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괄의 난
2023. 2. 25. 08:58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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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는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에게 위기가 있었으니 그 중 하나가 바로 이괄의 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괄은 인조가 반정을 일으킬 때 반정군의 임시대장을 맡았습니다. 본래 반정군의 대장은 김류였으나 당시 이들의 반정계획은 알려진 상황이었고 김류가 이에 대해 고심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반정을 일으키기로 한 장소에 약속보다 늦게 나타납니다. 반정군의 대장으로 이괄이 될 뻔했으나 다시 김류가 된 것입니다. 그렇게 이루어진 인조반정, 이 거사에서 이괄은 나름 중대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군대를 일거에 정비하고 반정을 이끌었으니 반정 직후에는 ‘이괄이 병조판서감이다.’라는 말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그는 일등공신이 아닌 이등 공신에 책봉되었습니다. 이에 분노를 할 법도 했겠지만 그는 참았다고 합니다. 한편 『연려실기술』에는 김류는 일등공신인데 자신은 이등공신이라며 분개했다고 하는데 실록에는 이러한 사실을 전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김류는 이괄이 공이 많으니 변방이 아닌 도성에 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기도 하였고 인조가 공신책봉의 타당성을 물을 때에는 이괄은 반정에 늦게 참여했으나 공이 크기 때문에 이등공신의 첫째 가는 인물이라고 김류가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이괄은 공적을 인정받아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으로 이괄과 김류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으나 거사 당일에는 김류가 늦게 도착하여 이괄에게 지휘권을 넘겨달라고 하자 이괄이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당시 이괄은 배신자가 아니냐 하면서 김류의 목을 베려고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를 이귀가 말렸는데 나중에는 반정 성공 축하연에서도 이괄보다 상석에 앉은 김류와 이귀를 보고 화가 나서 이괄이 대놓고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괄은 인조반정에 참여하였고 반정은 성공했지만 여전히 정국은 뒤숭숭했습니다. 인조정권은 대북파를 비롯한 북인들에 대해 대대적으로 숙청을 단행하였습니다. 입궐하라는 명을 받고 가장 먼저 달려온 병조참판 박정길이 참수되고 이이첨과 정인홍을 비롯한 32명의 관인들이 복주(伏誅)되었고 죽음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유배되거나 조정에서 쫓겨났습니다. 북인정권을 몰락시키려 했고 그에 따라 살벌해진 분위기에 횡포가 더해졌습니다. 인조를 호위한다는 명분으로 재물약탈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한 달에 한번 꼴로 역모가 일어났다고 고변이 올라왔습니다. 전 현령 유응형(柳應泂)이 역모가 일어났다고 고변했으며 이 때가 1623년 7월이었으며 이후 8월 25일과 10월 1일에도 고변이 터져나왔습니다. 그러면서 10월1일의 공초에서는 ‘지금 하는 짓은 광해군 때보다 더 심하고, 인사가 불공평하고 부역이 무거워 원망이 자자하다.’라는 진술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안해진 인조는 기찰정치를 강화하였습니다. 기찰이란 ‘반혁명 세력’을 색출하려는 목적으로 감시와 사찰을 벌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을 행하는 것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광해군 때에 벼슬직을 하다가 쫓겨난 사람들이 사찰리스트에 오른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여기에 더해 반정에 동조한 남인들도 포함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반정공신들은 의심이 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사람을 붙였고 반정 이후의 상황에 대해 불만을 이야기한다거나 미끼로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이야기했을 때 거기에 동조하는 의견을 내비친다면 잡아다가 심문하는 식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기찰정치는 불신만 가득 피워 오르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무관들의 병력 이동마저 위축되게 만들었습니다. 밀정들의 감시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인종의 호위를 한답시고 유지한 사병들, 그 중 지휘관들은 반정공신의 지위를 믿고 백성들에게 잔혹한 일을 벌이곤 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이들은 사병임에도 그 경비는 국고로 충당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남인들은 당장 기찰을 중지하고 군관들을 해산시키라고 요구했으나 반정공신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한다고 나무란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기찰정치를 이끈 핵심인물이 바로 이괄이었고 누구보다도 인조정권의 보위에 나섰습니다.
