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황금보검은 어디서 왔을까
2022. 7. 3. 16:33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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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추왕릉지구의 계림로 14호분에서 출토된 길이 36cm의 황금장식보검은 이국적인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인 모양과는 사뭇 다르기 때문에 해외에서 유입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황금보검은 반타원형의 칼자루에 끝이 넓은 칼집 그리고 금알갱이와 옥으로 상감한 이 보검은 우리나라는 물론 동아시아에서도 유일무이한 것이라고 합니다. 양식기법이나 나선무늬와 메달무늬 등으로 보이는 전형적인 그리스로마무늬는 이 보검의 출처가 로마나 혹은 그 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곳에서 전달받은 곳으로 추측하게 합니다.
그럼 이러한 보검이 어찌되어 신라에서 발견되었을까. 일본학자 요시미즈 쓰네오는 이 보검의 제작지를 로마문화와 밀접한 곳으로 연결시켜 일찍부터 그리스·로마 문화를 받아들인 다뉴브강 남부 트라키아 지방의 켈트족이 만든 복머을 신라로 들어온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즉, 켈트의 지배자가 사신을 보내어 직접 신라에 이 보검을 전달했거나 혹은 신라의 사절이 해당 지역으로 가서 직접 받아왔다는 것입니다. 실크로드를 통하여 상인들이 이 물건을 전달하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러기에는 그 보검의 가치가 뛰어납니다. 보따리장수가 가방에 넣고 다니다가 신라의 지배자가 건네주기에는 상급 의례용 보검이라는 것이죠.
대충 봐도 한반도 밖에서 제작되었을 것 같은 이 황금보검을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의외의 문양이 발견되어 깜짝 놀라곤 합니다. 그것은 바로 태극무늬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의 문양과 100%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분명 태극무늬가 있습니다. 세 개의 태극무늬가 있으며 더욱 특이한 것은 이러한 태극무늬 안에 꽃봉오리 모양이 장식이 들어있다는 점입니다. 보통 태극무늬 안에는 어떠한 무늬도 넣지 않지만 황금보검 안에서는 보입니다.
태극무늬는 국내 역사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신라 미추왕의 경주 고분에서 출토된 곡옥에서 보입니다. 또한 고려시대 법종에도 그 무늬가 보이고 있으며 청나라 사신 아극돈(阿克敦)이 1724년 영조 때 그린 ‘봉사도(奉使圖)’ 화첩 가운데 조선 여행 중 묵었던 숙소 부근에 걸린 깃발이 태극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청색과 홍색의 태극문양이 뚜렷하게 그려져 있고, 상단과 하단에 2괘가 표시되어 있었으니 우리나라가 현재 사용하는 태극기의 모습이 이미 500여 년 전에도 쓰였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의 태극무늬는 우리 조상들이 태극무늬를 사용한 이래 꽤나 이른 시기의 것입니다. 사실 태극무늬의 사용에 대해서도 파면 팔수록 미궁에 빠집니다. 중국 송나라의 주돈이의 태극도설에서 그 문양의 기원을 찾지만 사실 그 이전에도 우리 선조들이 돌과 거울 등에 사용하였으며 태극무늬가 들어간 황금보검 역시 송나라보다 훨씬 앞선 시대의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 선조가 태극 무늬의 원조라고 하기에도 애매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태극무늬와 유사한 문양이 세계 곳곳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바꾸어 이야기한다면 태극무늬가 신라 황금보검이 신라의 요청으로 태극무늬를 넣어 특별 제작한 것인지 아니면 이 보검을 만든 장인이 태극무늬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문양을 이 보검에 장식한 것인지 또한 속단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요시미즈 츠네오 교수는 황금보검에 장식된 태극무늬를 켈트식태극무늬로 보면서 태극무늬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장인에게 요청하여 무늬가 들어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이 황금보검은 켈트의 지배자와 관련 있다고 본 것입니다.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된 것 중에 이색적인 유물은 황금보검 외에도 하나 더 있는데요. 그것은 바로 금제 사자 머리 형상 띠고리입니다. 이 장식에는 돌기장식이 있는데 이러한 양식은 그리스로마의 사자머리에만 있다고 합니다. 기원전 4세기에서 서기 5세기경에 걸쳐 유행한 양식이라고 하는데요. 이 보검이 발견된 계림로 14호분은 6세기 초반 무렵 신라시대 적석목곽분으로 밝혀졌으므로 이 황금보검의 제작 연대도 5세기 쯤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장식을 가진 유물이 고구려나 백제, 중국이 아닌 오직 신라에서만 발견된다는 점은 더욱 의아하게 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 유물이 오직 신라를 위해 만들어졌다라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합니다. 