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 박문수의 진실
2023. 3. 7. 09:2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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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만화 중에 위인들이 간혹 장편만화로 만들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암행어사 박문수가 그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박문수하면 생각나는 말은 바로 ‘암행어사 출두야!’입니다. 이 말을 하면 탐과오리와 함께 산천초목이 벌벌 떨었다고 합니다. 이 때 ‘출두’라는 말은 만화상에서 통쾌한 말로 쓰이지만 벼슬아치가 벼슬을 임명받고 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관아(官衙)에 직접 나아가는 의미로 현대에서는 경찰출두, 법원출두같이 사법기관이나 행정기관의 뒤에 붙어 뉴스기사에 쓰이기도 합니다.
박문수가 과거를 보러 갈 적에 어머니가 두 가지를 당부했는데 이번에 꼭 붙으라고 용한 절에 가서 기도를 할 것, 그리고 찹쌀유과를 주면서 갈 때 꼭 먹으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박문수는 과거를 치러가면서 안성에 있는 칠장사라는 절을 들려 기도를 올렸으므로 이후에 이 곳이 유명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박문수는 칠장사에서 기도를 한 뒤 '꿈에 과거시험에 출제될 문제가 나와 장원 급제를 했다'는 '몽중등과시(夢中登科詩)'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성시에서는 어사 박문수와 관련한 찹쌀떡을 생산하기도 했으며 요즘에도 대학입시를 보기 전에 찹쌀떡을 먹는 것은 하나의 의례처럼 되었습니다.
박문수는 1691년에 태어났으며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어려운 형편 속에 자랐습니다. 그래도 그의 어머니는 굶더라도 머릿속을 채워 아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는 마을에서 총명한 아이로 자랐습니다. 박문수가 합격한 것은 33세 때였습니다. 당시 그는 그렇게까지 우수한 성적은 거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임금 경종은 신임옥사로 대거 노론을 제거한 다음 신진세력을 뽑기 위해 중광시를 마련했는데 이 시험에 박문수가 응시하여 합격자 41명 중 26등을 기록합니다. 이른 나이에 과거에 합격한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손에 꼽힐 정도로 우수한 등수를 기록한 것은 아니었으나 박문수는 비교적 빠른 승진속도를 보였습니다. 영조가 왕세제로 있을 때에 정7품으로 세제시강원에서 근무했으며 어사수행 이후에는 무신란 진압에도 참여하였고 종2품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 무신란이 영조를 힘들게 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일을 수습하는데 박문수가 역할을 하였으므로 그를 흡족하게 했을 수도 있지만 박문수는 소론이면서도 영조가 추구하는 탕평책에 부합하는 인물로 그런 면에서 영조의 신임을 얻은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호조판서와 병조판서의 자리까지 오릅니다. 비교적 평탄한 관직생활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가 관직에 진출했을 때에는 당쟁으로 무척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싸움에 박문수도 휘말려 벼슬에서 물러나있기도 했고 이후 1727년에 다시 벼슬길에 올랐습니다.
이러한 박문수에 대해 전해지는 것은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고 진실을 밝혀내며 못된 관리들을 벌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항간에는 박문수가 실제 암행어사가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1727년 박문수가 영남지방에 어사로 간 것은 사실이지만 임금의 명령으로 별도로 파견하는 어사인 별견어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별견어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어사 박문수처럼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활동하는 어사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박문수가 활동하던 시대는 영조 대였는데 당시는 암행어사가 별견어사를 겸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박문수는 호서어사, 영남감진어사 등 여러 번에 걸쳐 어사로 파견됐다고 항간에 알려졌지만, 사실은 1727년 37세 때 영남별견어사 파견이 유일하다"고 한 것입니다. "박문수가 임명된 별견어사는 영조대 특별한 어사로 진휼을 감독하는 감진어사 기능과 함께 수령들 비리를 적발하는 암행어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그리고 박문수는 별견어사로 파견되어 울산부사, 영주군수, 경산현감 등 11명을 파직시켰습니다. 그리고 당시 양산군수는 나랏일에 보탬이 된다고 임금의 측근관리가 칭찬한 인물인데 그럼에도 박문수는 엄격한 잣대로 그를 적발한 것입니다.
