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는 소현세자를 싫어했나.

2023. 3. 1. 09:0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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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에서는 몇몇 죽음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소현세자의 죽음일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 8년간 인질로 끌려가있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1637년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인조가 삼전도의 예를 행한 후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인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8년간의 인질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지 2달 만인 1648년 4월 사망하였습니다.
“세자는 본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병을 얻었고 병이 난 지 며칠 만에 죽었는데, 온몸이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 일곱 구멍에서는 모두 선혈이 흘러나오므로, 검은 천으로 얼굴 반쪽만 덮어 놓았으나, 곁에 있는 사람도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조선왕조실록』
이러한 이야기는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 있는바 이렇게 보면 독살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것 같습니다. 특히 실록에서 눈에 띄는 기록은 바로 ‘함부로’라고 기록한 점인데 사관들은 당시 의관이던 이형익이 신중하지 못한 치료행위로 소현세자가 죽음에 이른 것으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에서 가장 비통해야 할 인조의 태도가 이상합니다. 오히려 이형익에 대해 두둔하고 나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이 그치지 않습니다. 인조는 장남의 죽음임에도 3년이 아닌 1개월만 상복을 입었으며 소현세자의 장남인 세손 이석철이 살아있었음에도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습니다. 본래대로라면 상복은 3년복을 입어야 했는데 간소화했고 신하들이 1년만이라도 입어야 한다고 했으나 이를 거절한 것입니다. 또한 조선은 왕위는 장자승계가 기본이었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에게는 10살의 석철이라는 세손이 있었음에도 어리다는 이유로 원손의 삼촌이자 소현세자의 동생인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정하니 그가 바로 후에 효종이었습니다. 
그럼 인조는 처음부터 소현세자를 싫어했을까. 그가 심양으로 떠다는 날에는 인조가 지금의 서오릉 근처까지 와서 배웅했으며 온돌방에서 꼭 재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람대로 편한 잠을 자지는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소현세자(昭顯世子) 일행이 청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의 상황을 세자시강원에서 정리한 일기가 바로 『심양일기』입니다. 당시 청으로 볼모로 와있던 사람들은 소현 세자부부외에도 봉림대군 부부, 그리고 시강원 관리를 중심으로 한 수행 신하로 구성된 300여 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청나라는 이들이 머무른 심양관을 조선정부를 대리하는 현지기관으로 인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심양일기』는  날짜순으로 날씨, 서연을 비롯한 일상의 동정, 본국과의 연락, 수행한 신하들의 사정 등 소현세자 일행이 청에 거주하면서 겪은 갖가지 일을 기록한 것입니다. 소현세자는 청태종의 명에 따라 사냥에 나서기도 하고 전쟁에도 참가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말을 잘 타지 못한 세자가 낙마해서 상처가 생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소현세자는 조선과 청 사이에서 현안이 묶여 있으면 대리로 질책을 받는 위치에 있었으며 때로는 세자는 머리를 조아리며 사태를 무마하는 자리에 있었으니 패전국의 왕자로서의 수모를 겪어야 했습니다. 한편 청 조정에는 용골대가 조선의 책임자격으로 있었는데 그는 인조가 청태조에게 보낸 홍시를 세자가 전달하게 한 것을 잘못이라고 지적했으니 인조가 청을 대국으로 생각하지 않고 먼저 아들에게 보내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부자지간의 관계, 즉 청과 조선의 관계에 어긋난다고 지적한 것이지만 사실상 트집에 가까웠습니다. 또한 용골대가 명나라를 치러 갈 때에 조선의 파병 문제 때문에 강하게 압박해 오니 세자가 화를 내며 자신을 협박하는 용골대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하자 용골대는 사과하기도 했습니다.  