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봉총 금관에 담긴 안타까운 이야기

2022. 6. 30. 16:15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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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금관

일제 시대 때 일본학자들에 의해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경주에 소재한 서봉총도 역시 일본이 발굴했는데요. 하지만 일본의 문화유산이 아니라서 귀하게 여기지 않았는지 발굴된 유물들을 정리하지도 않았고 발굴보고서도 남기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무덤은 90년의 시간이 흘러 국립중앙박물관이 발굴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덤 둘레돌에서 큰 항아리 27점이 발견되고 항아리 안에서는 물고기의 조개류의 유체가 7천 7백 점이 발견되었습니다. 분석한 결과로는 가을에 많이 잡히는 청어와 방어 등 온갖 종류의 생선으로확인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돌고래와 복어, 성게 등 귀한 음식도 있었고 민물 거북의 일종의 남생이 껍질도 나왔습니다. 이로써 이 무덤의 주인인 신라의 지배층은 아주 좋은 식생활을 했었고 신선한 음식을 바로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유통단계도 좋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한편 고고학의 기본조차 지키지 않고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일제의 서봉총 발굴과정은 이해못할 행동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당시 백성들을 공분을 사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평양의 기생이 이 무덤에서 발굴된 신라 금관을 쓰고 장신구를 지닌 채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린 것입니다. 어찌하여 이런 사진이 찍힌 것일까요. 
1926년 당시 시천교라는 종교단체에서 주변경관을 다지기 위해 삽질하던 중에 이상한 소리를 났습니다. “쨍”하는 소리와 함께 철조각, 금구슬 등이 발견된 것입니다. 심상치 않은 발견소식을 들은 달려온 사람은 일본인 고고학자 고이즈미 아키오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조선 총독부 박물관의 발굴부에서 일한 그는 이 일대를 조사하게 되었고 결과 이 흙무지가 엄청 큰 무덤이며 하나가 아닌 표주박 모양으로 붙은 쌍둥이 무덤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는 남쪽의 무덤을 먼저 발굴하려 했지만 많이 훼손된 무덤에서는 토기 파편이라든가 굽은 옥 정도만이 발굴되어 그는 북쪽의 무덤을 발굴합니다. 그리고 남쪽의 무덤과 달리 많은 유물이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서봉총 발굴에 참여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 왕세자


한편 그가 한창 발굴작업을 할 때 스웨덴의 아돌프 구스타프라는 사람이 조선 땅에 있었습니다. 그는 스웨덴의 황태자로 후에 스웨덴의 국왕이 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조선땅 경주 한 고분에서 황금보관이 절반가량 출토되어 전하의 내방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에 아돌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 발굴은 너무나 행운의 발굴입니다. 허나 그 금관은 박물관에서 갖다가 묻은 것이 아닙니까?”
 그는 이 발견소식을 듣고 바로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운좋게 이 스웨덴의 황태자는 땅 속에 묻혀있던 금관을 꺼내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박물관에서 가져다가 묻은 것이 아니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박물관에 가져와 묻은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박물관에 가져갈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따라서 발굴팀은 이 고분의 중요한 방점을 찍게 해줄 인물로 스웨덴의 황태자로 생각하고 아돌프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가 손수 출토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스웨덴의 황태자가 발굴에 참여한 것을 기념하여 서봉총이라 하였습니다. 앞글자 ‘서’는 당시 스웨덴을 한자어로 서전(瑞典)이라 표기했으므로 여기서 앞글자를 따왔고 그가 출토한 금관에 세 마리의 봉황장식이 있기 때문에 봉황의 ‘봉’자를 따서 서봉총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제가 스웨덴 황태자게에게 쓴 선심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고려청자와 금귀고리 한 쌍을 선물한 것인데 남의 땅에서 발견된 유물들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꾸며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3년 뒤 1929년에는 남쪽의 고분을 영국의 귀족인 퍼시벌 데이비드 경이 서봉총 이야기를 듣고 발굴하게 되었는데 그제 귀고리 2개, 팔찌 4개, 반지 5개, 유리구슬 등만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발굴에서 유물과 관련되어 10년이 지난 1936년 6월 29일 백성들을 공분을 사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라 금관을 쓴 평양의 명기 차릉파의 사진이 시중에 널리 퍼졌다. 평양 부립 박물관 당국이 국보인 금관을 기생에게 씌워 사진 촬영을 한 일이 점차 큰 파문을 일고 있다.”