당시 박문수를 어사로 파견한 임금은 영조는 박문수를 신뢰했다고 합니다. 박문수는 임금에게 아뢰는 목소리가 크고 다소불경스럽다고 지적받았으나 영조는 이를 충성으로 받아들였다고 하며 그를 순박하고 바른 성품의 소유자로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한편 조령산 부근에는 박문수의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박문수가 마패를 걸어놓고 쉬었다는 전설을 지닌 마패봉도 이 곳에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마패는 박문수와 암행어사를 상징하는 조선시대의 물건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패는암행어사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패에 있는 말은 역마로 역참에서 말을 몇 마리 이용할 수 있는지 나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직급을 나타내었는데 조선시대 관리들이 출장을 나갈 일이 있을 때 이 마패를 지니고 다녔습니다. 이러한 마패는 가짜가 유통되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으며 마패를 잃어버리거나 파손하면 장 80대에 도 2년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패를 위조한 사람은 사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암행어사를 사칭하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으며 이러한 사람이 고종 시기 함경도에 나타나 수령을 실제 파직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마패가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후기부터이고 원의 간섭을 받으면서 말의 사용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므로 허락받은 관리들이 말을 이용할 수 있도록 마패를 시행한 것입니다. 그리고 처음에는 나무로 만들어졌지만 쉽게 부러지고 손상되었기 때문에 조선 세종 때에는 철로 만들었고 이후에는 구리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마패로 부릴 수 있는 말은 1마리에서 10마리였으나 실제로는 1~3마리 정도였으며 암행어사의 대부분 3마리의 말이 그려진 삼마패를 썼습니다. 10마리가 그려진 것은 왕실에서나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럼 박문수는 암행어사 외에도 어떠한 공을 세웠을까. 그는 노총각과 노처녀의 혼인문제 해결에도 적극적이었으며 이를 영조가 수용하였습니다. 그리고 박문수가 경상도 관찰사로 지내던 시절, 영일만 앞바다에 관가 가재도구가 떠내려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박문수는 함경도에 홍수가 났다는 것을 직감하고 경상도가 가진 쌀 3000석을 배에 실어 보내어 함경도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는 떠내려오는 물의 흐름과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심정을 생각한 것입니다. 물론 함부로 곡식을 보낸다는 것은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이 때 박문수는 자신이 문책을 당하는 것은 작은 문제이지만 굶주린 백성을 구하는 것이 큰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박문수의 마음을 알았는지 함경도에는 박문수의 공을 기리는 비석이 있습니다.
그리고 박문수는 백성들이 굶어 고생을 하는 일이 발생하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관료들의 곡식을 나누어주자는 의견을 냅니다. 하지만 이게 반대에 부딪히자 녹봉감봉을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영조가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박문수는 소금장수라고 불렸는데 박문수는 진휼에 쓸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 소금을 굽자고 제안하였고 이 일을 주관하기도 했는데 다른 대신들이 이러한 박문수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소금장수라고 놀린 것입니다. 하지만 그의 정책으로 생산된 소금의 절반을 지역민들에게 나눠주고 1만석은 경기도에 보내 진휼에 힘쓰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조선시대 세금 중에 군포를 내게 하는 것이 있는데 군포는 군대 가는 대신에 내는 포목을 내는 것입니다. 본래 양반도 냈는데 조선 후기에는 양반들의 특권의식을 내세워 내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군포로 인해 백성들이 어려워하자 박문수가 양반들에게도 군포를 내게 하자고 하였고 이에 양반들의 반발은 당연했습니다. 이 때 내린 영조의 결론은 군포를 반으로 줄이자는 이른바 균역법의 시행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부족분을 충당하기 위해 박문수는 선박세, 어세 등을 국가재정으로 확충합니다. 그리고 부유한 양인 중에 군역을 피해간 사람들에게 군포를 선무군관포를 징수하기도 하였습니다. 암행어사의 박문수는 단 한번일지 몰라도 그가 백성들을 위해 일했다는 사실은 여러 설화로 기록으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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