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의 싸움 쌍령전투
2023. 2. 28. 09:0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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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다시 한 번 외적의 침략에 의한 난리를 겪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병자호란, 과연 피할 수 없던 전쟁이었나. 사실 생각해보면 그건 쉽지 않습니다. 이전에 있었던 인조반정의 이유에는 바로 광해군가 중립외교를 했다는 것도 포함되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 후금의 전력을 명나라보다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당시 조선을 지배하고 하고 세계관이 성리학이었고 따라서 조선에게 임진왜란 때 파병해준 명나라 대신 후금과 친하게 지내라는 것은 어쩌면 어려운 부탁이었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당시의 정책은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면 지극히 현실적이지 못했고 정묘호란을 겪었음에도 국제적인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친명배금정책이라는 현실과 거리가 있는 외교노선을 고집하던 인조는 이괄의 난, 정묘호란 그리고 병자호란 때에도 도성을 비우는 안좋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조선에게도 병자호란을 맞이하지 않을 수 있는 기회는 있었습니다. 바로 이전에 정묘호란을 겪은 것입니다. 후금에게 조선의 정복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후금은 인구가 늘고 있는 상황이었고 그에 따라 부족해진 물자를 공급받고 싶어 했습니다. 따라서 상대방을 완전히 말살시키는 것은 후금에게 도움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묘호란을 통해 후금의 또다른 목표인 모문룡 제거에는 실패했지만 화약을 맺는데 만족해했고 조선도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선은 이를 국가정책의 전환의 기회로 삼지 않고 단지 한 숨 돌린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기존의 인조의 외교노선이 여전했음을 시사하는 사건도 있었는데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이 반란을 일으켜 산둥반도를 장악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모문룡의 심복으로 1년 동안 반란을 유지하다가 바다로 탈출했는데 그들이 가진 함대를 후금이 타내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함대를 손에 넣으려는 후금과 이것을 막고자 하는 명나라 둘에게서 도움을 요청받습니다. 그 때 조선이 선택한 것은 바로 명나라였습니다.
1635년 후금 내에서는 홍타이지를 황제의 자리에 추대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고 여기에 조선도 동참시키려 했습니다. 그리고 1636년 2월 16일 용골대와 마부대를 위시로 한 사절단이 문서를 들고 찾아왔습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조선조정에서는 후금의 사절단이 가지고 온 문서를 불태우고 사신들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라왔습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느낀 후금의 사절단은 한양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습니다. 그리고 1636년 4월 11일에는 후금은 국호를 대청으로 고치고 연호도 숭덕이라 하였습니다. 이 때 청나라에 간조선의 관원인 나덕헌과 이확은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자존심의 문제였는지 모르지만 당시 국제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안타까운 처사라고 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홍타이지는 무례한 조선의 사신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는 다시 한 번 조선에 대한 정벌군을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은 청나라의 군대에 대비해 청야수성전술과 성을 지키며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가는 시간을 벌기로 하였습니다. 하지만 청나라는 모든 것을 무시한 채 빠르게 내려왔고 인조가 강화도로 막는 것을 목표로 삼았습니다. 하지만 세 번째로 도성을 버리는 것을 원치 않았던 인조가 우왕좌왕하는 사이 강화도로 가는 길이 쉽지 않게 되었고 조선의 왕은 남한산성으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이를 청나라군대가 에워쌌습니다. 그리고 이를 구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조선의 군대가 몰려들었습니다. 하지만 겁을 먹고 싸우지 않거나 따로따로 진격하다가 격파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쌍령전투가 벌어졌습니다.
