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 아들 경종과 노론
2023. 3. 5. 11:55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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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다음 20대 조선의 임금은 바로 경종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경종이 장희빈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경종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숙종은 27살이라는 나이였습니다. 다소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이라 100일도 안된 시점에 원자 책봉을 받았고 3살 때에는 왕세자에 책봉되었습니다. 그렇게 어렵게 얻은 아들이라 숙종에게 사랑을 독차지하였습니다. 당시 그의 어머니 장희빈의 권세가 대단하였고 그의 이복동생인 연잉군과 연령군이 아직 태어나기 전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 때 인현왕후가 폐출되고 장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면서 그는 서자에서 적장자의 신분으로 격상되었으니 그야말로 탄탄대로였습니다. 기록에서 보이는 경종은 밝았으며 특히 글씨를 잘 써서 신하들이 서로 가지려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숙종은 무수한 환국을 일으킨 바 그러는 과정에서 세자의 어머니가 다시 후궁으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복위하면서 그는 인현왕후의 법적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인현왕후를 자기 어머니 모시듯 하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후에 희빈 장씨가 고변을 받아 자결하게 되었습니다. 경종은 신하들에게 찾아가 제발 죽음만은 막아달라고 했지만 세자의 요청을 무시되었습니다.
당시의 분당은 서인이 장악하고 있었고 노론과 소론으로 나뉜 상황에서 노론이 힘이 더 셌습니다. 그리고 힘이 약한 소론 쪽이 세자를 지지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머니를 잃은 경종은 아무래도 이후에 암울하게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그렇게 세자로 보내게 된 세월만 30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다 1717년 7월 19일 숙종이 노론의 대신인 이이명과 독대를 합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세자신분인 경종에게 대리청정을 맡기게 됩니다. 그런데 이게 상당히 뜬금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세자를 지지하는 쪽은 소론인데 노론의 핵심인사를 불러 숙종이 대리청정을 지시한 것입니다. 당시 숙종은 눈병이 굉장히 심하여 글을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자에게 대필을 시켰다고 합니다. 숙종 입장에서는 자신의 건강 때문에 대리청정을 지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연잉군과 연령군을 잘 보살펴달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마 경종이 실수하면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하려 한 것은 아닐까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럼 실제 그는 어땠을까.
‘일을 당하면 모두 위에 품한 뒤에 행하시어 감히 마음대로 독단하지 않음을 보였다.’ 『경종실록』
하지만 그와 함께 경종이 대리청정하면서 자주 한 말이 있으니 그것은 ‘유의하겠다.’, ‘생각해 보겠다.’라는 것입니다. 노론신하들은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세자를 교체하려 했지만 대리청정하던 경종은 나름 철통방어한 셈입니다. 그런 경종이 대리청정하면서 크게 화를 낸 사건이 있는데 승지가 늦게 입시를 해서 세자를 기다리게 했던 일입니다. 당시 이 일에 대해 세자는 크게 노해 ‘전부 다 물러가라, 너희가 감히 이럴 수 있냐’며 따졌다고 합니다. 그만큼 그간에 쌓인 스트레스가 터진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그의 행동은 오히려 역공을 받았습니다. 숙종으로부터 지나친 행동이라고 지적받았으며 오히려 세자가 사과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건은 세자가 왕이 될 몸이지만 어머니가 장희빈이었고 당시 정권을 장악한 노론의 지지를 받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로 보입니다.