한편 1638년 세자는 정월 초하루에 청태종의 새해맞이 축하행사에서 조선의 여악과 배우들이 춤과 노래를 선보였을 때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고 여악 무리중에는 눈물을 닦으며 노래부르는 사람도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청나라는 명나라와의 무역이 쉽지 않으니 조선과 무역하기를 원했고 심양관이 그 중간지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실록』에서는 이를 ‘마치 관소의 문이 마치 시장 같았다.’고 표현하였는데 조선조정에서는 세자가 중국에서 가서 장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를 비아냥대는 식으로 기술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소현세자는 이 곳에서 천문, 지리, 수학, 지동설, 항해법, 화포 제조법 등 서양 문물을 터득했습니다. 그의 뜻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담 샬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저의 왕국에 돌아가는 즉시 각종 기술을 궁중에서 사용할 뿐 아니라 출판해 학자들에게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장차 사막을 박학의 전당으로 완전히 바꾸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잡혀왔지만 여기서 서양의 사상과 과학기술을 배워 조선에 심기로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소현세자는 청과 가까이 하고 있었는데 하지만 막상 삼전도협약에서 명과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청이 명을 정벌할 때에 지원군을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인조의 숭명사상은 더욱 강해져 갔고 따라서 인조는 청과 친한 소현세자를 불편하게 여겼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인조의 이러한 마음을 알 수 있는 일이 있었습니다. 소현세자가 강빈과 영구히 귀국했는데 이를 맞이하는 인조의 반응이 싸늘했습니다. 그리고 청황제의 벼루를 바치자 인조는 매우 화를 내며 벼루를 던진 것입니다. 인조를 굴욕의 역사의 한 장면으로 만든 청황제의 하사품이라 분개했던 것인지 아니면 나 아직 청을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인 쇼인지, 혹은 고려 원간섭기 시절 원나라가 고려왕을 폐하고 자신의 수도인 북경에 볼모로 와있던 세자를 고려왕으로 추대한 것에 대한 선례가 있기 때문에 그로 인한 왕권유지에 대한 불안감이 있어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와 같은 것들이 복잡하게 얽힌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오후에 황제가 세자를 불러서 송별연을 행하였는데 봉림대군도 참여하였습니다. 용골대가 뜰 안 으로 세자를 데리고 들어가 먼저 안마(鞍馬)를 주고 다음으로 의복을 내어주었는데, 대홍망룡의’를 입게 하였습니다. 세자가 이것은 국왕의 장복(章服)이라 하면서 예에 의거하여 굳게 사양하자. 용골대가 한(汗)에게 고하고 그대로 따라 주었습니다.’ 『인조실록』
이러한 일이 알려졌을 때 인조는 더욱 자신의 위치를 불안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1644년 소현세자가 심양을 출발해서 그 다음해에 2월 달에 조선의 한양에 돌아옵니다. 그는 출발했을 때부터 아팠다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 4월 26일에 사망합니다. 그리고 전문가의 소견에 따르면 독살설은 무리라고 합니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끌려가기 전부터 산증이라 하여 한기가 뭉쳐서 생기는 증세가 있는데 소현세자는 몸이 추운데 열이 나므로 가짜 열이기 때문에 몸을 따뜻하게 해줘야 하는데 진자 열을 내리는 치료를 받습니다. 그리고 기록에서는 소현세자의 증세는 학질로 기록되었는데 심양에서 함께한 의료진들이 교체되고 그러면서 새로운 의료진들이 학질로 오진하고 처방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청은 소현세자를 지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그를 독살한다는 것은 조선입장에서는 부담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의료사고로 가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여기에 인질상태로 쌓인 스트레스에 아버지인 인조가 자신을 미워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더욱 상심이 컸을 것입니다. 여기에 의심스러운 것은 소현세자가 죽은 이후 왕위를 세자의 부인의 아들이 아닌 사람에게 가게 되자 강빈이 이에 대해 하소연을 했고 인조의 수라상에 독이 든 전복구이가 올라오자 이 사건의 배후로 강빈이 지목되었습니다. 결국 역모로 몰려서 죽음을 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용골대가 소현세자의 장남 석철이를 데려가 키우겠다고 한 바 있는데 그 석철이가 제주에서 풍토병으로 죽었으므로 인조가 용골대가 석철을 왕으로 옹립할 것을 두려워하여 죽였다는 이야기도 나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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