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숙종의 왕권 유지 방법

2023. 3. 3. 09:0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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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제19대 국왕 숙종(1661∼1720, 재위: 1674∼1720)은 현종의 외아들로 모후는 청풍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인 명성왕후(明聖王后)라고 합니다. 숙종은 1674년 ~ 1720년까지 왕으로 있었으니 이것은 조선 역대 왕들 중 두 번째로 긴 기간입니다. 첫 번째는 숙종 다음인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가 52년간이었습니다. 
숙종이 한 일중에 단종을 복권한 일이 있습니다. 단종은 폐위된 이후에 상당 기간 대군도 아니고 노산군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숙종 대에 이르러서야 단종이라는 묘호를 내립니다. 숙종 대에는 당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고 사림파의 두 분파인 남인과 서인이 대결하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서인당을 중심으로 단종복권운동이 재개되었습니다. 그러면 숙종은 왜 단종을 복권시켰을까. 그는 단종을 복권시켰을 때 잃는 이미지 즉 수양대군에 대한 흠집보다는 복권을 통해 얻는 이익이 더 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익은 왕권강화였습니다. 그리고 단종과 사육신을 이용하여 신하들에 대한 충성심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수양대군이 단종에 의해 상왕으로 추대되었다는 점과 수양대군이 상왕이 된 단종을 한동안 보호했다는 점을 그를 복권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당시 집권당인 서인의 입장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조선에서 그리 많지 않은 적장자 출신의 왕이었습니다. 성리학적인 질서에 따라 적장자 왕위계승을 우선으로 하는 조선에서 적장자 출신의 왕은 7명에 지나지 않았고 숙종은 그 중에 6번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적장자 출신의 왕들은 대부분 일찍 왕위를 마친 단종과 문종, 폭군 연산군, 그리고 현종은 심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조선에서 나고 자란 숙종이야말로 조선왕조가 말하는 올바른 적장자 왕위계승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그는 14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음에도 수렴청정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어머니가 정치적 능력이 없다고 보여지진 않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명성왕후로 세자빈, 왕비, 그리고 왕대비를 모두 거친 유일한 조선의 왕비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명성왕후가 정치에 끼여들지 않았다는 것은 그만큼 숙종의 정치적 능력이 어렸을 적부터 그 재능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조참판 이단하가 감히 이미 정해진 의례를 가지고 소장 가득히 장황하게 늘어놓은 것이 교묘하게 꾸미지 않은 것이 없고 엄명에 핍박되어 오(誤)자 한 글자를 그 이름 아래에 써 넣었다고 말한 데에 이르러서는 한갓 사표(師表)만을 알고 군명(君命)이 있음을 알지 못한 것이니, 인신으로서 임금을 섬기는 도리가 어찌 이와 같아서야 되겠느냐? 진실로 해괴하다. 우선 파직시키고 서용(敍用)하지 말게 하라.’ 『숙종실록』

송시열

이 실록의 기록은 숙종이 이단하가 자신의 스승인 송시열에 대한 행장을 쓰려고 할 때 그 과오를 적지 않으려 하자 꾸짖는 것입니다. 당시 송시열은 이전 왕인 현종 대에 예송논쟁의 중심에 서 있기도 했습니다. 1659년 효종이 승하하였습니다. 이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3년입을 것인지 1년 입을 것인지 결정하였는데 남인은 3년입는 것이 맞다고 합니다. 남인은 효종을 왕으로서 정통성을 인정한 것입니다. 문제는 효종은 차남이었습니다. 자의대비가 이미 소현세자가 죽었을 때 3년복을 입었으므로 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때 서인이 정권을 잡고 있던 터라 서인의 의견이 수용되었고 이를 기해예송이라 합니다. 이후 1674년에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돌아가셨습니다. 이 때 기해예송 때와 같은 논리를 적용하려 했으나 현종이 송시열의 잘못을 지적하면서 서인은 실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을 행장에 적는 과정에서 숙종이 이단하를 나무란 것입니다. 그럼 송시열은 왜 효종이 소현세자의 동생이라는 점을 강조하려 했을까. 사실 임금이 죽었으므로 그냥 3년상을 치르면 그만 이었겠지만 송시열이 이러한 주장을 굽히지 않았던 것은 효종의 위상을 떨어뜨리려는 목적에 있던 것입니다. 사실 효종의 갑작스럽게 죽었을 때도 송시열의 행동은 무언가 이상했습니다. 갑작스런 그의 죽음에 진상규명을 위한 조사보다는 문제를 덮는데 급급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효종의 후계자인 현종은 아버지 사망 저날에 갑자기 치료를 중단한 어의 이기선에게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더욱 황당한 것은 이기선이 진맥하는 법을 모른다고 치료에서 물러선 것입니다. 이전에도 효종을 진맥한 인물이 핑계를 대며 책임을 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에 현종이 분통이 터뜨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이기선이 궁지에 몰려 있을 때 이를 보호한 것은 송시열이었습니다. 당시의 일은 그냥 묻고 지나갔지만 송시열에 대한 왕실의 반감은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송시열이 현종의 뒤를 이어 숙종이 왕위를 받았을 때 당시 나이 어린 숙종을 좌지우지하려 했습니다. 현종이 죽은 뒤에 세자 신분이었던 숙종이 국정을 총괄하는 임시직인 원상직을 제의했으나 송시열은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숙종이 즉위하고나서는 송시열은 이미 한양을 떠난 뒤였습니다. 그리고 현종의 묘지문을 지어달라고 숙종이 송시열에게 부탁했지만 이마저 거절합니다. 

