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알지는 흉노족과 관계가 있을까.

2022. 6. 21. 21:22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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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손된 문무왕릉의 비

1796년 낭산 선덕여왕릉 아래에서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사롭지 않은 비석 하단부와 우측 상단부 조각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문무왕비석이었습니다. 이후 사라진 비석은 1961년에 다시 나타났습니다. 2009년에도 일부 발견되었는데 당시에는 가정집의 빨래판으로 쓰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는 다른 이야기가 실려 있었습니다. 
“우리 신라 선조들의 신령스런 근원은 먼 곳으로부터 계승되어 내려온다. 화관지후 (和關之后)이니 그 바탕을 창성하게 하여 높은 짜임이 바야흐로 융성했다. 밑둥과 가지의 이어짐이 비로소 생겨 영이한 투후(秺侯)는 제천(祭天)할 아들로 태어났다. 7대를 전하니 15대조 성한왕(星漢王)은 하늘에서 바탕을 내렸고 …….
이 글에서는 성한왕이 등장하고 그의 7대조가 ‘투후’라는 사람이 보입니다. 이것은 기존에 알고 있던 지식에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기로는 신라는 박혁거세가 건국했으며 우리가 배우는 어떠한 역사의 장면에서도 투후와 성한왕은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데 투후라는 인물이 중국 감숙성 무위시에는 그의 동상과 더불어 무덤도 있다고 합니다. 김일제가 그 이름으로 흉노의 후예이자 마왕신으로 불렸다고 합니다. 왜 마왕신으로 불렸을까. 한편 문무왕의 비문에는 성한왕이라는 이름도 보이는데 문무왕의 동생인 김인문의 묘비에도 태조한왕이라는 사람이 등장하므로 둘이 동일인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투후 김일제와 성한왕은 문무왕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일까요. 
중국에는 김일제의 무덤이 있는데 건너편에는 한무제의 무덤인 무릉이 있다고 합니다. 한무제는 동서교역로인 실크로드를 점령하고 중국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개척하였으며 중화주의기틀을 마련한 황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한무제와 김일제가 서로 연관이 있습니다. 김일제의 자는 ‘옹숙’이고 본래 흉노 휴도왕의 태자였다고 합니다. 휴도왕은 감숙성 무위의 서북지역을 다스리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무제의 정복활동으로 인해 김일제는 한무제의 포로가 되었고 이후 한나라 왕실의 말을 키우는 노예생활을 했습니다.
“본래 휴도(休屠)에서는 금인(金人)을 만들어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래서 김씨라는 성을 하였다고 한다.” 『후한서』「김일제 열전」
 그러다가 망하루가 한무제를 죽이려 했을 때 목숨을 구해준 공로로 김일제는 투후라는 작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으로 사람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므로 김씨(金氏)성을 하사했다고 합니다. 김알지 설화를 살펴보면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뻗쳐 있고 나뭇가지에는 황금궤가 걸려 있었는데 그 금궤 속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다.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금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금궤에서 나온 아이라 하여 김알지라 하였는데 김일제의 일화나 김알지의 탄생설화에서 둘 다 금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자줏빛 구름이 하늘로부터 뻗쳐 있고 나뭇가지에는 황금궤가 걸려 있었는데 그 금궤 속에서 빛이 나오고 있었다. 나무 밑에서는 흰 닭이 울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금궤를 열어보니 사내아이가 나왔다.’


