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묘호란은 어땠나.
2023. 2. 26. 08:59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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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에서 인조로 바뀐 인조반정,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광해군의 잘못으로 삼고 일으킨 반정이기에 인조정권은 이전의 외교정책에 비교하여 변화가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명배금정책, 이 정책이 후금을 자극했을까. 1627년 후금이 조선으로 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넜다는 말이 들렸을 때 조선 조정은 후금의 군대가 왜 조선으로 쳐들어왔는지 갸우뚱했다고 합니다.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려고 한 것은 맞지만 조선입장에서는 후금을 자극할만한 군사적 행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당시 후금의 통치자는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홍타이지였습니다. 그는 후에 청 태종이 되는 인물로 대외정책에 있어 강경론자였다고 하며 그에 따라 조선정벌을 주장하였습니다. 그렇게 조선에 대한 정벌을 벼르고 있던 차에 이괄의 난 때 도망쳐 나온 한윤과 정매 등이 인조정권이 명나라만 섬기고 후금을 배척한다고 후금에 가서 이야기합니다. 아마 이게 더욱 홍타이지를 자극했을 것입니다. 또한 이전의 후금의 통치자 누르하치가 죽었을 때 조선에서는 조문단을 보내지 않았으니 후금 입장에서는 조선에 대한 정벌의 근거가 하나 더 있던 셈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후금의 내부 문제도 작용했습니다. 홍타이지는 조선정벌을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계기로 삼고자 했는데 당시 그는 한이었으나 그 권력이 약해 형제들과 연정을 펼쳐야 했습니다. 특히 청태종 시기에는 굶으 죽는 일이 많아 사람이 서로 잡아먹는 일이 생기고 돈이 있어도 식량을 구할 수 없다고 하였으니 전투에 능한 후금이 반면에 농사에는 영 재능이 없었기에 조선정벌은 더욱 필요했는지도 모릅니다. 여기에 더해 후금이 조선에 정벌을 시도한 것은 모문룡 문제가 컸습니다. 모문룡이 가도에 있으면 여전히 후금에게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홍타이지는 1627년 1월8일 대패륵(大貝勒) 아민(阿敏)에게 조선을 정벌하라고 명령했습니다. 1월 13일 후금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넜습니다. 만주족은 물론 한족과 몽골군의 군사도 가세된 군대는 조선출신의 강홍립과 한윤도 지휘부에 끼어 있었습니다. 한윤은 변장하고 몰래 의주성으로 들어와 전투가 시작되었을 때 병기고에 불을 질렀습니다. 그러면서 후금군에 내통하는 자들이 생겨 의주성으로 후금 군대가 들이닥쳤고 성을 지키던 의주목사 이완은 사로 잡혀 피살되었습니다. 이후 후금의 군대는 정주의 능한산성으로 쳐들어가 조선의 군대가 조총을 쏘고 다시 재장전하는 사이에 돌격해 제압하였습니다. 그렇게 성은 함락되고 군사들은 전부 살해되었으며 백성들은 적에게 포로로 잡혀 머리를 깎였으니 그것은 이제 포로들이 자신들의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1월 21에는 안주로 쳐들어왔습니다. 성은 평안병사 남이흥이 지키고 있었고 3만 6천 여명에 달하는 군민들이 있었지만 전투경험이 많은 후금의 상대가 되지 목했습니다.
