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륵보살 반가사유상에 대하여

2022. 7. 7. 16:47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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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그런데 광륭사의 미륵상에는 실로 완성된 인간실존의 최고 이념이 남김없이 표현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지상에 있는 모든 시간적인 것, 속박을 초월해서 도달한 인간 존재의 가장 청정한, 가장 원만한, 가장 영원한 모습의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오늘까지 몇 십 년 동안의 철학자로서의 생애 중에서 이만큼 인간실존의 진정으로 평화스런 모습을 구현한 예술품을 이제까지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 불상은 우리들 인간이 지닌 마음의 영원한 평화의 이상을 진실로 남김없이 최고도로 표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은 광륭사에 있는 미륵상을 보고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가 남긴 글입니다. 그러면 광륭사란 어디에 있는 절인가. 그것은 일본에 있는 절로 이렇게 독일의 철학자가 극찬한 광륭사의 미륵상과 닮은 문화재가 한반도에 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나라에서 국보로 지정된 금동 반가사유상입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금동반가사유상은 국보 제 83호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왼다리는 땅에 붙인 채 오른 다리는 자연스럽게 왼다리 위에 올려놓아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왼손으로 오른 다리를 잡고 왼 팔은 다리를 받침대 삼아 손은 자연스럽게 얼굴에 가져다 댄 모습으로 흔히들 사유상이라고 합니다. 이 불상의 얼굴은 미소를 띤 듯 띠지 않은 듯 오묘한 입꼬리를 머금으며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으로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누군가는 이러한 모습을 보며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을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은 고뇌에 찬 사람의 모습이라면 금동반가사유상은 통달한 모습에 가깝습니다. 
반가사유상이라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와 같은 자세로 깊은 생각에 잠긴 모습을 표현한 보살상(菩薩像)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모습은 부처가 깨달음을 얻기 전 태자시절 인생무상을 느끼며 생각하는 모습에서 유래했습니다. 당시 인도북부의 고대국가 카필라국의 태자인 싯다르타는 12세가 되어 행차하게 되었는데 땀 흘리며 힘겨워하는 농부들, 채찍에 맞아 고통스러워하는 소와 서로 잡아먹고 먹히는 동물들을 보았습니다. 즉, 생로병사와 약육강식에 대해 충격을 받은 것인데요. 이러한 모습들을 본 싯다르타는 출가를 하게 되었고 이러한 모습을 담은 것이 사유상이라고 합니다. 한편 사유상을 미륵불과 관련하여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라고 부릅니다.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6세기에서 7세기 약 100년 동안 집중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반가사유상의 탄생지는 인도 간다라 지역(현재의 파키스탄)으로 보고 있으며 5세기경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고 늦어도 6세기 후반 우리나라에 전래되고 7세기 초반 일본에도 전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전 세계에 이러한 반가사유상은 70여 점 정도 전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반가사유상의 자세는 실생활에서 자주 하는 자세는 아닙니다. 반만 가부좌를 틀어 한 쪽 손을 얼굴을 가져단 댄 자세를 표현하는 것은 보기와는 달리 어려운 자세입니다. 우리나라에 금동반가사유상 외에도 반가사유상이 더러 전해지지만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에서는 다른 반가사유상에서 보이는 불편함이 보이지 않습니다. 되게 안정적인 작품이라는 것이죠. 그와 더불어 사실적인 표현과 부분에서 느껴지는 입체감과 섬세함을 느낄 수 있느데요. 여기에 해탈을 품은 듯한 미소는 보는 이에게 불교미술의 극치를 선사합니다. 

