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의 신해통공

2023. 3. 10. 09:33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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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15년인 1791년 신해통공이 실시됩니다. 신해통공이란  각 시전(市廛)의 국역(國役)은 존속시키면서 도가(都價)상업에 대해 공식적으로 금난전권(禁亂廛權)을 금지시킨 조치입니다. 
당시 시전은 지금의 시장이라 할 수 있는데 전통사회의 성읍이나 도시에 있던 상설시장이었습니다.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관부가 중심이 되어 수도건설사업에 시전건설 계획을 포함시켰습니다. 그러면서 막대한 국비와 노동력을 동원하여 상설점포를 짓고 여기에 상인들을 불러 모아 관부 및 일반 시민들의 경제적 수요를 충당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계획은 정종시기인 1399년에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그리고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정부는 새로 지은 시전 건물을 자신들이 지정한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 대가로 공랑세(公廊稅 : 국가에서 지은 상가인 공랑을 상인들에게 빌려주고 그 대가로 받는 세금)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시전이 가지는 기능을 주민들에게 일상생활용품을 공급하고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수요품들을 조달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시전상인들은 상품을 판매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동업자 조합을 이루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상품을 판매할 수 없도록 하는 일종의 특권을 부여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금난전권입니다. 이러한 금난전권을 통해 조정의 궁핍한 재정을 해결하려고 했고 사상인인 난전상인들로부터 자신들의 상권을 지키는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금난전권이 육의전에 대해서만 부여했던 것인데 나중에는 일반시전까지 확대되어 자유로운 상공업의 발전을 저해했습니다. 예를 들면 지방상인들이 서울로 올라와 물건을 팔려고 한다면 반드시 시전상인을 거처야 했고 행상들이 서울에서 물건을 받아 팔려고 한다면 역시 시전상인을 거쳐야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시전상인이 형편없는 가격을 매겨도 그것에 응할 수밖에 없었고 만약 이를 어길 겨우 형조나 한성부에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좌의정 채제공(蔡濟恭)이 아뢰기를, “도성에 사는 백성의 고통으로 말한다면 도고(都庫))가 가장 심합니다. 우리나라 난전(亂廛)의 법은 오로지 육의전이 위로 나라의 일에 순응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이익을 독차지하게 하자는 것입니다. 근래 빈둥거리며 노는 무뢰배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스스로 가게 이름을 만들고, 무릇 사람들의 생필품에 관계되는 것들을 제각기 멋대로 전부 주관합니다. 크게는 말이나 배에 실은 물건부터 작게는 머리에 이고 손에 든 물건까지 길목에서 사람을 기다렸다가 싼값으로 억지로 사는데, 만약 물건 주인이 듣지 않으면 곧 난전이라 부르면서 결박하여 형조와 한성부에 잡아넣습니다. 그러므로 물건을 가진 사람들이 간혹 본전도 되지 않는 값에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흘리며 팔아 버리게 됩니다.’ 『정조실록』

그럼 여기서 육의전은 무엇일까. 육의전은 조선 시대에 나라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던 여섯 종류의 큰 상점으로 이들은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권, 난전을 단속할 수 있는 금난전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장사를 하려면 나라의 허락을 받도록 한 점이 왜 일까 하는 것인데 당시 상업이 지나치게 발달하면 나라의 근본산업인 농업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상업을 천시한 이유는 농업은 정당하게 일을 하여 돈을 벌었다고 생각한 대신 상행위는 큰 노동 없이 돈을 벌 수 있으므로 성리학이라는 관점에서 곱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상행위가 커지는 것을 국가가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인구가 늘어나고 그에 대한 필요물품이 확대됨에 따라 유통도 활발해졌습니다. 그래서 국가도 방법을 바꾸어 상행위를 인정하는 대신에 세금을 받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상인들은 관청의 허가를 받아야 장사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전상인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시장이 만들어지고 그들 중에 거상이 나타났습니다. 