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의 서막 김조순

2023. 3. 11. 09:3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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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죽음 이후 조선의 정치형태는 세도정치의 모습으로 흘러갔습니다. 정조가 갑자기 사망한 것인데 그의 죽음에는 독살당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따랐습니다. 여기에 따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선의 왕의 권력이 그리 강력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조선은 유교를 정치철학으로 삼았고 이러한 유교는 강력한 왕권을 멀리했습니다. 또한 연산군과 광해군이 쫓겨나고 여러 왕들이 독살설이 휘말렸습니다. 따라서 숙종은 조정대신들의 권력을 이용하여 반대파를 누르는 정책을 펴기도 했습니다. 영조나 정조 역시 탕평책을 편 것도 이러한 논리였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왕의 노력에 신하들이나 왕에 대치되는 세력들은 난색을 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따라서 정조가 독살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따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조가 죽고 나서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정조와는 대치되는 정치행보를 보입니다. 그는 수렴청정을 펼치면서 자신의 가문인 경주 김씨를 권력의 중심에 놓았고 그에 따라 노론 벽파의 기세가 등등해졌습니다. 정순왕후가 정치일선에 나서면서 기록에는 여주(女主) 혹은 여군(女君)이란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리고 신하들 사이에서는 문정왕후가 다시 나타났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정순왕후는 정치판에 등장하고 나서 정조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혁파하고 개혁 정치의 진원지라고 할 수 있는 규장각을 축소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 서적을 읽었다는 이유로 반대파인 남인세력을 핍박하니 그것이 바로 신유박해입니다. 그리고 1804년 순조가 15세가 되면서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은 중단되었고  1805년에는 정순왕후가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면서 안동 김씨 가문이 세도정치의 중심에 섰습니다. 
그럼 세도정치란 무엇일까. 국왕의 위임을 받아 정권을 잡은 특정인과 그 추종세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조선의 정치형태라고 하며 본래 세도정치는 ‘정치는 널리 사회를 교화시켜 세상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도리’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우리나라 역사에서는 조선후기의 정치모습으로  ‘世道政治’는 ‘勢道政治’로 타락, 변질되어 권세정치의 형태로 나타난 것입니다.
안동김씨는 순조의 처가로 이들 가문은 16세기 무렵에 본관이었던 안동을 떠나 상경하였습니다. 그래서 창의문의 아래쪽에 터전을 잡으니 이 일대가 당시에 장의동이라 했으므로 이들을 장동 김씨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항 안동 김씨 집안은 왕후를 3대에 걸쳐 배출하여 외척노릇을 합니다. 그렇게 배출된 왕비는 제 23대 왕 순조의 비인 순원왕후가 김조순의 딸기고 24대 왕 헌종의 비인 효현왕후는 김조근의 딸이었으며 25대 왕 철종의 비는 철인왕후로 김문근의 딸이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세도정치의 시작에는 정조가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을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세도정치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바로 김조순, 그가 바로 조선후기 세도정치의 서막을 연 인물로 평가받기 때문인데 그가 정조에 의해 세자의 장인으로 선택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김조순은 명문가의 자손이었습니다. 그의 7대조인 김상헌은 병자호란 당시 척화파였습니다. 조선시대 의리론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리고 김조순의 5대조는 송시열과 친밀하게 교류하며 노론의 영수로 활약한 김수항이고 고조부 김창집은 당대 노론 4대신으로 경종 때 영조를 왕세제로 주장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또한 김조순은 노론시파였으므로 그는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동정하는 정치세력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노론인데다가 자신의 정치 뜻과 맞았던 김조순과 혼인관계를 통해 끌어안은 것입니다. 정조가 얼마나 김조순을 총애했는지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는데 본래 김조순의 이름은 낙순이었다고 합니다. 1785년 문과시험에 급제한 후에 김조순의 조상이 김상헌임을 안 정조가 할아버지 조(祖)자를 이름에 넣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합니다. 