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를 노린 암살과 권세가 홍국영

2023. 3. 9. 09:3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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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이는 정조입니다. 그는 영조의 손자로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는 영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결국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죄인의 아들이 된 정조, 그가 왕위에 오른 것은 1776년,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었을 때 정조 이산의 나이는 불과 11세였습니다. 이후 그의 불안한 시절은 계속되었습니다. 사도세자를 죽게 했던 정치세력에 둘러싸여 15년간을 동궁에서 보냈습니다. 그리고 밤에 잘 때도 깊이 자지 못하고 항상 옷을 입고 잤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즉위하면서 한 말은 “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습니다. 그에 따라 사도세자의 추숭과 노론토벌을 주장하던 선비들이 있었는데 정조는 오히려 그러한 주장을 한 이들에게 벌을 주었습니다. 정조가 그렇게 한 이유는 아무래도 선대의 왕인 영조의 말, 이 일을 절대 거론하지 말라고 한 것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도세자는 영조의 첫째 아들은 아니었습니다. 영조는 통치기간이 51년 7개월로 조선의 임금 중 가장 길었고 2명의 왕비와 4명의 빈이 있었으나 왕자는 2명뿐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정빈 이씨와의 사이에서 난 효장세자, 둘째 아들은 영빈 이씨에서 얻은 사도세자였습니다. 하지만 효장세자는 10세 때에 병사했고 사도세자는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끝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면서 영조는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을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킵니다. 그리고 영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에게 주지 못한 사랑을 정조에게 주었습니다. 그렇게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왕이 된 정조에게 적이 많았습니다. 아마 사도세자의 복권이야기에 정조가 쉽게 동의할 수 없었던 것은 이러한 정치적 배경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가 수많은 암살의 위협에 노출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보다 앞서 홍계희라는 인물이 있었습니다. 홍계희 부인은 영조 때 노론출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김상로의 조카였고 홍계희는 1762년 임오화변 때 경기도 관찰사였습니다. 또한 홍인한, 그리고 처삼촌이 김상로와 함께 사도세자를 죽인 주범들로 알려졌습니다. 이후 홍계희는 부귀영화를 누리다가 정조가 즉위하기 전엔 5년 전에 사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들과 손자들도 벼슬길에 올랐으므로 자연스럽게 정조에 반대하는 무리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조가 즉위하면서 자신의 즉위를 방해한 세력을 조사하게 되었고 그 중에 홍인한, 홍상간 등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사과정에서 정조를 비방하던 홍계희의 손자 홍상간이 국문을 받다가 죽었으며 홍상간의 아버지 홍지해도 귀양보내졌습니다. 그리고 홍상간의 삼촌이자 홍지해의 동생인 홍찬해는 흑산도로 유배보내졌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이자 홍계희의 아들 홍술해는 부정으로 얻은 돈 4만냥에 대한 혐의와 2500석, 소나무 260주를 개인적으로 빼돌린 혐의로 흑산도에 안치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남양 홍씨가 큰 타격을 입었고 이에 홍계희의 후손들이 정조제거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에 앞장 선 것은 바로 홍지해의 아들 홍상범이었습니다. 1777년 7월, 그는 사람을 시켜 정조가 머물던 경희궁 존현각까지 접근하였고 지붕을 뚫고 안으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독서 중이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고 이로 인해 자객이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경비의 허술함이 도마 위에 올랐고 정조는 거처를 보다 노출이 덜한 창덕궁으로 옮겼습니다. 
