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명세자와 신정왕후

2023. 3. 13. 09:39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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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명세자

‘오늘의 경사는 곧 국조에서 100년 이래 처음 있는 경사이므로 직접 전궁께 하전을 올렸고 대정에서 축숭을 받았다. 천일이 맑고 화창하여 신인이 서로 기뻐하고 있으니, 이러 때에 견휼하는 정사가 의당 증외의 백성들에게 미쳐야 한다. 제도의 구환과 증렬미 5분의 1, 각공의 지난 것이 남은 것은 1만석까지, 시민의 요역은 1개월까지, 현방속은 30일까지를 탕감함으로써 기쁨을 기억하고 경사를 함께하는 뜻을 보아라.’ 『순조실록』
효명세자가 태어났을 때 순조가 감격하여 한 말입니다. 당시 효명세자는 오랜만에 세자로 책봉된 정실 왕비 소생원자이기도 했습니다. 3세 때 그는 영이라는 이름을 얻었는데 일(日)자에 대(大)자를 붙인 글자입니다. 따라서 함경도  관찰사 김이영(金履永)은 세자의 휘와 같다는 이유에서 이름을 ‘이양(履陽)’으로 고치기도 했습니다. 이 효명세자의 빈은 바로 신정왕후로 풍양조씨 집안이었습니다. 세도 가문에서 간택한 것입니다. 
‘외척 박종경은 요행히 지극히 가까운 친척에 의탁하여 많은 은택을 후히 입었으니, 진실로 조금의 이성이라도 있다면 마땅히 100배나 겸양하고 두려워해야 할 것인데도 그는 어찌하여 심술이 바르지 못하고 수단이 더욱 교활해야 합니까.……저 박종경이 무슨 재능과 덕망이 있고 무슨 식견이 있습니까? …… 삼가 원하건대 엄중히 물리치는 법을 쾌히 시행하여 영원히 보전하는 은혜를 내리소서,’ 『순조실록』
박종경은 순조의 외삼촌되는 사람으로 그는 외척으로 홍경래의 격문에 그 이름이 적힐 만큼 백성들을 고생하게 만든 인물입니다. 그런 그를 공격한 것이 바로 풍양 조씨 집안의 조득영입니다. 그리고 이 풍양 조씨 집안이 떠오르자 왕실에서는 그와 혼인관계를 맺은 것입니다. 당시 상황은 반남 박씨가 내리막길을 걷는 와중에 안동 김씨의 세력이 커지면서 이를 견제하는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세자빈의 아버지는 조만영으로 조부가 이조판서 조엄(趙曮. 1719~1777)이고, 아버지는 판돈녕부사를 지낸 조진관(趙鎭寬. 1739~1808)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동생 조인영은 순조 때에 영의정을 지내기도 했습니다. 
효명세자가 아직 나이가 어렸던 1810년대는 조선 역사상 가장 기온이 낮았던 시기라고 합니다. 이상저온 현상등 각종 자연재해를 맞았고 따라서 이 시기의 백성들의 어려움은 더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죽 했으면 1809년에는 아홉 번의 기우제, 1811년에는 열 번 그리고 1814년에는 14차례의 기우의식을 지냈습니다.  그러던 1827년 순조는 건강이 안좋아졌다는 이율 효명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깁니다. 
 “시(詩)에서 일으키고 예(禮)에서 세우며 악(樂)에서 완성한다” -공자-
이러한 옛 사람의 말을 따라서일까. 그는 궁중음악을 통해 나라의 안정을 기하려 했습니다. 당시 안동 김씨가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상황이었고 삼정문란 등으로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심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러한 정치에 환멸을 느낀 순조가 방어책으로 효명세자에게 정사를 맡겼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효명세자는 세도정치를 꺾기 위해 예악정치를 실행합니다.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는 어머니인 순원왕후 김씨의 40세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1828년 궁중무용인 '춘앵무(春鶯舞)'를 만들었으니 세자가 어느 화창한 봄날 아침 버드나뭇가지 사이를 날아다니며 지저귀는 꾀꼬리 소리에 감동, 이를 무용화한 것으로 지금까지도 전승돼 오고 있는 춤입니다. 따라서 현대 한국무용을 하는 사람들에게 효명세자는 많이 알려져 있는 인물이라고 합니다. 게다가 이 궁중무용 창작자 중에 왕실사람으로 밝혀진 사람은 거의 효명세자가 유일하다고 합니다. 효명세자는 춤을 만들어 순조와 순원왕후를 행사에 모시고 잔치를 하여 왕과 왕비의 권위를 높여주었을 것이고 다이 유교의 질서를 중요시하던 조선사회에서 세자가 왕에게 효도를 보여줌으로써 신하에게는 암묵적으로 자신에게 충을 강요한 것입니다. 일종의 통치행위의 일환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효명세자는 문학분야에 있어서도 남다른 재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경헌시초』, 『학석집』같은 문집을 남겼으며 여기에 시조 9수와 ‘목멱산’, ‘한강’, ‘춘당대’ 등의 국문악장을 비롯한 400여 편의 시가 수록되었습니다. 

