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과는 달랐던 병자호란

2023. 2. 27. 09:0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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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7년 정묘호란을 겪은 조선은 후금의 형제의 관계를 맺기로 하고 평화를 약속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대륙의 지배를 두고 명과 다투던 후금의 세력이 점차 우위에 올라서자 후금의 태도는 달라졌습니다. 후금은 조선에게 막대한 공물을 요구하고 병선 혹은 병력을 요구하더니 더 나아가 조선과의 관계를 형제관계에서 군신의 관계로 바꿀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이에 후금의 요구가 과하다고 생각한 조선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1635년 후금은 나라 이름을 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을 향하여 더욱 압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왕자를 볼모로 보내고 전쟁을 주장한 신하들 중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보낼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조선은 거부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한 번 후금 아니 청의 침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청입장에서 이전의 조선에 대해 불쾌한 일들을 겪기도 했습니다. 인조의 원비인 인열왕후가 승하하자 후금에서 사절단을 보냈는데 여기에는 홍타이지가 황제로 추대된 것을 알리고자 한 것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조선은 그들이 가져온 국서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빈전이 좁다 하여 장막을 쳐주었는데 그마저도 허술하였고 바람에 날라가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간담을 싸늘하게 한 것은 장막 뒤에 군사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결국 조문단은 조선의 빈약한 대접이 화가 나 있었는데 여기에 조선의 아이들이 그 뒤를 따르며 욕을 하며 돌을 던졌다고 합니다. 아마 조선의 아이들은 그렇게 한 데에는 어른들의 행동을 따라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장막 뒤에 군사들은 왜 있었을까. 당시 후금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사절단도 와 있었으므로 경호차원에서 배치된 인력이었습니다. 하지만 가뜩이나 푸대접에 군사까지 뒤에 있어 후금의 사절단은 충분히 오해할만한 상황이었습니다. 한편 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은 홍타이지의 즉위식에서도 있었습니다. 홍타이지에 참석한 조선의 사신들이 태도가 문제였는데 황제즉위식에서 하늘 신에게 제사를 지낸 후 황제가 황금 의자에 앉아서 황제의 옷을 입는 부분에서 단 아래에 있는 신하들은 모두 엎드려 절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조선의 사신들은 아랑곳없이 꼿꼿이 서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에 청은 이들을 어떻게 할까 하다가 처벌을 하여 조선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런데 이들은 돌아가는 와중에도 청에서 보낸 국서를 버리고는 그래도 내용은 전해야 할까 싶어 베껴서 가져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전쟁을 통해 강약과 승부를 겨룰 뿐 사신을 죽이는 비겁한 짓은 하지 않겠다. 스스로 죄를 깨우쳤다면 자제(왕자)를 볼모로 보내라.’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  

때는 1636년 12월이었습니다. 12만이 넘는 청나라의 군대가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한양을 점령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고작 5일이었습니다. 더욱 의이한 것은 청나라가 쳐들어오면서 변변한 전투도 거치지 않고 한양으로 들이닥쳤다는 것입니다. 임진왜란 때에 일본군이 성을 하나하나 점령하면서 치고 올라왔던 것을 기억해서일까.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을 너무 안일하게 보았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청군은 속도가 빠른 기마병으로 구성되었고 청의 목표는 한양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사실 청나라가 빠르게 내려올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별다른 전투 없었다는 것은 조선의 체계가 미흡했던 것이 지적되었습니다. 당시 평안도 지역을 방어를 책임진 사람은 김자점이었습니다. 당시 청군이 압록강을 진격하는 것을 의주에서 발견하였고 강을 건너기 사흘 전부터 적이 나타났다는 봉화가 올라왔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통신을 무시하였고 적이 강을 넘어 내려올 떼 장계를 올렸고 당시 청군은 평안도를 통과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김자점이 도원수로서 얼마나 무책임했는지 자신의 부하들이 적이 쳐들어온다고 했음에도 오히려 쓸데없는 소리 한다며 목을 치려고 했습니다. 그의 생각은 추운 겨울에 군대를 움직일 리 없다는 것인데 오히려 그 반대였습니다. 북방민족은 오히려 추운 겨울에 군사를 움직인다는 사실입니다. 당시 청군이 쳐들어온다는 이야기에 조정에서는 난리가 났고 인조는 수구문을 통해서 빠져나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군문이라는 곳이 이괄이 난이 일어났을 때 이괄이 탈출한 곳이기도 하고 시신이 빠져나가는 곳이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왕이 나가기에는 꺼려지는 곳인데 얼마나 급박했으면 인조가 이 곳으로 거쳐간 것입니다. 
