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은 왜 첨성대를 만들었나.

2022. 7. 9. 10:14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728x90

첨성대

왕의 이미지를 그려보면 근엄하고 수염이 나있는 남성의 당당한 모습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왕조들의 통치자들 중에 남자만 있던 것은 아닙니다. 바로 고대왕국 신라에서 여자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바로 선덕여왕, 진덕여왕, 진성여왕이 그들입니다. 선덕여왕은 진평왕과 마야부인사이에서 태어났습니다. 진평왕에게는 아들 없이 딸만 둘이 있었고 그들이 천명공주와 덕만공주였습니다. 이전까지 신라도 남자만 왕위에 올랐는데 어찌하여 여자가 왕이 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신라만이 가지고 있던 폐쇄적인 신분제도가 한몫했습니다. 당시 신라의 왕은 성골만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진평왕의 뒤를 이을 성골로는 덕만공주와 진평왕의 동생인 국반 갈문왕의 딸이자 후에 진덕여왕이 되는 승만공주만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르게 된 선덕여왕, 그가 왕위에 올랐던 동안에 신라는 평온했을까요. 사실 선덕여왕의 치세동안 신라는 평안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선덕여왕 재위 시절 고구려와 백제의 협공으로 당항성도 내주게 되어 당나라와의 통로가 막혔으며 당나라에서도 여자가 왕을 하면 안된다는 식의 뉘앙스를 풍겨 선덕여왕의 입지는 불안했습니다.
그럼에도 선덕여왕을 돋보이게 했던 것은 그의 영특함을 알려주는 세 가지일화일 것입니다. 첫 번째는 바로 당 태종이 모란 그림과 씨앗을 보내왔을 때 꽃이 향기가 없을 거란 예측한 이야기, 두 번째는 한 겨울에 영묘사 옥문지의 개구리가 울었을 때 백제 군사가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내어 물리치게 한 일, 그리고 세 번째는 자신의 안식처를 예견한 것으로 도리천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멸망한 가야의 귀족 김유신과 선덕여왕이 왕에 오를 당시 강력한 경쟁자였던 김용춘의 아들 김춘추를 등용하여 선덕여왕은 삼국통일의 기틀을 놓았다고 평가받았으며 즉위 2년째에는 여러 주와 군의 조세를 1년치를 면제해 여자 왕으로서 민심을 얻기 위한 행보도 보였습니다. 하지만 선덕여왕 11년인 642년에 중요한 거점인 대야성을 포함하여 40여 성을 함락당했는데 1년 뒤에는 높이 80미터에 달하는 황룡사 9층목탑을 만들어 표면적으로는 현실을 벗어난 정책을 벌입니다. 이 공사의 책임자는 백제인 아비지였는데 신라의 국고를 바닥나게 하려는 백제의 계책이 아니냐는 해석도 나옵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불안한 형국인 상황에서 상대등 비담의 쿠데타가 진행되던 중 선덕여왕은 사망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반군에 의한 피사설, 자연사설, 반란에 대한 충격으로 인한 쇼크사설이 있지만 사인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습니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는 성공했다고 단언할 수 없는 게 선덕여왕이지만 이 시기에 문화적으로 큰 족적을 남긴 게 사실입니다.

예전에는 첨성대에 사람들의 접근이 가능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첨성대입니다. 첨성대는 높이가 9m17cm이며, 바탕의 지름은 5m17cm이고, 상층부의 지름은 2m50cm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습니다.그런데 이 첨성대에 대해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았으며 『삼국유사』를 쓴 일연도 ‘선덕여왕이 첨성대를 세웠다.’는 기록만 남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세기말의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첨성대는 “위는 네모나고 아래는 둥글며, 속이 비어있어 그 속으로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물었다(以候天文)”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동사강목』을 지은 안정복이 ‘천문을 살피고 요망스러운 기운을 살피기 위해 지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천 년이 넘는 시간은 견뎌온 거대한 석조건축물에 대해서 선조들의 설명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그러면서 과연 첨성대가 과연 별을 바라보는 첨성대이냐 아니면 제단이었느냐 라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럼 첨성대에서 사용된 관측기구라던가 그 관측기구를 통해 무엇을 관측했는지 유물과 기록이 더 필요한데 그렇지 않아서 역사가들의 해석이 갈리고 있습니다.
천문대라고 보는 입장은 <증보문헌비고>에 나타난 고대국가의 해와 달, 별의 변화를 기록한 것을 보면 신라 쪽의 숫자가 고구려나 백제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데 따라서 신라에는 천문대가 있었고 첨성대가 그 역할을 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반면 삼국유사를 보면 경덕왕이 소생에 없어 아이들을 낳아 대를 잇게 해달라고 표훈을 2,3차례 천계에 올려 보내 호소한 기록이 있다면서 첨성대는 하늘과 대화를 하고 점을 치는 곳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겁니다. 또한 첨성대가 건축되었을 당시 고구려 백제와의 전쟁으로 국가적으로 힘든 시기였기 때문에 천문관측과 제단을 겸한 장소였을 것이라고 보는 입장도 있습니다.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는 첨성대 우표

