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은 왜 대동법 시행을 꺼렸나.
2023. 2. 23. 08:5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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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600년대 초반 임진왜란은 끝이 났지만 여전히 그 상처는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경작지는 크게 훼손되었고 이로 인해 농사지을 땅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나마 남아 있던 농지도 부자 양반들의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일반 농민들은 양반들의 토지를 빌려 경작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농민들은 경작을 하고 나서 지주에게 많은 지대를 받쳐야 했습니다. 여기에 세금도 내야 했으니 농민들의 삶은 나아질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당시 임금인 광해군에게 시급한 것은 이러한 농민들을 살리는 일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의 경작지를 늘려야 했습니다. 당시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은 조선 전체를 합친다 해도 전쟁 전 수준의 전라도 수준 정도인 50여만결에 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당시 공명첩을 시행하여 돈을 받아 세금을 체워나갔으며 공납제도의 수정도 시급했습니다. 당시 공납은 세금을 각 지역의 토산물로 내게 하는 제도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생산되지 않는 공물을 각 지역에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국가에 필요한 물건을 지정해 두고 그것을 마을 단위에 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시 교통이 발전하지 않았던 시대이므로 그러한 상황에서 현물공납은 농민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제도를 틈타 이익을 얻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방납업자들로 이들은 비싼 수수료를 받고 공납이란 것을 대행했고 그 과정에서 권력자들과 결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이원익은 주장한 것은 다음가 같습니다.
‘선혜청을 설치했다. 전에 영의정 이원익이 의논하기를 “각 고을에서 진상하는 공물이 각사(各司)의 방납인(防納人)들에 의해 중간에서 막혀 물건 하나의 가격이 몇 배 또는 몇십 배, 몇백 배가 돼 그 폐단이 이미 고질화됐는데, 기전(畿甸)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그러니 지금 마땅히 별도로 하나의 청(廳)을 설치해 매년 봄·가을에 백성들에게서 쌀을 거두되, 전(田) 1결당 봄·가을에 8두씩 거둬 본청에 보내면 본청에서는 당시의 물가를 보아 가격을 넉넉하게 헤아려 정해 거두어들인 쌀로 방납인에게 주어 필요한 때 사들이도록 함으로써 간사한 꾀를 써 물가가 오르게 하는 길을 끊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두 차례에 거두는 16두 가운데 매번 1두씩을 감해 해당 고을에 주어 수령의 공사비용으로 삼게 하고, 또 일로(一路) 곁의 고을은 사객(使客)이 많으니 덧붙인 수를 감해 주어 1년에 두 번 쌀을 거두는 외에는 백성들에게서 한 되라도 더 거두는 것을 허락하지 마소서. 오직 산릉과 조사의 일에는 이런 제한에 구애되지 말고 한결같이 시행하도록 하소서”하니, 따랐다. 그런데 전교 가운데에 ‘선혜(宣惠)’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선혜청이라 이름했다.’ (1608년 5월7일) 『광해군일기』
이원익은 백성들이 공물 대신 쌀을 내면 정부에서 이것으로 특산물을 구입하자는 의견을 낸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 더해 토지가 없거나 영세한 농민보다 부유한 지주가 조세를 더 많이 내도록 하였으니 소득재분배효과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개혁에 농민층과 영세한 선비들은 반겼으나 지주층과 방납업자들은 격렬히 반대하였습니다.
"경기도에 시행해본 결과 경기도 백성들이 편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모든 도(道)에 두루 시행해 만백성이 균등하게 혜택을 받도록 하는 게 참으로 지금의 급선무입니다." 『광해군일기』
이 사료를 통해 경기도에서 대동법을 2년반 동안 시범 실시하였고 이를 토대로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제도의 시행을 허락한 광해군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선혜청 제도(대동법)는 오래도록 시행할 만한 것인가? 일일이 수정한다면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쌀을 내게 하는 일을 영원히 시행할 수는 없을 듯하다." 『광해군일기』
광해군 시기에 대동법의 시행이 시도되었고 백성들에게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 확대 시행하려 했지만 광해군은 대동법 확대에 난색을 표했습니다. 백성들을 위해 실시하는 제도인데 광해군은 이에 대해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경기도에서 시범시행하고 긍정적인 반응을 얻었고 이후 강원도 관찰사 홍서봉이 강원도만큼이라도 확대 실시하자는 건의가 들어왔으나 이것도 거부되었습니다. 거부한 사람은 광해군, 광해군은 무엇이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당시 광해군의 집권 당시 북인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북인들이 방납업자들과 상당한 관계를 맺고 있던 것입니다.