또한 요시미츠 츠네오가 쓴 『신라가 꽃피운 로마문화』라는 책에서는 신라고분에서 출토된 유물과 그리스 로마시대의 유물을 비교하였습니다. 로만 유리가 4~6세기 신라에서 집중 출토된다며 이에 더해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장신구들이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유행했던 디자인과 세공기법이 매우 닮아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한편 이 황금보검은 4~5세기에 그리스, 로마, 이집트, 서아시아에서 유행한 장식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황금보검의 장식의 기원지는 동유럽의 트라키아지역으로 보고 있다고 위에서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럼 5세기의 트라키아 지역, 그 때 그곳의 주인은 누구였을까요. 당시 유럽은 혼돈에 휩싸였습니다. 훈족이 유럽으로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일부에서는 훈족을 흉노족과 연결시키기도 하지만 둘이 같은 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럼 훈족이란 것은 무엇일까. 중국의 한나라는 북쪽의 흉노하고 대치하고 있었고 일방적으로 밀리는 관계였다고 합니다. 한나라는 그들을 달래기 위해 2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조공품과 공녀를 바쳤습니다. 그러다가 흉노가 북흉노와 남흉노로 분열되면서 세력이 약해지므로 한무제 대에 들어서야 이들을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영향 아래 들어가길 거부했던 북흉노는 서쪽으로 이동하더니 어느 샌가 중국의 기록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200여 년이 지난 후에 서기 350년 정도에 동유럽에 훈족이라고 불리는 자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들은 게르만족 변경에 쳐들어왔고 그들은 강력한 화살과 기마 부대로 유럽을 유린했습니다. 유럽사람들은 훈족을 ‘신의 저주’라 했으니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던 서기 453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정벌하던 아틸라가 사망하면서 세력이 약해졌고 훈족의 기마술과 강력한 무기에 영향을 받은 게르만족이 로마로 넘어오니 비로소 서양은 중세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사실 ‘훈’이라는 이름의 기원은 흉노이지만 훈족이라는 것이 흉노에서 내려온 핏줄이라기보다는 흉노가 이루어놓은 문화유산을 토대로 발전한 나라 혹은 집단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흉노와 훈족을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혈연이라기보다는 그들의 무기와 황금 즉, 문화입니다. 흉노가 애초에 유목민족이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다양한 사회와 교류했을 것입니다. 로마교황청의 사신이자 역사가이던 프리스쿠스가 훈족의 지배자 아틸라를 보고 그를 몽골계통이라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훈족에게는 몽골인 뿐만 아니라 다양한 유목집단이 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흉노와 훈족 사이에 어느 정도 관련이 있지만 흉노가 곧 훈족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당시 유럽사회를 강탄한 훈족집단이 어떠한 경로로든 신라와 연관을 맺고 흉노의 이동경로를 통해 황금보검이 들어왔을 수 있습니다.
한편 훈족하고 한국인하고 연관지으려는 연구도 있었습니다. 독일의 베레트와 슈미트 박사는 훈족의 이동경로에서 동복 즉, 청동솥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가야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점, 그리고 훈족은 이러한 동복을 말 등에 싣고 다녔는데 이를 묘사한 기마인물상이 신라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그리고 동복의 문양을 한국의 머리장식에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습니다. 이 외에도 유럽인들이 사용하지 않는 훈족의 활이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의 벽화에 그려져 있다는 점과 훈족과 관련된 무덤에서 발굴된 머리가 가야인들이 했던 편두가 나타난다는 점, 그리고 신라에서 보이는 적석목관분이 북방기마민족의 대표적인 무덤이라는 것은 우리나라 선조들이 북방기마민족 혹은 훈족과 관련이 있음을 시사합니다. 훈족과 신라 사이에 문화적으로 유사성이 보이는 가운데 계림로 14호분에서 발견된 황금보검은 이들 간에 교류가 있었음을 짐작해 보는데요. 하지만 여전히 이 황금보검만으로 신라와 흉노 혹은 훈족 간에 어떻게 직접적인 관계를 맺었는지 그 이상을 유추해 볼 수는 없으니 황금보검은 이색적인 모양만큼이나 한국고대사의 물음표를 간직한 유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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