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경래의 난
2023. 3. 12. 09:36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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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서 대원수는 급히 격문을 띄우노라. 무릇 관서 지방은 단군 조선의 터전으로 예부터 문물이 융성한 곳이다. 임진왜란 때는 나라를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서쪽 땅을 더러운 흙처럼 버렸다. 심지어 권세 있는 가문의 노비들조차 서쪽 땅 사람들을 보면 반드시 평안도 놈이라 일컫는다.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겠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 권신들의 간악한 짓은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고, 김조순의 무리가 국가의 권력을 갖고 노니, 어진 하늘이 재앙을 내려 겨울 번개와 지진이 일어나고 바람과 우박이 없는 해가 없으니, 이 때문에 큰 흉년이 들고, 굶어 죽는 사람들이 셀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세상을 건질 성인이 나타났으니 그분은 철기 10만의 군대를 거느리셨으며, 부정부패를 척결할 뜻을 가지셨다. 이제 격문을 띄워 각 주‧군‧현의 수령에게 보내니, 절대로 동요치 말고 성문을 활짝 열어 우리 군대를 맞으라. 만약 어리석게도 항거하는 자 있으면, 기마병의 발굽으로 무찔러 남기지 않으리니, 마땅히 명령을 따라 거행함이 좋으리라.‘
이 글은 1811년 12월 18일 저녁 홍경래가 평서 대원수의 직함으로 가산의 다복동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며 낭독한 격문입니다. 바로 홍경래의 시작입니다. 홍경래의 원인은 세도정치가들의 횡포와 관서지방에 대한 횡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홍경래는 평안북도 용강군의 평민출신으로 평양 향시를 통과한 지식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골선비가 한양에서 대과를 치루어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 지역의 사람들이 과거 합격률이 낮았던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이 지역의 사람들이 높은 직책에 오르지 못하고 한직에 떠돌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서는 ‘평안도에는 300년 이래 높은 벼슬을 한 사람이 없었고, 서울 사대부는 이들과 혼인하거나 벗하지 않았다.’고 나옵니다. 또한 조선초 평안도지역은 고려의 유민으로 구분되어 등용이 어려웠으며 조선전기에 비로소 개척된 이곳으로 인구가 이주해오더라도 유력한 가문이 오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농업의 발달이 힘든 곳이라 양반들의 거주가 꺼려지는 곳이었고 중앙의 관료들은 이 지역에 대해 성리학에 대해 모르는 변방지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죄를 지은 자들이 이 곳으로 유배오면서 정치적 차별을 받는 곳이 된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 곳이 경제적으로 다른 지역에 비해 크게 떨어진 지역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매우 부유한 지역으로 조선후기 대청무역이 평안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지역은 중국사신들이 지나가는 곳이었기 때문에 국방비와 사신접대비가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세금을 걷으면 중앙으로 보내지 않고 비축하고 사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곳은 다른 지역에 비해 풍족한 지역으로 성장해 갔습니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이 곳의 부는 오히려 중앙지역으로 빠져나갔습니다. 18세기 중엽부터 중앙의 재정이 부족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 사람들이 부를 축적하다 보니 아무래도 관직에 대해 욕심도 났습니다. 그래서 향직을 파는 일종의 매향이 성행하였는데 부역이나 세금 면에서 혜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평안도 지역에서 이러한 매향과 관련된 부정부패가 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조선 후기 상업이 활발해 지면서 이 지역도 그러한 움직임에 역동적으로 참여한 지역이었지만 정치권력에서는 배제되었고 오히려 수탈의 대상이 되어 백성들의 불만은 커져갔습니다. 평안도 지역은 농업이 잘 이루어질 수 없는 지역인 대신에 오히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상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중국과의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해갔고 교역에 필요한 은과 금이 채굴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부유층이 생겼지만 이들은 기존의 부유층과 마찰을 빚었고 오히려 지방관의 수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을 때 부를 축적한 신흥상공업 세력도 가담하였습니다. 그리고 17~18세기 조선사회에서는 토지겸병이 유행하였습니다. 토지겸병은 쉽게 말해 남의 토지를 빼앗아 자기 토지를 넓히는 행위로 이로 인해 서민지주라는 부농층이 생겨났지만 반대로 대다수 소농민들이 몰락하기도 했습니다. 이렇듯 당시 시대가 주는 고통들과 지역차별에 따른 불만이 뒤섞인 것은 홍경래의 난입니다.
