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과 숙종

2023. 3. 4. 09:10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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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역사를 소재로 다룬 드라마의 여주인공 중에 가장 기억에 남을만한 스토리를 가진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장희빈일 것입니다. 장희빈과 관련된 드라마만 여러 만들어졌을 정도입니다. 그런 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장희빈은 조선 19대 왕 숙종의 빈이며 20대 왕 경종의 생모로 이름은 옥정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역관출신의 장형이며 어머니는 파평 윤씨입니다. 장옥정의 아버지가 역관이므로 장희빈은 상당한 재력가의 딸이었습니다. 장희빈 이전에 숙종에게 왕비가 있었으니 첫 번째는 인경왕후였습니다. 그는 1671년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1674년에 숙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낳은 두 딸은 일찍 죽었고 인경왕후도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였습니다. 그 때가 불과 20살의 나이였습니다. 그리고 숙종의 계비로 인현왕후가 채택되었습니다. 성은 민씨이고 인경왕후가 사망하자 숙종비라 간택되었으니 당시 나이가 15세였습니다. 인현왕후 민씨의 집안은 서인이었고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것도 서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숙종은 인현왕후보다는 장옥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습니다. 
‘신이 삼가 깊이 우려하는 것은, 장씨의 일은 전하께서 그 미색 때문이며 전하가 장씨를 봉한 것은 그를 총애하기 때문이니, 오늘날 신민들의 근심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숙종실록』
 장옥정의 미모가 뛰어났던 것 같습니다. 역사서에서는 여인들의 얼굴에 대해 빼어나다고 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하는데 장옥정은 한 미모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장옥정이 역관집안출신이고 그러면 부유했을 것인데 왜 후궁으로 들어갔던 것일까. 1680년 영의정 허적의 서자인 허견이 반란을 도모한 게 문제가 되어 남인이 큰 타격을 입었는데 당시 장옥정의 집안도 큰 타격을 입었습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 세력이 밀렸던 남인계열이 다시 한 번 정권을 찾기 위해 장옥정같은 미모의 여인을 궁중에 넣어서 숙종의 환심을 유도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옥정은 남인과 연결되었기 때문에 견제를 받았습니다. 특히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는 장옥정을 탐탁치않게 여겼습니다. 

‘명성왕후가 말하기를, “내전이 그 사람을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오, 그 사람이 매우 간사하고 악독하고 주상이 평일에도 희로의 감정이 느닷없이 일어나시는데, 만약 꾐을 받게 되면 국가의 화가 됨은 말로 다 할수 없을 것이니, 내전은 후일에도 마땅히 나의 말을 생각해야 할 것이오”하였다. 『숙종실록』 
이렇게 명성왕후에게 찍힌 장옥정은 궁에 머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1683년 명성왕후 김씨가 세상을 뜨자 숙종이 3년상을 마치고 난 뒤 장옥정을 다시 궁으로 불러 후궁으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서인의 집권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차였고 당시 숙종의 신임을 받았던 서인의 영수 김석주가 세상을 뜨던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숙종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남인을 등용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장옥정이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윤으로 숙종은 윤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희빈으로 삼으려 하였습니다. 이 때 서인은 반발하였습니다. 그들이 반대한 이유는 표면적으로 아직 정비 민씨의 나이가 젊으므로 아직 그의 몸에서 후사가 나올 수 있고 적자로 하여금 왕위를 잇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숙종은 인현왕후가 회임할 가능성이 없고 후사를 빨리 정해야 한다며 밀어붙입니다. 반면 남인들은 숙종의 의견을 지지하였고 이에 숙종은 남인을 등용시키며 서인 세력을 누르려 했습니다. 그리고 옥정을 희빈으로 간택하였습니다. 희빈은 정 1품에 해당하는 자리로 영의정의 자리에 맞먹는 등급이라 합니다. 하지만 이에 서인의 반발을 여전했고 숙종의 그러한 선택이 성리학의 명분과 정통론에 어긋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희빈은 오촌 아버지 장영이므로 경신환국 때 유배당했던 남인 계열이므로 서인은 반대는 거셀 수밖에 없었습니다. 반면 당시인현왕후의 아버지인 민유중과 송시열의 친한 사이였고 민유중의 부인은 서인의 영수였던 송준길의 딸이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남인과 연결된 장옥정의 아들 출산에 대해 서인계열은 분명 위기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들의 반발에 숙종은 한 치의 고민도 하지 않고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지방으로 쫓아버린 후에 사약을 내립니다. 그리고 수많은 서인들이 옥사하거나 사약을 받거나 혹은 유배형이 처해졌습니다. 이로 인해 100여 명에 달하는 서인들이 처벌받고 정권이 서인에서 남인으로 넘어가니 역사에서 이 일을 1689년 기사년에 일어났다고 하여 기사환국이라 합니다. 