한편 고려에서는 송도에 천문대를 두어 항해하는 배를 지도했을 것이라면서 신라의 입장에서도 해상활동을 위해 첨성대를 세웠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경주의 노인들은 첨성대를 비두(比斗)라고도 부르는데 북두칠성에 다른 별을 비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항해하는 배의 길잡이가 북극성과 북두칠성인 만큼 고대항해술의 발달에 점성술은 중요한 것이었고 일본 고대문헌기록으로 보았을 때 신라의 해상활동이 활발했다고 밝히므로 첨성대는 신라의 해상활동에 도움을 준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농경사회였던 당시 첨성대가 달력으로서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보고 있습니다. 사방에서 어디서 보든지 똑같은 모양은 계절과 태양의 위치가 바뀌어도 해그림자를 측정하여 시각을 정확하게 잴 수 있을 뿐 아니라 정남방에 뚫린 창문은 춘분과 추분에 태양이 올 때 햇빛이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도록 하고 있으며 하지와 동지에는 창문의 하부에서 광선이 완전히 없어지도록 한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창 아래위가 각각 12단인 것은 1년 12개월, 사용된 돌의 개수가 360여 개에 달하는 것은 1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냐는 것입니다. 특히 첨성대의 윗부분은 우물 정(井)자를 의미하므로 때에 맞춰 비가 오길 바라는 신라인들의 염원과 때에 맞춰 농사를 짓는 실용적인 모습이 결합된 것이라 생각되기도 합니다. 한편 정자석을 빼면 27단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는 선덕여왕의 27대 임금임을 나타낸다는 해석도 달립니다. 따라서 신라 27대왕 선덕여왕은 첨성대를 통해 하늘을 뜻을 헤아려 백성들의 마음을 잘 다스리려고 했을 것이며 동시에 첨성대를 통해 자신의 통치권을 내부적으로 과시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경주를 지켜온 첨성대,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접착제를 쓰지 않고 무거운 돌을 쌓아 만든 조형물의 경우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데 1300년이 지나도 첨성대가 그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바로 12단까지 채워 넣은 진흙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동해안에 진원지를 둔 크고 작은 지진에도 견뎌온 첨성대는 그 외모마저 특이한 형태를 띄고 있는습니다. 마치 음료수병을 연상케 하는 첨성대의 곡선형태의 모양은 세계 문화유산 중에서도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이러한 모양이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는 안정감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단지 남쪽을 가리키기 위해 낸 창문도 이러한 안정성에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첨성대의 반곡선적인 모양 때문에 윗부분은 내부로 축소되려는 경향이 생기고 아랫부분은 외부에 팽창하는 경향에 저항하는 힘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힘이 중심에 접근할수록 작아져 창문위치에 이르러 최소화되고 창문이 첨성대의 전체적인 안정성에 큰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첨성대를 지은 건 현재로서는 선덕여왕의 치적이지만 당시에는 지나친 국책사업은 아니었을까.

첨성대를 두고 학자들은 천문대냐, 제단이냐 아니면 개인적인 권위를 위한 건축물이냐며 여러 해석을 내놓고 있습니다. 또한 혼란하고 치열했던 당시 상황에서 첨성대라는 건축물이 나온 건 선덕여왕이 업적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민심을 외면한 지나친 국가사업이라고 봐야하는지 그건 개인의 생각에 맡겨야 하겠지요. 따라서 첨성대의 기능에 대해서도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