이 난을 이끈 홍경래의 집안은 넉넉하지 않았으나 소과에 합격한 방 있습니다. 그리고 1798년에 과거를 보았으나 낙방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서북 지방에 대한 차별과 외척 세도정치 하의 여러 모순에 불만을 품고 과거를 단념한 채 병서의 연구에 몰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풍수를 보는 지관이 되어 돌아다녔고 그 시절 그는 『정감록』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그에 대해 설명할 때에 바로 몰락양반이라는 신분입니다. 당시 과거제는 양반뿐만 아니라 일반 평민들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양반이라는 계층은 관직을 유지해야 신분이 유지되는 것이라고 하며 세습은 되긴 했지만 대를 거듭해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자연스레 신분이 평민으로 떨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홍경래의 부인에 관한 기록을 보면 최소사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소사는 조선시대 평민층의 부녀자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홍경래는 아마 평민층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난을 일으킨 이유에는 세도정치도 있었습니다. 과거에 합격해도 세도가들에게 뇌물을 바쳐야 했으니 당시 세도가들은 김조순이나 박종경같은 인물이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들러붙은 지역의 유지들 때문에 다수의 상인들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따라서 홍경래의 난이 지역차별과 더불어 세도정치에 의한 부정부패가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어난 봉기는 1811년 12월 15일 평양 대동관을 불태우려 했으나 화약통이 터지지 않아 사흘 뒤인 18일에 다시 거병하였습니다. 홍경래의 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후 이들은 가산, 박천, 태천을 점령하였으며 이제초가 이끄는 북진군도 관산, 정주를 점령하고 선천, 철산을 거쳐 1월 3일에는 용천에 이르렀습니다. 그렇게 이들은 박천 송림에서 관군을 맞닥뜨렸으나 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싸움의 패배 원인에는 내부의 분열이 있었습니다. 지휘부에서는 원래 박천을 점령하고 난 뒤에 영변을 치고 안주를 함락하는 계획을 세웠으나 영변을 거치지 말고 안주를 바로 치자는 주장이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안주를 먼저 치자고 주장한 사람들은 영변을 치고 나면 안주 공략이 어려워져서 난이 실패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때 자신들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세력과 반란세력간의 내부다툼이 있었고 이로 인해 홍경래도 부상을 입었습니다. 그렇게 홍경래가 낫기를 기다렸는데 이는 오히려 관군으로 하여금 전열을 가다듬을 수 있는 시간을 벌어다 준 것입니다. 그리고 봉기군이 송림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한 관군이었고 이 싸움에 봉기군이 패합니다. 특히 평야에서 이루어진 전투는 관군에게 유리하게 흘러갈 수밖에 없었고 더욱이 관군은 작전본부를 언덕에 두어 전투의 양상을 다 꿰뚫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다음에도 터졌습니다. 관군이 봉기군과 양민을 구분하지 못했는지 학살을 저지른 것입니다.
이후 봉기군이 정주성에 들어갑니다. 이 때 많은 농민이 따른 반면 초반에 가담했던 향리와 같은 중간계층이 전세가 불리해진다는 것을 깨닫고 이탈하기 시작합니다. 특히 관군의 초토전술이 오히려 농민의 세를 불려놓았습니다. 당시 농민들은 살기 어려워 광산을 연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관군의 만행에 반란군의 불리한 정세에도 불구하고 가담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봉기군은 정주성에 넉 달을 버텼습니다. 그러다 진행된 관군의 은밀한 계획, 성벽을 허물기 위해 정주성 북장대 아래에 땅굴을 파고 화약을 묻었습니다. 그리고 화약이 터지면서 성벽이 터지자 병력 수에 있어 우위에 있었던 관군이 밀려들었고 그들의 공격에 홍경래는 총에 맞아 숨지고 반란을 끝을 맺게 됩니다.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지만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안타깝게도 조선정부의 노력으로 이어지지는 못했습니다. 따라서 홍경래는 난을 끝났지만 이는 다시 임술농민봉기 그리고 동학농민운동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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