하지만 이즈음 서북변방 쪽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후금의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조는 믿을만한 무관을 보내어 서북쪽의 변방을 맡기려 하니 그것이 바로 이괄이었습니다. 인조는 송별을 하기 위해 그를 접견했으며 그 때까지 이괄의 태도는 의연했다고 합니다. ‘신의 재주가 없는 것을 아시면서 변방의 중임을 맡기시니 은혜를 갚으려고 할 따름’이란 말한 이괄은 “적이 쳐들어 올 경우 목숨을 바쳐 싸우겠다.”라고 말한 것처럼 그가 과연 외지로 떠나보내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반란을 일으켰을까 의구심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이괄이 부임지로 떠나 세 달여가 지났을 시점 인조는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을 논의하였습니다. 이 때 정사공신 53명을 선정했으며 1등 공신이 10명, 2등이 15명, 3등이 28명이었습니다. 김류와 이귀 등은 1등 공신이 되었고 이괄은 2등공신의 첫째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에 불만을 품었던 것일까. 여기에 불만을 품을 수는 있으나 그렇다고 반란까지 일으키기에는 리스크가 커 보입니다. 그 때 즈음 또다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바로 1624년 1월 이괄이 불충한 생각으로 고변을 꾀한다고 올라왔으나 다행히 여기서 조사 끝에 무고임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조사담당관들을 고변자들을 사형시키려 했습니다. 그런데 논란이 여기서 끝나지 않았는지 인조에게 이괄을 붙잡아와서 진상을 국문하고 부원수직에서 해임시키자는 건의가 이어졌으며 군중(軍中)에 머무르고 있던 이괄의 외아들 전을 모반의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압송하기 위해 금부도사와 선전관을 영변으로 보냈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이괄은 아들이 모반죄로 죽게 된다면 자신 역시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이에 조정에서 보낸 사자의 목을 베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에게 맡겨진 군사 1만 2000여명, 그리고 항왜군 130명 정도 있었는데 당시 이 부대는 변경수비를 목적으로 타 지역에서 차출된 정예군사였습니다.
1624년, 이괄은 1월 2일에 평안도 영변에서 거병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산, 강동, 황주, 개성 등을 거쳐 한성까지 내려왔습니다. 이 때 조정은 다시 이괄의 난을 빌미로 이들과 내통한 자들을 색출하여 반대파를 몰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 때 인조는 선조처럼 한양을 버리고 공주로 도망하였습니다. 한겨울에 횃불도 없이 이루어진 초라한 행렬이었고 얼마나 다급했으면 임진왜란도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왜관에 있던 왜병에게 구원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반란군이 도성에 진입할 당시 백성들은 길을 닦고 황토를 깔고 맞이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백성들은 이괄은 지지했다기보다는 인조가 도망한 상황에서 이괄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나머지 그에게 지지를 보낸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에 이괄은 자신이 왕이 되지 않고 왕이 될만한 사람을 골랐는데 그가 바로 흥안군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왕의 재목으로 다소 아쉬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벌어진 안현 전투, 여기에 관군은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당시 관군 측에는 정충신이라는 사람이 있어 그가 안현을 선점해서 고지전을 벌이면 관군에게 유리할 것이고 이 전투에서 승리하면 민심까지 얻을 수 있다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전투를 백성들이 산으로 올라가 구경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형을 이용한 관군의 전략에 서북풍이 불어 맞바람을 맞은 반란군은 활이나 여러 무기들을 제대로 활용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반란군은 패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괄의 목을 베어오는 자는 부원군으로 봉해 주고 천금을 주겠다라고 하자 이수백, 기익헌 등이 이괄의 목을 베어가지고 공주에 있는 인조에게 투항하여 이괄의 난은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이 때 반란군에는 한윤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한명련의 아들로 후금으로 도망쳐 인조정권이 들어선 이후 조선이 후금을 배척하는 정책을 강화했다고 전합니다. 그리고 정묘호란 때에는 후금의 앞잡이가 되어 다시 조선으로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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