"왕실과 권력자들인 방납세력의 방해가 시작되었고, 광해군 역시 현물 수납의 기존 공납제로 회귀하기를 원하였다. 결국 광해군대 내내 선혜청과 경기 대동법은 유명무실한 상태에 빠졌다.“ 「조선시대사학보」
광해군 즉위년 4월(음력) 방납배와 결탁하여 방납을 일삼는다고 비난을 받던 기자헌이 유영경 대신 좌의정이 되는 등, 정권을 주도하는 북인 세력이 방납을 행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조정의 대신들과 친천관계에 있던 방납인들이 방해를 하여 대동법이 경기도에서 시행된 지 1년도 되지 않아 혁파될 여부가 논의되었습니다. 여기에 이원익이 혁파를 반대하고 판중추부사 윤승훈과 우의정 심희수는 혁파를 찬성하였지만 그들의 찬성논의도 간신히 무마시킬 수 있었습니다. 광해군 때 시도된 대동법은 1624년 때 강원도로 확대되었으니 인조 때이고 효종 때은 1651년에 충청, 전라도로 확대되었습니다. 그리고 전국으로 확대된 것은 숙종 대의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광해군은 대동법에 대해서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광해군은 선조에게 인정받는 후계자는 아니었습니다. 분조를 외치는 선조와 달리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은 임진왜란 기간 동안 이를 수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선조가 공을 높아져가는 이순신을 경계했던 것처럼 선조가 광해군에게도 그와 같은 것을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왕이 되면서 그에게 남겨진 숙제는 아마 왕권강화였을 것입니다. 선조는 광해군이 아닌 다른 적장자 왕위 계승자를 원했고 그것은 아마 영창대군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왕위자리를 광해군에게 넘겼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사정을 알았을 광해군은 좋은 군주가 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가 행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조정 대신들에게 반감을 샀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후대 사람들에게 광해군에게 있어 가장 성공적인 정치적 업적이라고 하는 중립 외교조차 조정대신들의 선택과는 정 반대였습니다. 그리고 대동법 시행에 있어서도 그는 자신의 왕위 존립에 큰 역할을 하고 있는 대북파에 너무 의지하고 있었으니 이러한 정치편력은 앞으로의 비극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광해군에게 힘이 되주는 듯 했지만 정작 백성들의 위한 목소리를 대신 내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그 반대로 흘러갔고 광해군은 그럼에도 북인들의 이야기를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폭군의 길을 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바로 칠서의 옥에서 발단된 일인데 1613년 당시 문경새재서 상인을 죽이고 수백냥을 약탈한 강도사건을 발생하였고 이는 서인의 거두이며 영의정을 지낸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한 서자 일곱 명의 주동자였습니다. 이들은 광해군이 왕위에 올랐을 때 서얼의 차별의 없애 달라는 상소를 올렸으나 거부당했습니다. 이 때 불만을 품고 도적질을 벌였고 문경새재에서 문제를 일으킨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커졌습니다. 대북파의 중심세력들이 이를 빌미로 영창대군을 몰아내기로 한 것입니다. 포도대장 한희길은 박응서에게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이 연루되었다고 거짓자백을 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하였고 결국 박응서는 김제남과 영창대군과 인목대비까지 역모에 가담했다고 한 것입니다. 이에 따라 인목대비와 영창대군의 안위를 부탁받은 대신을 포함한 서인들이 하옥되었고 이후 영창대군을 처단하라는 삼사의 유생들의 상소가 올라오자 이른바 계축옥사가 일어났습니다. 북인들의 이러한 횡포를 광해군은 알았을 것입니다. 그가 왕권에 집착하지 않고 민생을 돌보는 데에 힘을 쏟았다면 그의 무덤은 묘가 아닌 능으로 불리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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