비단과 명주, 무명, 모시, 종이, 생선 등을 취급하는 점포로 흔히 이들 가게들은 다른 상점들과 구분하여 육의전이라 하였습니다. 특히 이들은 나라의 허락을 받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로 그들은 허가를 받지 않고 판매하는 난전을 관청에 신고하기도 했지만 직접 그들의 상행위를 막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나선 이유는 자신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가면서 장사를 하는데 난전이 생기면 자신들이 세금을 내는 대에 걸림돌이 된다고 본 것입니다. 또한 조선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궁핍해진 재정을 해결하기 위해 이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금난전권 외에도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게 하고 국가에서 남은 잉여품들을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쟁의 시기가 지나고 국가가 안정기에 들면서 부터였습니다. 이들에게 부여한 권리가 오히려 특권이 되어 소상인들이 피해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하루아침에 해결하기도 쉽지 않은 것이 그동안 국가재정과 관련하여 중요한 역할을 해왔으므로 바로 이들의 권리를 빼앗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힘든 것은 바로 소상인들이었습니다. 금난전권을 앞세워 시전상인들이 횡포를 부리자 이에 대해 성 밖으로 행차한 정조를 찾아가 호소하게 됩니다.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을 난전으로 트집잡아 장사를 방해한다는 것입니다. 1786년에는 대장장이 이춘세가, 1787년에 대장장이 정대운이, 1788년에는 모자전의 강덕일이 호소한 것입니다. 이쯤 되니까 대책이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임금 정조는 백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군주였습니다. 아랫사람이 국왕에게 올리는 글을 상언이라 하고 민원인이 궁궐 안에서 또는 왕이 행차할 때 그 앞에서 징이나 꽹과리, 북을 치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것을 격쟁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제도를 통해 백성들이 억울함을 토로했으며 이를 들은 임금은 사흘 내에 답변을 내렸습니다. 당시 우리가 알고 있는 신문고라는 것도 있었으나 이를 치기 위해서는 문을 지나다가 쫓겨나는 수도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신문고보다는 상언이나 격쟁이 더 효과적인 방법이었습니다. 글을 아는 양반들은 상언을 통해 글을 올렸을 것이고 글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격쟁이란 방법을 통해 민원을 제기했을 것입니다. 당시 왕이 행차할 때 이러한 방법으로 하소연한 계층은 농민, 천민층이 절반이 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제도는 누구나가 다 할 수 있는 제도였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이러한 것을 문서로 적어 두었다가 궁궐로 가서 처리한 것입니다. 
사실 소상인들이 임금에게 가서 하소연한 것은 실상이 심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노론세력들은 장사를 하여 부를 축적하고 싶어도 체면상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군영의 군졸이나 세도가의 노비들을 난전상인으로 활동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난전이 불법이니 권력가들은 힘으로 난전상인들을 새로운 품목의 시전상인으로 인정해 주도록 합니다. 그리하여 1777년 정조 1년에는 영조 때 주요 군영의 대장을 역임한 인사들이 자신들이 부린 노비로 부정한 행위를 일삼다 실각하고 숙청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전상인들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정조 앞에 등장한 것은 남인 계열의 채제공이었습니다. 일단 그가 주장한 것은 시전이 얼마 안 된 작은 시전들을 혁파하라는 것으로 권력을 이용하여 불법으로 만들어진 시전을 없애자고 합니다. 이로 인해 노론계열의 정치가들은 물론 시전상인들에게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정조는 굽히지 않고 179년 금난전권을 폐지하고 백성 누구에게나 상거래를 허락하였습니다. 이것은 기존에 시전이 가졌던 특권이 붕괴됨을 의미하는 것이고 정조는 소상인들의 편에서 정책을 펼치니 이것이 바로 신해통공입니다. 이러한 신해통공으로 채제공은 "어물 등의 물가가 갑자기 전보다 싸졌다." 고 보고했고 5개월 후에는 "장작 값이 옛날의 수준으로 돌아갔다." 고 보고했으며 정약용 또한 "일반 백성들이 모두 시행하기에 불편하다고 말했지만 1년 정도 시행해보니 물품과 재화가 모두 모여들고 백성들의 씀씀이가 풍족하게 되어 백성들이 크게 기뻐했다."하니 조선은 농업과 더불어 상업 역시 중요시 하는 나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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