"세자는 때때로 벽을 향하고 앉아서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했다. 또 한밤중에 계단과 뜰 사이를 방황하기도 했고 정신도 안정되지 못했으며 지각도 불분명했다. 숙종의 상에도 한 번도 곡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까닭 없이 웃기까지 했다.“
이러한 평가에는 노론의 악의적인 것도 들어가 있겠지만 그가 느꼈을 스트레스가 비정상적으로 발현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노론은 꼬투리를 잡아 그를 내리지 못하고 숙종의 뒤를 이어 경종으로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올랐으니 자신의 어머니를 죽음으로 내몬 자들에 대한 보복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렇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궁궐 내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노론 측이었습니다. 삼정승, 육조, 비변사, 삼사를 비롯한 행정기관, 병권, 유림들 그리고 성균과의 학생들과 내시, 궁인들 모두가 노론과 관련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노론이 정권을 잡기까지 조선붕당의 역사는 어떠했을까. 애초에 조선이 건국되고 15세기를 이끌던 정치세력은 훈구파였습니다. 이 훈구파가 16세기에는 사림에 의해 물러나게 됩니다. 그리고 인사권을 놓고 이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게 되고 정여립 모반사건과 정철의 건저의 같은 사건으로 말미암아 동인이 정권을 잡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서인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 나뉘었습니다. 하지만 인조반정을 통해 광해군폐위와 함께 북인이 실각하고 남인과 서인이 남았습니다. 그러다가 현종 때에 예송논쟁과 숙종 때 환국 정치를 거치면서 두 정치세력은 대결을 벌였고 그 결과 서인이 최종적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서인이 강경파인 노론과 온건파인 소론으로 나뉘었으며 이 때 노론의 대표적인 인물은 송시열이었고, 소론을 이끌던 인물은 윤증으로 노론이 영조를 지지하고 소론은 경종을 지지한 것입니다. 그럼 경종은 왕이 되고 나서 꼬투리를 잡아 노론을 처벌하기에는 그들의 세력이 너무 거대했습니다. 경종이 즉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조중우라는 유생이 폐위된 희빈 장씨의 명호를 바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으나 노론이 득실대던 사헌부에서 이런 상소는 문제가 많다고 이의를 제기하였습니다. 이에 경종이 사헌부의 지적을 수용했습니다. 한편 성균관의 장의인 윤지술이 ‘숙종이 사망했을 때 숙종의 지문을 지은 이이명이 장희빈을 잘못을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으니까 고쳐야 한다.’라고 했다가 유배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사헌부에서 반대의 상소가 올라오고 성균관 유생들이 수업을 거부하자 윤지술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노론이 경종이 즉위한 지 1년 남짓 된 시점에 왕세제를 책봉하자고 합니다. 그러면서 연잉군을 지목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것은 노론의 정치적인 계략이라할 수 있습니다. 경종을 원자로 책봉할 때는 반대하였는데 당시 인현왕후의 나이가 22살이라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경종의 나이는 30대, 왕비는 17살이었습니다. 왕세제로 책봉하고 나서 이를 청나라에 알리는 절차가 있는데 청나라에서 30대의 왕이 10대의 왕비가 있는데 왕세제를 채택한다고 해서 의아해했다고 합니다.
다만 이와 관련해서 경종이 성불구자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야사에서 전해져 나옵니다. 야사에서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기 전 아들을 보고 싶다고 해놓고는 전주 이씨의 씨를 말리겠다며 세자의 성기를 매우 꽉 붙잡고 당겨 이 때 경종이 기절하였다고 전합니다. 그리하여 성불구자가 되었다고 하는데 실록에 있는 내용이 아니므로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세자의 자리에도 오르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종을 화나게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노론 가문의 자제들이 경종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은 2000냥으로 맹독을 구해서 독약의 성능까지 시험했다고 하는데 취조하는 과정에서 어느 궁인이 왕의 음식에 몰래 독약을 집어넣었다는 진술을 하게 되고 이에 경종도 동조하게 됩니다. 이 일로 소론으로부터 노론이 공격을 받았고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가 사사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경종이 체격이 크고 건장하나 자주 아팠으며 세자 시절에는 1년에 한 번 정도는 큰 병에 걸리고 왕이 되고 나서도 석 달에 한번꼴로 병이 났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노론을 숙청, 단행할 기간에는 무척 건강했다고 합니다. 이 때에 경종은 중요한 결정을 합니다. 그것은 정적이라 할 수 있는 연잉군을 살려둔 것입니다.
그러던 경종이 갑자기 죽게 됩니다. 왕세제 연잉군이 진상한 게장과 생감을 먹고는 그동안 가지고 있던 병세가 악화되더니 재위 4년 만에 숨을 거두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는 독살설도 제기되었지만 경종이 후계자로 이미 연잉군을 생각하고 있었고 경종과 연잉군 사이가 특별히 나쁘지 않았기에 과연 연잉군이 일을 꾸몄을까 하는 시선이 존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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