한편 1월 17일 쯤에는 후금의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이야기가 조정에 들어왔습니다. 조정의 대신들은 각종 의견을 내었지만 인조는 이미 강화도로 갈 생각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헌부와 사간원 관원들은 강화도로 가는 것을 반대하였습니다. 강화도에 가면 조정의 명령이 전달되기 어렵고 조운이 어렵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강화도로 들어가려면 분조를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백성들에게 교서를 내리니 그 내용은 백성들에게 미안함을 전하며 자신이 임금답지 못한 임금이라는 것을 담은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을 도와달라는 이야기도 적어놓았습니다. 그렇게 강화도로 떠난 인조, 그리고 병력을 강화도로 결집시켰지만 나머지 지역은 그냥 방치되었습니다. 그렇게 파죽지세로 내려오던 후금의 군대는 갑자기 화의를 제의하였습니다. 조선이 수세에 몰려 있었으나 후금에게는 병력이 더욱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당시 청나라 군대를 이끈 아민은 홍타이지에게 병력증강을 요청하였습니다. 그 사이 조선의 조정은 후금의 화친 서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인조와 반정공신들은 그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조정에서는 답신을 보냈는데 그 내용은 조선은 명을 200년 이상 섬겨왔고 임진왜란 때 명에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기 때문에 그들과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민은 이 답서를 받아들고 후금도 조선에 커다란 은혜를 베풀었다며 분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아민이 후금이 군사를 일으킨 사실이 정당하다고 하면서 화약과 싸움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답신을 기다리며 후금의 군대는 중화에서 1주일을 더 머물렀는데 이는 그들도 전투보다는 화약을 기다리는 눈치였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 답신을 통해 밝힌 뜻은 명나라를 배신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명나라의 연호인 천계(天啓)를 사용하여 더욱 분노하게 만들었으니 후금은 자신들의 연호를 사용하라고 하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서울까지 진격하여 1년 동안 머물며 철수하지 않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후금의 지휘부 안에서도 설전이 오고 갔으니 그러면서 아민은 서울로 전진할 뜻을 밝혔습니다. 후금이 요구한 것은 국왕과 후금 사신이 동참한 가운데 흰말(白馬)과 검은 소(黑牛)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는 의식을 거행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를 달갑지 않게 여겼습니다. 특히 한 나라의 국왕이 개돼지와 더불어 맹세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후금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복속지역마다 짐승을 사로 잡아 희생을 시키며 회맹하는 의식을 치르었으니 만주족 입장에서는 언제나 했던 의식이었습니다. 결국 조선은 후금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이괄의 난 이후에 어수선한 조선의 분위기를 다스릴 필요가 있었고 후금입장에서는 잠시 서진을 멈추고 내실을 다지는 게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화의가 맺어졌습니다. 후금군의 군대는 압록강을 건넜으나 홍타이지는 의주를 조선에 반환하지 않았습니다. 후금의 군대는 의주 부근에 주둔하면서 모문룡을 체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아예 농사를 지으면서 장기간 주둔할 것처럼 보였고 조선에서는 사자를 보내 모두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후금 측에서는 듣지 않았습니다. 대신 조선에서 모문룡을 처치하면 철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화친 이후 조선에서는 이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습니다. 그리고 명나라에서도 이러한 조선의 처신에 대해 비판하고 있었는데 1627년 6월 요동에서는 ‘조선이 오랑캐와 혼인을 맺었고 오랑캐에게 땅을 내주고 거주하는 것을 허용했다.’라는 소문이 돌았습니다. 인조반정이 광해군의 중립외교를 비판하며 일으킨 것이어서 정묘호란을 통한 화친은 정권에 커다란 타격을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금의 군대는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켰지만 그렇다고 순순히 돌아가지는 않았습니다. 후금의 군대는 돌아가면서 지방 각지에서 약탈을 벌인 것입니다. 조선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심각성을 느끼고 강홍립에게도 서신을 보내 후금의 지휘관을 설득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도한 서북 지방의 조선군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매복해 있다가 후금군을 습격하여 살해하거나 마필(馬匹)을 빼앗는 일을 한 것입니다. 평안도 순안에서는 삭주부사 이명길(李明吉), 평양판관 권이길(權 吉 ), 좌척후장 정지한(鄭之罕) 등이 이끄는 조선군과 후금군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있었고 승리를 거두기도 하엿습니다. 그리고 당시 후금군에에 잡힌 포로들을 다시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화의는 맺어졌지만 평안도 지역에서 계속 전투가 벌어졌고 그 중심에는 의병들이 있었습니다. 후금의 총사령관 아민은 조선을 모두 차지할 수 있었지만 자제했다며 즉각 공격을 멈추어달라고 했고 그렇지 않으면 청천강 이북의 땅을 내놓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후금을 괴롭게 한 평안도 지역의 의병의 중심에는 정봉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용천, 의주, 철산 출신 피난민들을 불러들여 약 4000명의 병력을 모았으며 장사준이 후금군 수백명을 이끌고 항복하라고 협박하자 정봉수는 매복한 뒤 그들을 공격하여 장사준을 참수시키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곧이어 벌어진 후금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였습니다. 그가 지킨 성은 용골산성으로 후금은 용골산성전투에서 패배하였고 이는 정묘호란 시 가장 큰 승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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