1674년의 예송논쟁으로 조정의 정권은 남인에게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권력이 다시 서인에게 넘어가는 사건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1680년 경신환국이었습니다. 당시 남인의 실세는 허적이었는데 당시 그의 집에서 축하잔치가 열렸습니다. 이에 숙종이 궁중의 천막을 빌려가게 하도록 명하였는데 문제는 허적이 그전에 이미 빌려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숙종은 당시 남인정권에 대해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였습니다.  남인끼리 청남(淸南) ·탁남(濁南)으로 갈라져 서로 싸우고 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때 열린 잔치도 사실 남인세력을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한 단합대회성격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훈련대장과 좌의정, 대간, 승지 등이 모두 서인으로 교체되었습니다. 
 이 때 정원로가 고변하여 이른바 삼복의 변으로 이어졌습니다. 그것은 허적의 서자 견이 인조의 손자이며 인평대군의 세 아들인 복창군과 복선군, 복평군 등과 함께 역모를 도모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남인들은 북벌론을 내세우며 새로운 군사기구를 건의했는데 그것이 바로 도체찰사부였습니다. 사실 이는 효종 때까지 존속되었다가 현종 때부터 폐지되었고 이후 숙종 때 군비를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윤휴, 허적 등이 주장하여 1676년에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허적은 훈련도감, 어영청 등 서울의 군영도 도체찰사부에 귀속시킬 했으나 김석주 측의 반대로 다음해 6월에 혁파되었습니다. 1678년에는 영의정 허적의 주장으로 다시 설치되었으며 숙종은 부체찰사로 김석주를 임명하여 견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도체찰사부의 군사 동원문제로 귀착되면서 도체찰사부 복설에 관계된 모두가 연루되게 되었는데 허견과 삼복뿐만 아니라 허적, 윤휴, 유혁연, 이원정, 오정위 등 남인계의 중진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로 도체찰사부가 혁파된 것입니다. 그럼 도체찰사란 어떤 곳일까. 이 곳은 전시 또는 준전시 체제에 전군의 총사령관 역할을 했던 도체찰사의 직속 예하 부대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도체찰사의 설치를 주도한 것은 남인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경계한 것은 숙종이었습니다. 따라서 부제찰사의 자리에 김석주를 임명했습니다.
사실 삼복의 변을 고발한 사람은 정원로였으나 이 역모를 눈치 챈 사람은 김석주였습니다. 김석주는 명성왕후의 사촌으로 왕실의 인척이었습니다. 그리고 숙종은 자신에게 도움이 될만한 사람과 손을 잡음으로써 자신의 지지세력을 유지하고 견제한 것입니다. 경신환국을 계기로 서인은 재집권에 성공하였으나, 곧 송시열을 중심으로 하는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하는 소론으로의 분립이 진행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의 붕당정치라는 것이 심화된 상황이었고 공존의 정치질서가 무너진 상태였기 때문에  일제시기 식민사관에 의해 ‘당파성론’을 언급하는 주요 증거로 활용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시의 환국에 대해 현대의 시각은 부정적이며 이러한 정치 사건들이 후에 영조와 정조가 실시한 탕평책 실시의 배경으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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