1637년 경상도군이 이천의 쌍령에 도착하여 진영을 설치했고 좌병사 허완도 진을 쳤습니다. 당시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었습니다. 청군이 남하하여 쌍령전투를 벌이게 되었고 조선군은 조총으로 응수했습니다. 조총의 화력에 청군의 기병이 고꾸라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화약의 양이 문제였습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청나라군대가 다가오자 포수들은 흩어지고 말았고 조선의 목책이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일방적인 청군의 학살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게 허완의 진영이 무너졌습니다. 그리고 청군은 민영의 진영의 진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조선군이 진영을 다시 세우고 조총을 발사하여 청의 기병을 쏘아보지만 이번에는 조총의 사거리가 문제였습니다. 또한 앞서 벌어진 교전처럼 화약의 양도 문제였습니다. 또한 화약을 받기 위해 밀치는 사이 화약을 보관하는 궤짝에 화승이 떨어지면서 폭발하는 사고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화약통에 다시 불이 옮겨 붙으면서 여기저기서 폭발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조선군의 넋이 나간 사이에 청군이 달려들었습니다. 결국 조선군은 도망치고 말았고 이 전투는 조선 역사상 최악의 패배로 기록되었습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이 때 전투에 참가한 조선군은 약 4만 여명, 그리고 청군은 기병이 300명이었습니다. 게다가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경상좌병사 허완의 진영에 최초로 돌입한 것은 33기였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 조선군은 청나라 군보다 하루 일찍 도착하여 보다 높은 곳에 진을 칠 수 있었고 청군은 접근전해야 위력을 발휘하는 기병위주였던 반면에 조선군은 원거리 사격이 가능한 포수가 많았습니다. 조선군이 진열을 잘 갖추고 일제히 사격을 했다면 보다 더 좋은 대응이 가능했을 지도 모릅니다. 또한 이러한 사격을 위해서는 지휘관이 적절하게 통제했어야 했는데 그게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조총병이 재장전할 때에 시간을 메워주는 궁병이나 적병의 공격으로부터 엄호해줄 창병과의 결합이 있어야 했는데 그것도 미흡했습니다. 또한 화약을 재분배하는 과정에서의 폭발사고는 아군진영에 더 큰 악재였습니다. 이 전투에서 다수의 조선의 지휘관들이 사망했으니 조선군의 피해는 상당했습니다.
『연려실기술』에서는 조선군 4만 명, 청군 300명, 최초 돌격한 청군 기병을 33명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조 시절 사도체찰사를 지낸 김시양이 쓴 『하담파적록』에서도 경상좌병사 허완, 우병사 민영과 충청병사 이의배 등이 3만 여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쌍령에서 싸우다가 모두 패하여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잡록』에 나와 있는 전라 감사 이시방의 공초기록에는 3만 병마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쌍령전투에 좌병사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허완의 묘비병에는 보졸 1면 여명이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한편 쌍령전투에 참전한 조선군의 수가 4만 명이 될 수 없다는 근거로 경상도에서만 4만 명이라는 숫자가 단기간에 빨리 징집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인조에게 보고된 경상도 속오군의 숫자는 2만 4000여명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쌍령전투에 충청병사 이의배가 전사했다고 나와 있고 이시방도 호서와 영남의 병마라고 했으니 쌍령전투에는 충청의 병력도 투입된 것입니다. 따라서 경상도에서 징집된 병력에 험천현 전투에서 패배하고 난 뒤 충청도 병력에 합세하면 대략 4만이라는 숫자가 가깝습니다. 주로 속오군으로 구성된 군대였습니다. 그러면 청병력은 고작 300명이었을까. 중국 정사 『청사고』 권 526 「조선열전」에서는 날짜가 하루 틀린 전투가 나와 있는데 여기서는 전라도에서 온 병력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병부다라 패륵 악탁이 패주시켰다고 하는데 당시 패륵 악탁은 3000명을 이끌고 참전했으며 조선측에 기록된 300명은 아마 악탁의 부대 중 선발대와 그 일부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어찌 되었든 3000명의 청나라 기병에게 4만 명에 달하는 조선군이 패배한 전투가 쌍령전투였습니다. 조선군은 조총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전술과 병력의 훈련이 미비했고 청나라 병력은 그야말로 전투에 능숙한 정예부대였습니다. 그에 반해 조선군은 실전경험이 부족한 속오군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이 속오군은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농한기에 징집하여 훈련한 군대였지만 정부는 이에 대한 비용을 속오군 당사자들에게 부담시켰고 그나마 흉년이 들거나 재해가 발생하면 속오군을 소집하여 훈련을 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게다가 소집된 속오군도 산성을 쌓거나 보수하는 일에 동원되었습니다. 그리고 쌍령전투에서는 이들을 통제할만한 지휘관이 조선에서는 부족했고 청군이 난입할 때 조선군대가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패배를 막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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