당시 기생 차릉파가 신라금관을 착용해 논란이 되었다.


어찌하여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기사가 실리기 9개월 전인 1935년 9월 평양박물관은 조선총독부 경성박물관으로부터 대여 받은 서봉총 출토 금제 유물들을 전시합니다. 서봉총 발굴에 참여한 고이즈미는 이 때 평양 박물관장으로 있었습니다. 전시회가 끝나고 서울로 돌아가기 전날 친구들과 함께 술자리를 가졌고 이 자리에 기생도 함께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발굴한 금관이라며 이것을 여자에게 씌우고 사진을 찍어 나중에 발행되는 책에 넣으려고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합석한 기생들 중 모델을 뽑았는데 그 기생이 바로 평양에서 이름난 미인인 차릉파라는 기생이었습니다. 그렇게 모델이 된 차릉파는 다음 날 박물관으로 갔고 고이즈미를 비롯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금제 허리띠와 금목걸이, 금귀고리, 그리고 금관까지 착용한 채 카메라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고이즈미는 이 장면을 사진으로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기생이 왕후공주가 되었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등의 농담을 합니다. 이것은 1500년 전 신라의 왕족의 장식을 기생에게 씌워 역사적인 모독을 한 것입니다. 이 사진은 평양 시내에 떠돌게 되고 9개월 뒤에 신문에 보도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고이즈미는 박물관장직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이 금관이 발견된 서봉총은 신라 왕비와 아들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잇습니다. 따라서 최고지배층의 여성은 금관을 착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다만 금관의 1kg이 넘고 두께도 1밀리미터도 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착용했을 경우 금관이 달린 여러 장식들이 그 무게들을 견디지 못하고 휘기 때문에 일상에서 쓰는 것은 아닐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 장례나 제사 등에서 의식을 치를 때 사용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또한 고분에서 발견된 금관은 머리에 쓴 게 아니라 가면처럼 얼굴을 덮고 있었다고 합니다. 일종의 데드마스크인 셈입니다.
 그럼에도 드는 의문점은 정말 무덤에 넣는 부장품이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무게가 1.26kg으로 가볍지는 않지만 군인들이 쓰는 방탄헬멧이 1.4kg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못쓸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부장품이라 하기에는 너무 화려한 장식은 혹여 실생활에 쓰였다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을까요. 하지만 이 금관이 여성이 주인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라든가 소년의 무덤에서 발견되는 것 보면 부장품을 목적으로 제작되었을 것에 무게가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는데요. 아마 실생활에서 쓰였다면 절대자인 지배자에게만 허락되는 장식품이었을 텐데 따라서 부장품이 가능성이 커보입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금관은 고구려 1점, 가야 2점, 신라 7점 등 모두 10점이라고 하는데 전세계적으로 고대에 만들어진 금관이 100여 점이라고 합니다. 비교적 적지 않은 수가 우리나라에서 발견되고 있는 것입니다. 지배자에게만 허락한 금관, 이러한 신라의 금관은 사슴뿔과 나무를 형상화해서 학계의 주목을 받아왔습니다. 사슴뿔은 계속 자라나므로 무한한 생명력을, 그리고 나무는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것으로 솟대에서 그 의미를 확인한 바 있습니다. 이러한 모양의 금관은 흑해연안의 고분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 발견된다고 하는데요. 신라의 금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고대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마 서봉총에서 발견된 금관도 많은 수수께끼를 품고 있겠죠. 그리고 그 수수께끼의 푸는 날, 우리가 어렴풋이 짐작만 했던 신라의 교역로도 확실하게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는 어렵게 발굴한 문화재를 소중히 하며 더불어 일본인 학자가 신라 금관에 행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문화유산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의 문화유산에도 함부로 하는 실수를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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