1777년 8월 한 무리가 창덕궁 서문(경추문) 북쪽 담장을 넘으려다가 마침 문을 지키던 군사 김춘득(金春得) 등에게 붙잡혔습니다. 그들은 이전 존현각에 침입했던 전흥문이란 천민출신의 장사꾼으로 그는 홍상범의 사주로 침입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배후가 드러났고 홍삼범, 홍술해 등 사건에 가담한 것이 드러났습니다. 홍삼범의 어머니인 이효임은 무녀를 고용하여 정조와 홍국영을 대상으로 저주의 굿판을 벌이기도 하였습니다. 당시 홍국영은 정조를 호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홍계희의 8촌에 해당하는 홍계능(洪啓能)이 홍상범의 사촌 홍상길과 모의하여 정조를 암살하고, 사도세자와 경빈박씨 사이에서 태어난 은전군 이찬을 새 왕으로 옹립하려 했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일로 연좌되어 그들의 가족이나 친척들도 처벌받았습니다. 그 중에는 홍삼범의 처 정희순이 남편의 죄에 연좌되어 장기현의 노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장기에 도착하고 이튿날 자살했습니다. 그는 좌의정 정존겸의 친딸이었고 따라서 아버지가 현직좌의정이었으니 양반으로 태어나 역모죄에 연좌되어 노비로 전락한 데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결국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습니다. 

정조의 집권 초기 그가 총애한 대신이 있으니 그는 홍국영이었습니다. 정조는 홍국영이 없었으면 어찌 오늘날의 자신이 있었겠느냐는 말도 하였습니다. 홍국영은 도승지까지 역임했는데 그 자리는 대통령의 비서실장과 같은 직책으로 국왕의 뜻을 신하들에게 전달하는 역할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정조의 총애가 대단했던지 국영과 갈라서는 자는 역적이라는 말도 나돌았습니다. 그는 정조가 세손시절부터 보좌해온 인물로 정조의 총애는 당연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그에 대해 당시의 기록은 이렇게 남겼습니다. 
“얼굴이 잘생겼고 눈치가 빨랐으며 수완이 좋아 임기응변에 능했다. 글이 재치가 있었으며 예리했다.” 
그러면서 그는 정조에 칼을 겨눌만한 세력인 노론 벽파를 주요 공격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홍인한의 숙청도 홍국영이 맡았는데 그들은 같은 풍산 홍씨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최고 권세를 누리다가 1779년 스스로 사직하겠다고 합니다. 정조는 깊이 생각하고는 모든 직책을 버리고 떠나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다른 대신들이 당황한 것은 당연했습니다. 어쩌면 무슨 꿍꿍이가 있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홍국영은 재기는커녕 오히려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는 한양도성출입을 금지하는 처벌을 받았고 재산마저 몰수당했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홍국영은 노론의 지도자로 부상하여 소론을 압박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송시열의 정적인 윤증 부자의 관직을 박탈하는가 하면 소론에게 노론으로 돌아서도록 종용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정조를 등에 업고 관직에 대한 실질적인 임명권을 행사했으며 영조 때 폐지된 것을 이조전랑이 스스로 후임자를 추천하는 제도인 통청권을 부활시킵니다. 이러한 일련이 정치행동은 그 의도가 분명했습니다. 영조가 통청권을 폐지한 것은 특정 붕당이 독점을 막기 위한 것인데 이를 다시 부활시켜 자신의 붕당의 독점을 유도한 것입니다. 여기에 한 발 더 나아가 정조가 후사가 없음을 이용, 자기누이동생을 정조에게 들여보내 외척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누이는 원빈이란 불리었습니다. 그러면서 홍국영의 권력이 드세진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심지어 국왕과 만나고자 하는 사람을 홍국영를 먼저 찾아야 했고 그로 인해 홍국영의 집앞은 그야말로 문전성시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홍국영의 찌를 듯한 권세는 3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직의 뜻을 밝힌 것입니다.  그의 나이 불과 32세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된 데에는 권력에 대한 과도한 욕심을 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누이가 사망하자 그 원인을 정조의 왕비인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의심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권력을 남용하여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습니다. 이에 궁궐 내의 많은 사람들이 홍국영을 적으로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홍국영의 누이가 원빈의 ‘원(元)’자는 근본을 의미하며 왕권을 계승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어 후궁은 사용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용된 것은 궁중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의 아들 담(湛)을 죽은 원빈 홍씨의 양자로 삼은 후 왕세자에 책봉하려고 했으니 이는 정조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정조는 외척제거에 뜻을 두었건만 자신이 가장 믿었던 신하가 스스로 왕의 외척이 되어 월권을 누리려 했으니 이는 신하들의 탄핵상소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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