그리하여 김조순이란 이름은 왕이 내려진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문체반정이 일어났습니다. 영조대에 『중국역사회모본』이란 책이 나왔는데 이 책은 글과 그림이 있는 책으로 그림이 100점이 넘게 들어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서문에 정통유학을 벗어난 소설에서도 교훈을 찾을 수 있다고 했으니 그림을 그린 사람도 궁중화원이었고 이를 지시한 사람은 사도세자였습니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도 사도세자였습니다. 어찌되었던 소설을 즐겼던 사도세자와는 달리 정조는 소설을 경계하였으며 문체반정에 연루된 자들이 처벌되었습니다. 어쩌면 정조는 성리학의 고전정신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탕평책으로 활용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때 연루된 사람이 바로 김조순으로 그는 예문관에서 숙직을 쓰면서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은 『평산냉연』이란 책이었습니다. 이 일로 인해 정조는 김조순에게 자송문을 쓰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 일로 정조는 더욱 김조순을 마음을 들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가 쓴 자송문이 마음에 들었으니 정조는 그의 글을 가리켜 ‘뜻이 풍부해서 정말 내용이 좋다. 그래서 내가 촛불을 밝히고 또 밝혀서 읽었다.’라고 그 소감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정조는 김조순을 세자인 순조의 사부로 삼았고 사망할 적에는 김조순의 손을 잡으면서 순조에게 ‘바로 이 신하에게 너를 부탁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이러한 부탁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지만 영조 때의 대표적인 외척인 풍산 홍씨나 경주 김씨 세력에 대해 철저하게 탄압했던 정조가 김조순을 순조의 후견인으로 지목한 것은 정조가 스스로 세도정치의 서막을 열게 한 조력자였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김조순의 딸이 순조에게 시집갈 적에도 정조는 법도에 어긋날 만한 일을 했습니다. 처녀단자라 하여 나라에 간택령이 내렸을 때 그 후보가 될 만한 사족(士族) 처녀의 이름을 써서 올리는 것이 있는데 정조가 정조가 김조순더러 처녀단자를 올리라고 지시합니다. 이미 정조는 김조순과 사돈관계를 맺을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조가 붕어하면서 일이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조순은 시파였으므로 순조를 수렴청정하던 정순왕후입장에서는 김조순의 딸과 정조의 아들 순조의 결혼을 미루다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반대정치세력의 책잡히지 않으려 노력했고 사직까지 하는 등의 노력이 정순왕후의 마음에 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왕실의 가까운 친척으로서 안으로는 국가의 기밀 업무를 돕고 밖으로는 백관을 총찰하여 충성을 다하면서 한 몸에 국가의 안위를 책임졌던 것이 30여 년이다.’ 『순조실록』
김조순이 왕의 장인이 되면서 판서와 훈련대장, 규장각 제학 등 여러 고위직을 역임했고 비변사는 당상직을 차지한 안동 김씨 출신이 37명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이러한 권력이 대를 이어진 것입니다. 순조 말년에는 김조순의 뒤를 이어 김유근이 권력을 잡았고 셋째 아들 김좌근이 마흔 두 살에 과거에 급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4년 만에 이조판서까지 올랐습니다. 순원왕후가 힘을 쓴 덕분입니다. 특히 김조순의 손자들인 김병학, 김병국, 김병기 등이 인사동쪽에 살면서 벼슬을 사려는 사람들로 이 일대가 북적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당시 나합이라는 김좌근이 눈에 들어 기생에서 소실이 된 여자가 있는데 평안 감사도 나합의 버선코에 이마를 조아리지 않고서는 자리를 보전할 수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나합의 손에서 여러 관직이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매관매직이 성행하다 보니 과거제라는 것이 유명무실해졌고 세도가문에서는 과거를 보기도 전에 합격통보를 미리 받고 잔치를 준비하기도 했습니다. 당시 소과에 급제하려면 3만냥, 대과에 급제하고 싶으면 10만냥, 그리고 수령을 하고 싶으면 여기에 4만 냥을 더하고 관찰사나 유수는 여기에 10만냥을 더하였습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소과에 합격하려면 10억에서 ~15억 정도의 비용을 들었으므로 이들이 벼슬자리를 얻고 나서 본전을 뽑기 위한 부정부패는 볼보듯 뻔한 일이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때 한 집안이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견제장치가 완전히 망가졌다는 것입니다. 당시 국제사회가 빠른 속도로 발전해나가던 시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때의 조선은 정체를 아닌 오히려 퇴보를 하여 멸망으로 한 층 더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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