신정왕후로 추정되는 초상화

효명세자는 대리청정하면서 세도정치를 혁파하려고 노력합니다. 따라서 당시 세도가였던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남인, 북인, 소론 계열의 인사들을 사헌부와 사간원에 배치시킵니다. 그리고는 이들이 안동 김씨 등 유력 가문을 공격하여 그들의 힘을 약화시킨 것입니다. 당시 효명세자의 나이는 불과 19세에서 22세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즈음 해서 효명세가가 국정을 총괄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대리청정을 하던 시기에는 이전과는 다르게  파직, 탄핵, 유배, 국문, 해임 등의 처벌과 관직 제수 및 시상 등 상벌이 많았습니다. 그의 대리청정 이전에는 순조의 건강 문제로 인해 관리들의 기강이 해이해져 각종 부정부패가 만연하였는데 효명세자를 이를 직접 다루며 해결하려고 했고 그 과정에서 인사권까지 행사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까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조의 지원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이전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맡긴 것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하는 시기에 월권이라는 둥 신하들 앞에서 면박을 주거나 혹은 국사를 논할 때에 자신에게 물어보면 결단력 없다고 나무란 반면 순조는 전적으로 효명세자를 믿고 맡긴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핑계가 아닌 순조의 건강 문제가 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기간은 결코 길지 못했습니다. 불과 3년 3개월 만에 끝난 것입니다. 
그리고 왕위에 오른 이는 바로 순조의 손자 헌종, 그의 나이 불과 8살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수렴청정이 불가피했는데 이 때 수렴청정을 나선 것은 그의 어머니 신정왕후가 아니라 할머니인 순원왕후였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헌종도 일찍 사망합니다. 그의 나이 23살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강화도령을 데려와 왕으로 삼으니 그가 바로 철종입니다. 그리고 조정은 안동 김씨의 세상이 됩니다. 그러던 철종 8년에 순원왕후가 사망합니다. 그러면서 신정왕후가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되었고 이후 6년 뒤에 철종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정왕후가 후계자 지명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하여 지목된 인물이 바로 고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종의 뒤에서 바로 신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펼칩니다. 그러면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한 일이 바로 경복궁 중건입니다. 이 일은 흥선대원군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흥선대원군은 일을 추진하기 위한 일종의 간판이고 실질적인 조정자는 바로 신정왕후였던 셈입니다. 
‘대왕대비가 전교하기를, “돌이켜보면 익종(효명세자)께서 정사를 대리하면서도 여러 번 대궐에 행차하여 옛터를 두루 돌아보면서 개연히 다시 지으려는 뜻을 두었으나 미처 착수하지 못하고 헌종께서도 그 뜻을 이어 여러 번 공사하려다가 역시 시작하지 못하고 말았다.”하였다.’ 『고종실록』
즉 경복궁 중건은 효명세자가 뜻으로 품은 것이었으나 그가 일찍 죽어 이루지 못한 것을 신정왕후가 일궈낸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가 안동 김씨를 견제하기 위해 한 일이 바로 비변사 혁파입니다. 비변사는 19세기 세도정치의 핵심적인 기구인데 여기에 집중된 권력을 의정부와 삼군부로 나누고 나중에는 비변사를 의정부에 통합합니다. 비변사 혁파는 흥선대원군이 한 일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뒤에는 신정왕후가 있던 것입니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수렴청정을 할 수 있었던 신정왕후, 그런 그가 고종이 15세가 되자 흥선대원군에게 전권을 주고 물러났다고 하지만 그런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시기인 것입니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섭정정치를 하면서 여전히 신정왕후가 뒤에서 받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왕이 뒤에서 권력을 가지게 되었으니 행복했을까. 이미 20대에 남편과 아들을 잃었으니 그의 삶 역시 평탄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당시 국내외정세만큼 치열한 권력의 중심에 살았던 신정왕후는 사후 익종과 합장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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