정신을 차리는 모습이고 자신 때문에 놀랐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한 기생이 유유히 걸어오고 있는 모습은 유교적인 조선사회에서도 숨기지 못한 성본능과 그럼에도 이를 숨겨야 하는 두 남녀의 모습이 현대 비밀연애를 하는 사람의 모습과 닮아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신윤복은 모든 그림에서 여성이 빠지지 않고 나온다고 하니 신윤복에게 여성은 그림의 주요소재였습니다.
하지만 신윤복의 그림의 여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후기의 성리학적 질서에 결박되어 있는 그런 모습과는 거리가 멉니다. ‘연소답청’이란 그림에서는 갓을 쓴 양반이 말을 탄 기생의 시중을 드는 듯한 모습입니다. 한 양반은 기생의 말을 끌고 있고 또 한 양반은 뒤에서 따라오고 있는 것입니다. 아래에는 장옷을 뒤집어써 얼굴의 표정을 알 수 없는 모습도 나오는데 이 여인이 탄 말을 끌고 있는 어린 종과 갓을 종에게 내어주고 맨 상투차림으로 따라가는 양반은 갓 쓴 것도 잊은 채 기생의 뒤를 따라가는 모습이 아마 토라진 여인네의 비위를 맞추고 싶은 모양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당시 사회적으로 옥죄어 있던 여성들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한 상상의 산물은 아닐 것입니다. 당시 문인들의 시에서도 기생을 대동하고 봄나들이 가는 모습을 전하고 있으니 신윤복의 그림은 생생한 조선사회의 삶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윤복의 그림은 현대의 잣대로 봐도 과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삼추가연’이란 작품은 ‘깊어가는 가을에 아름다운 인연을 맺는다.’를 담고 있지만 그림의 실상은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상의를 풀어헤친 남성의 상투는 머리가 종종 삐져나온 모습이고 앞의 소녀는 속치마를 보인 채 앉아있는 모습으로 중대한 일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인지 마치고 난 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그림의 제목과는 다르게 성매매현장을 담아낸 모습이라고 하니 그림에서 뒷모습만 보인 여인네의 심정이 이해가 가는 부분입니다.
이렇게 보면 신윤복의 그림은 차라리 풍속화가 아닌 여색도에 가까우며 당시 이 그림은 큰 논란을 낳았을 거라는 생각은 불보듯 뻔한 일입니다. 그래서일까. 신윤복은 전해지는 작품과 달리 그의 기록과 행적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그가 남장여자였을 것이라는 추측을 바탕으로 한 드라마가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드라마 속 설정은 현재 학계에서는 부정되어지고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그림들이 자신의 경험에 바탕으로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신윤복은 당대 잘 노는 중인 출신의 화가였지 않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사람이면서도 좀 나쁘게 말하면 플레이보이였는지도 모릅니다. 그런가 하면 신윤복을 풍속화가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그와 함께 떠오르는 인물이 있으니 그는 바로 김홍도입니다. 둘 다 같은 시대를 산 사람이지만 이 둘의 관계를 기록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신윤복의 그림에서 김홍도의 화풍의 영향을 짐작할 수 있으니 둘은 사제관계이거나 가까운 사이였을지도 모른다고 추정할 뿐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김홍도와 신윤복이 조선시대 그림을 그리는 관청인 도화서 소속으로 서로 만남을 갖지는 않았을까요.
‘도화서 화원으로 신윤복은 너무나 비속한 것을 묘사하여 필경 도화서로부터 구축(拘縮)까지 당했다 하거니와…’
하지만 이 기록은 신윤복의 사후 100년이 지나서 나온 한 미술평론가가 전하는 내용으로 사실을 확인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또한각종 의궤에서는 신윤복의 이름을 확인할 수 없으니 이것만으로는 신윤복은 도화서에서 활동하지 않았고 따라서 김홍도와 신윤복이 도화서에서 만나지는 않았을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조선시대 화원은 집안 대대로 전해지는 직업이고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화원이었으므로 그가 도화서에서 활동했거나 아니면 최소한 도화서에 근무할 수 있는 시험 정도는 보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윤복의 그림을 춘화라고도 표현되기도 합니다. 현대로 치면 일종의 야동인 셈입니다. 동아시아에서 표현된 에로틱한 그림들을 춘화라고 하는데 조선은 유교적인 분위기 탓에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그 등장이 늦었습니다. 김홍도의 그림에서도 춘화를 암시하는 표현이 있으나 이는 양반이 시골아낙을 훔쳐보는 장면이라든가 한량이 우물가의 여인을 노골적인 쳐다보는 것 정도로 당시에는 아마 이 정도로 김홍도의 그림을 비판의 소재로 삼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조의 총애를 받고 있던 김홍도도 사회분위기를 의식해 윤리적 장치를 마련하고 이런 춘화적인 요소를 넣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반면 신윤복의 그림은 더욱 과감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남긴 건곤일회첩은 노골적인 표현이 드러낸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 여성들의 모습은 당시 문인들의 한탄이 나타나니 소매가 좁고 짧은 저고리를 입으며 여름에 있는 홑저고리는 말아 올리니 치마와 닿은 부분이 가리지 못해 해괴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리고 실학자 이덕무는 ‘요즘 여자들의 옷은 저고리가 너무 짧고 치마는 너무 길고 넓으니 의복이 너무 요사스럽다.’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당시 모습을 담은 신윤복의 화풍은 현실고발이기보다는 당시 화가들이 과감하게 담지 못한 현실을 후대에 보여주기 위함이 더 큰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신윤복에 대한 정보는 적습니다. 1758년에 태어나 1813년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과 그가 남긴 그림이 전부입니다. 후대에 그에 대한 기록이 부족한 이유는 과감한 그림으로 표현한 탓에 가문이나 사회에서 그 행적이 지워진 것은 아닐까요. 그럼에도 그림만은 남겨진 것은 그의 천재성이 후대에 가서 알려지길 바랬던 누군가의 바람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조선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흑산도 해역의 생물학사전 자산어보 (2) | 2023.01.10 |
---|---|
조선왕조에 대한 가장 생생한 기록 승정원일기 (0) | 2023.01.09 |
춘향전 속 이몽룡은 실재했을까. (1) | 2023.01.07 |
최초의 한글조리서 음식디미방 (0) | 2023.01.06 |
18세기 초반 제주도의 모습 탐라순력도 (2) | 2023.01.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