일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

  국보 83호 반가사유상은 1912년 이왕가 박물관이 일본인 골동품상 카지야마 요스히데로부터 2600원을 주고 구입한 보물이라고 합니다. 구입 당시에는 지금처럼 말끔한 모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반가사유상 표면에 두꺼운 호분이 칠해져 있었고 얼굴에는 수염과 처진 눈꼬리가 그려져 있었고 입술을 빨갛게 칠해져 있었습니다. 이 반가사유상에도 일제를 거치면서 슬픈 역사를 같이 한 것입니다. 약탈한 문화재를 돈 주고 사와야 했던 것도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장난감인 양 훼손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83호 금동미륵반가사유상은 이왕가미술관에서 소장했다가 광복 후에는 국립박물관으로 그 소유가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이렇게 복잡한 여정을 하는 동안에도 반가사유상이 가지고 있는 고뇌와 기품이 어우러진 미소는 여전히 잃지 않았습니다. 다만 일본이 도굴한 문화재이기에 이 반가사유상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경주의 신라에서 만들어졌다고 생각되기는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데요. 다만 제 83호가 신라에서 만들어졌다고 보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와 비슷한 양식의 반가사유상이 경북 봉화 북지리에서 출토된 바 있으며 증언과 화랑도와 연결지어 그렇게 본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예술적으로 정점을 찍고 있던 백제에서 제작되었다는 설과 함께 백제가 신라에 멸망당한 후 백제의 예술가가 신라에 편입된 상황에서 제작되었다는 통일신라설도 존재합니다. 
 이런 국보 제 83호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 비슷한 게 몇 개 있는데 일본에는 국보 제 1호로 지정되어 있는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있습니다. 과연 어떤 것이 먼저일까요. 일본 목조 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고류사의 창건자로 알려진 신라계 도왜인인 진하승이 쇼토쿠 태자가 세상을 떠나자 그를 애도하기 위해 신라 장인을 부르게 됩니다. 그리하여 만든 것이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신라의 적송을 사용하여 제작을 하였습니다. 일본의 고대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紀)』에 “623년 신라의 사신이 불상과 금탑 등을 가져와 불상을 하테데라(秦寺·고류지의 다른 이름)에 안치했다”는 내용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 서기』에 나오는 불상이 고류사에 있는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인지는 확실하지는 않는습니다. 또한 적송이 일본에 많지는 않지만 있다는 점은 한반도에서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건너왔다고 단정하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당시 문화를 주고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일본이 독자적으로 이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만들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이에 더불어 어느 일본학자는 당시 나라시대 일본에서는 적송을 불상으로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 불상의 한반도에 관련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어떤 식으로든 일본 목조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 놓인 2개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왼쪽이 6세기 후반, 오른쪽은 7세기 전반 만들어졌다.

'이 상(像)은 일본 교토(京都) 코류지(廣隆寺)에 있는 목조상과 상당히 흡사하다'(This statue has remarkable similarities with a wooden statue(125cm tall) at the Koryuji in Kyoto, Japan)’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이런 문구를 적어서 논란을 만듭니다. 이것은 국보83호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이렇게 보면 마치 외국인들 입장에서는 일본의 문화가 한반도로 전파되었다는 의상을 심어줄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혹은 우리가 일본문화를 베꼈다는 이야기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은 당시 국보 제1호 교체 움직임이 있을 때 훈민정음과 더불어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재입니다.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전시될 적에는 우리나라의 반가사유상이 전시되는 것에 찬성과 반대 의견이 부딪히기도 했는데 그 맥락은 하나죠. 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가지는 가치가 높기 때문입니다. 잦은 해외반출에 따른 우려와 훌륭한 한국문화재를 알리자는 의견이 충돌한 것입니다. 어쩌면 두 의견 다 우리 문화가 소중하지만 외국사람들에게 알려줘야 한다는 방법론에서 나온 차이였을 뿐이었습니다. 결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측에서 청와대에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은 후에야 국보 83호는 뉴욕으로 나들이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가치가 높은 문화재에 오해의 소지가 있는 설명을 달아 혼란을 야기시켜서는 안되겠죠.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을 잘 관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와 함께 진실한 역사를 알리고 잘못된 정보는 바로 잡는 것도 병행되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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