이후에 장희빈이 숙종의 세 번째 왕비가 되는데 왕비가 거처하는 내전 중 가장 으뜸가는 건물인 대조전의 주인이 인현왕후에서 장희빈으로 바뀌게 된 것입니다. 궁녀 출신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대조전의 주인공이 된 것입니다. 특히 아직 중전이 살아 있는 상황에서 내치고 그 자리에 희빈을 들인 것입니다. 사실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친 숙종의 이유가 좀 웃기긴 한데 인현왕후가 꿈에서 선왕을 보았는데 선왕이 말하길 ‘장희빈은 아들도 없고 복도 없으니 궁에 두면 해가 될거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숙종은 이를 일종의 투기로 본 것입니다. 그런데 더욱 웃긴 것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친 이유는 이거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숙종의 이러한 결단에 남인들도 동의하기가 애매했고 서인들 중 신진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소론들은 상소를 올리는데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인현왕후를 예뻐했고 명성왕후가 돌아가셨을 때 삼년상을 지낸 사람이므로 쫓아내서는 안된다고 합니다. 이에 숙종은 이렇게 받아칩니다. 
‘비망기의 내용은 전혀 살펴 유념하지 않고서, 기필코 부인을 위하여 절의를 세우기 위해 도리어 내가 참언을 들어주어 무죄한 사람을 폐출하려 한다고 하니, 과연 이럴 수가 있는가. 차라리 나를 폐위하는 게 낫지 않겠는가?’ 『숙종실록』
하지만 서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인현왕후를 내치고 나서 이후에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인현왕후가 있는 안국동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고 기록한 것입니다. 그럼 마음을 알았는지 인현왕후가 속한 노론의 모사꾼들이 노래를 하나 만들어 유통시킵니다. 
‘미나리는 사철이요 장다리는 한 철이네’
여기서 미나리는 인현왕후 민씨를 뜻하고, 장다리는 희빈 장씨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것은 장씨가 현재 왕비이지만 언제가는 다시 민씨가 왕비가 될 것이라는 일종의 희망가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후에 숙종의 눈에 들어온 여인이 있으니 그는 바로 숙빈 최씨입니다. 숙빈 최씨는 일곱 살에 궁에서 17년을 지내다가 숙종을 만나게 되었고 나중에는 영조가 되는 아들을 낳게 됩니다. 한편 기사환국으로 정권을 잡은 남인들은 다시 한 번 서인을 완전히 몰아낼 기회를 보고 있었는데 서인의 명문가 자제들이 인현왕후의 복위를 도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과 반대되는 고변도 올라왔습니다. 장희빈의 오빠인 장희재가 중심이 되어 숙빈 최씨를 독살하려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숙종의 선택은 숙빈 최씨였습니다. 그러면서 다시 인현왕후가 복직되고 서인이 다시 집권당으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리고 장희빈은 별당으로 쫓겨납니다. 하지만 장희빈은 여기에서 물러서지 않고 중전복위를 꿈꾸며 인현왕후를 저주했으며 몰래 신당을 차려 인현왕후가 죽게 해달라고 치성을 드립니다. 그런데 저주가 통했을까. 인현왕후가 시름시름 앓다가 결국 사망하게 됩니다. 사망할 때는 허리와 다리의 피부가 온전한 곳이 없었으며 종기 같은 것이 많았다고 합니다. 
‘숙빈 최씨가 평상시에 왕비가 베푼 은혜를 추모하여, 통곡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임금에게 몰래 고하였다.’ 『숙종실록』
장희빈은 이 일로 죽게 되었으나 자세한 이야기는 전해지지 않습니다. 단지 저주만으로 사람이 죽었다고 볼 수는 없고 숙종은 다시 환국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장희빈을 이런 식으로 제거했는지도 모릅니다. 장희빈이 살아있으면 언제 또 환국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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