그렇게 빠져나간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가려했을까. 사실 인조가 향한 곳은 강화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청군이 재빨리 내려와 퇴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가야 했습니다. 남한산성으로 가서도 강화도로 가자는 의견이 제기되었습니다. 당시 반정공신이던 김류는 자신의 가족들을 이미 강화도로 피신시킨 상태였는데 당시 강화도방어를 책임지는 검찰사가 김경징이었습니다. 그는 김류의 아들로 병자호란이 터지자마자 배를 빌려 자신의 가족들을 피신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강화도로 피신하려는 계획은 끝내 이루어지지 못하고 남한산성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남한산성에서 인조는 47일간 고립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립된 지 이틀째 되는 날 청에서 왕의 아우와 대신을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이 때 조선이 아우와 대신들을 보냈는데 가짜를 보냅니다. 종친인 능봉수는 능봉군으로, 형조판서인 신집은 정승급으로 가장하여 청에 간 것인데 이는 그만 들통나고 맙니다. 아니 신집 스스로가 자신은 실제 대신이 아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로 인해 청진영에서 더욱 화가 난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박난영이라는 조선의 역관이 죽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역관 박난영이 신진이 이야기한 것이 사실이냐고 묻자 박난영은 진짜 왕의 아우이고 진짜 대신이 맞다고 거짓말한 것입니다. 청은 이미 모든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고 박난영의 거짓말에 화가 난 그를 죽인 것입니다. 이어 청은 세자를 보내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야지 화친이 가능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후 조선은 청군을 상대로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으나 김자점이 청군의 후방을 치려다가 오히려 기습을 받아서 5000명의 병력을 잃고 도주하였고 김류는 점괘를 보고 29일날은 화친을 해도 좋고 싸워도 좋은 날이라고 하여 싸움을 걸었다가 오히려 기습을 당하고 맙니다. 그러다가 홍타이지가 직접 출병하게 되자 조선은 더욱 압박감에 조여 왔습니다. 당시 12만의 군사였는데 여기에 소문에는 30만명이라고 났습니다. 임시피난처이던 남한산성에 있을 당시 한겨울이었습니다. 고립이 길어지면서 식량도 바닥나기 시작했고 성안의 사람과 짐승도 허기에 지쳐갔고 말과 소들이 서로의 꼬리를 물어뜯어 먹었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습니다. 군사들은 빈 가마니를 쓰고 버티다가 얼어 죽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쌍령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당시 청의 기마병은 400, 조선의 군사는 4만이었습니다. 숫자는 조선군이 압도적이었으나 청기마병을 접해본 적이 거의 없던 지라 적의 돌격에 조선의 진영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고 압사사고와 더불어 화약을 모아 둔 상자에 실수로 화승을 떨어트려 폭사당하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이후 식량담당관의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식량 담당관은 인조가 처음 들어왔을 때 군량이 6000석 정도 있다고 했으나 실상은 2800석 정도 있었고 보고가 있을 당시 앞으로 20일 정도 밖에 버티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1월 17일에는 청이 인조에게 귀순하라는 의사를 전달합니다. 이 때 최명길이 인조를 밖으로 내보내지 않게 위해 화친답서를 쓰는데 척화파인 김상헌이 이를 찢습니다. 하지만 1월 22일에는 청군이 강화도를 함락하고 1일 27일에 청군이 기어오르기 위해 목인 수십 개를 두고 압박이 거세지자 조정에서는 청의 요구대로 인조가 성을 나와 항복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이 때 삼배구고두례가 행해졌으며 열 한가지 조약을 담은 정축화약이 맺어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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