그러니까 이를 통해 보면 신라의 김씨는 흉노족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습니다. 특히 신라에서만 찾을 수 있는 무덤양식인 돌무지덧널무덤은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줍니다. 이러한 무덤은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마립간 시대에 이러한 돌무지덧널무덤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 무덤은 땅 위 또는 땅에 구덩이를 파고 나무 덧널을 넣은 뒤, 그 위를 돌로 덮고 다시 흙을 씌워 만든 무덤으로 이 무덤들의 주인공은 마립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더불어 마립간이라는 칭호도 역시 흉노족과 몽골족이 사용한 왕호인 ‘칸’과 유사하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씨 왕족의 무덤에서는 금관이 쏟아져 나왔는데 백제나 고구려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고 합니다. 특히 금관 위에는 세 마리의 새가 조각되어 있는데요. 이러한 모양은 내몽골 아로시등에서 출토된 흉노금관하고 모양이 비슷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무덤에서는 기마인물형 토기가 발굴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흉노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토기의 말등에 실린 것도 흉노족의 동복과 비슷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흉노 오르도스형 동복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분명 한반도 남부지역이 흉노와 관련을 맺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동복 자체가 흉노의 수장과 관련이 있는 유물이기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김일제가 한나라에서 하사 받은 영지가 신라의 수도와 같은 이름의 금성이며 흉노 왕비의 배출지가 알씨이다.


‘왕망이 패하고 난 뒤 투후도 끊겼다.’ 「한서 공신표」 투후 조
그러던 이후 김일제의 후손은 전한에서 신나라 그리고 후한으로 왕조가 바뀌는 과정에서 큰 타격을 입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주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김일제의 후손이 중국 측에서 사라진 것이 왕망의 신나라가 패망한 기원 23년인데 김알지가 출현한 것은 65년입니다. 따라서 신나라가 패망하면서 김일제의 후손이 한반도남부로 이주했고 그 세력을 키워 신라의 왕이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김수로도 중국에서 이주한 김일제의 후손인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거기에 신라 남부에 출토되는 신나라 때 발행된 화폐는 그 의견에 힘을 실어줍니다. 특히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는 ‘옛날에 망한 나라의 유민들이 진나라의 노역을 피해 한국으로 왔다’고 기록하며 그 언어 또한 마한과 달랐다고 합니다. 그럼 신라에서 왕위에 오른 김씨 세력은 이주민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하여 설화에서는 하늘에서 내려온 금궤에서 아이가 나온 것으로 표현된 것입니다. 

투후 김일제와 신라의 김알지는 무슨 관계일까.

그럼 성한왕은 누구일까. 족보상으로는 문무왕의 15대조는 세한으로 김알지의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세한을 성한왕으로 보고 있는데 성한왕의 성 자가 옛날에는 세라고 읽었을 것이며 문무왕에서 말하는 성한왕은 세한이며 알지는 시조이기 때문에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무왕비문에는 성한왕의 탄생을 묘사한 기록이 있는데 이 부분이 김알지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한왕이 김알지가 아니겠는가 하는 조심스런 의견도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김알지의 후손인 추사 김정희는 자신의 저서인 『해동비고』에서 성한왕을 김알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편 신라에서 김씨가 왕위에 오른 것은 미추왕이 최초라고 합니다. 그리고 투후라는 사람이 비문에 보이는데 그는 한무제 때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투후는 기원전 100년 경으로 비문의 주인공인 문무왕이 살았던 7세기와는 약 700년이 넘는 시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문무왕의 비문에서는 김일제의 23대손이 문무왕이 되어야 하는데 이 정도의 시간차이라면 김일제가 문무왕의 23대조가 되는 것이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니까 성한왕이라는 사람은 김씨로 최초로 왕위에 오른 미추왕이며 비문에 등장하는 투후는 김일제로 그가 바로 김알지라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문무왕 입장에서 15대조가 성한왕이라고 새겨놓았잖아요. 신라의 김씨 왕들을 기준으로 했을 때에 문무왕의 15대조는 바로 미추왕이라는 것입니다.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달성했습니다. 그리고 이후 세워진 문무왕비문은 신라 김씨 왕족의 선조가 흉노족인 김일제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문무왕비문은 신라의 역사인 동시에 신라의 왕족의 김씨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실린 김알지의 탄생설화를 보면 알에서 태어났다고 했을 뿐, 그것만으로 김알지가 어떠한 세력이었는지 알기가 어려운데요. 아마 후대에 있을 그러한 혼돈을 예상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문무왕비문은 자신들의 뿌리가 어디인지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거대한 역사의 퍼즐 조각하나를 찾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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