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도 소송은 빈번했다
2023. 5. 15. 21:5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728x90
대한민국은 소송공화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09년도에 우리나라 법원에서 처리한 민사사건이 400만 건이 넘었다고 하니 인구수기준으로 보면 유럽보다도 훨씬 많다고 합니다. 그럼 옛날에는 어땠을까.
과거에는 형법만 있고 민법이 없다는 것이 통념입니다. 그리하여 소송이 별로 없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물론 조선정부에서는 소송이 많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조선은 유교사회였고 공자 또한 소송이 없는 ‘무송(無訟)’의 경지, 예(禮)로 다스려져서 형벌과 다툼이 필요 없는 사회를 가장 이상적인 정치로 간주하였으니 조선의 유학자들도 이를 따르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이 곧 그러한 사회풍토를 완성시킨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령 조선시대 각 고을을 다스리는 지방관들이 중점적으로 지켜야할 업무로 7가지가 있었는데 이를 수령 7사라고 합니다. 그 중에는 소송을 줄이도록 하는 ‘사송간’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시대에는 수령이 처리한 소송을 적을수록 잘 다스린다고 보았습니다. 이와 더불어 소송장을 내는 시기도 제한하기도 했습니다. 즉, 춘분 후부터 추분 전까지는 형사사건이나 도망 노비 문제 등 중대 사안이 아닌 잡송(雜訟)은 소송을 수리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이 시기는 농번기로 소송의 범람으로 백성들의 농사일을 망치는 것을 막고자 함이었고 무분별한 소송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조항은 『경국대전』 형전의 ‘정송’조항에도 실려 있습니다.
이와 더불어 조선시대 양반들은 향약이라는 것은 운영해 왔습니다. 이를 통해 사회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하려 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비리호송(非理好訟)’을 지목하여 처벌하기도 했는데요. 비리호송이란 가까운 친인척 사이의 분쟁 혹은 양반들의 조정의견을 무시하고 함부로 관에 소송을 제기하는 행위에 대해 쓸데없는 송사를 일삼는다라는 뜻입니다.
한편 중국사 연구자인 일본교토대학의 후마 스스무 교수는 조선과 같은 시기에 존재한 명, 청 사회는 소송이 매우 활발했던 사회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층을 막론하고 소송이 빈번하였고 소송억제라는 장치를 마련했지만 보통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관아에 소송을 제기한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지방관들이 처리한 1년 동안 소송문서를 분석한 결과 약 만 여 건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럼 조선사회는 어떠했을까. 1838년 (헌종 4) 전라도 영암군수가 7월 한 달 동안 처리한 백성들이 올린 소장, 즉 민장을 모아놓은 『영암군소지등서책』에서는 한 달 동안 모두 187건의 소장이 접수되었습니다. 하루에 최소 6건의 소송을 처리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시 사람들은 소송을 거는 것에 대해 주저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피고가 소재한 고을에 소장을 제출합니다. 그리고 재판에 필요한 증거 수집 및 변론의 책임이 소장을 제기한 당사자에게 있었습니다. 더욱이 소장을 제출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원고 자신이 직접 피고를 데려와야 재판이 진행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직접 증거를 수집해야 함을 이를 통해 재판관을 설득하고 게다가 원고가 상민이고 피고가 양반일 경우 피고를 데려와야 하는 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럼 이 때 재판관은 지방관인 수령이 됩니다. 하지만 판결이 내려지더라도 이에 대해 불복할 수 있습니다. 즉 상급기관에 제소할 수 있었는데 이를 제도적으로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판결이 억울하다고 생각되는 경우에는 관찰사에게 호소하고 여기서도 해결이 나지 않으면 중앙기관인 사헌부에 항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신문고를 치거나 조선 후기에는 상언이나 격쟁의 방식으로 국왕에게 직접 호소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행된 당시 민사판결문에는 소송의 내용, 원고와 피고의 진술, 제출된 증거문서와 최종 판결 등 소송의 진행 상황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재판관을 맡은 수령 입장에서는 실무용 소송법서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경기도 안산군수를 지낸 김백간(金伯幹)이란 인물이 편찬한 『사송유취(詞訟類聚)』라는 책이 조선전기에 나왔습니다. 그의 아들 김태정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간행한 이 서적은 후대에도 많이 활용되었고 증보판도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 『청송제강(聽訟提綱)』, 『사송유초(詞訟類抄)』, 『대전사송유취(大典詞訟類聚)』, 『상피(相避)』 등의 실무용 법서가 만들어졌습니다.
조선후기에 가면 조선변호사가 등장합니다. 동학혁명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1년 뒤인 1895년 4월 29일 반포된 법부령 제3호 민형소송규정에서 합법적인 소송대리인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1970년에 국회도서관이 펴낸 <한말 근대 법령자료집> 제1권에 수록된 민형소송규정 제3조는 "소송인은 자기가 하믈 득(得)지 못하난 경우에난 재판소의 허가랄 득한 후 기(其) 소송을 대인(代人)에게 위탁하난 사(事)랄 부(付)하미 득(得)홈"이라고 규정했습니다. 이렇게 제3조는 자기가 직접 소송할 수 없는 경우에는 재판소의 허가를 얻은 후에 그 소송을 위탁하는 일을 대인에게 부여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 뒤, 단서에서 "단, 대인에게는 위임장을 교부하미 가(可)홈"이라고 규정했습니다. 대인은 완전한 의미의 변호사는 아니었고 변호사로 볼 수도 있고 법무사로 볼 수도 있었습니다. 글기ㅗ 현대적 의미의 변호사 제도는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이 있었던 1905년부터 시행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관련된 드라마가 있다손 하더라도 외지부가 등장한 시기는 조선후기 그것도 대한제국이 수립되기 불과 1~2년 전인 것입니다. 외지부라는 명칭은 1405년 (태종 5년)의 기록에 볼 수 있습니다. 노비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는 도관(都官)에서 재판을 맡은 관리가 지부(知部)라는 명칭으로 불렸습니다. 그리고 이 때 지부는 노비 소송의 법관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법관처럼 법률을 다루는 일을 바깥에서 한다고 해서 외지부라는 용어가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외지부는 현대의 변호사와 차이가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외지부는 각종 소송을 사주하고 권장하여 이익을 얻으려는 존재였다고 하며 이들은 소송의 사주에 그치지 않고 소장을 대신 작성하거나 심지어 증거문서의 위조까지도 감행하였다고 합니다. 소송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 중앙 법사(法司)의 관속 혹은 지방 관아의 서리들과 접촉하는 경우도 있었으며 "의뢰인의 부탁으로 소송을 대신하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선전기에는 되도록 소송을 하지 않도록 하는 사회풍토였다고 했잖아요. 그래서인지 『경국대전』 「형전」에 따르면, 다른 사람을 부추겨 소송을 하도록 하면 장형 100대와 도형(徒刑) 3년에 처해졌으며 곤장 100대와 노동형 3년을 선고받게 되면, 노동형을 받기 전에 곤장 100대만 맞고도 죽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업무는 목숨을 담보로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1895년이 되어서야 소송대리가 허용되었습니다. 형전의 또 다른 조문은 "사족(士族)의 부녀에게는 아들·손자·사위·조카·노비 중에서 대신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고 하였습니다. 집밖 외출이아 인적사항이 노출이 제약된 사대부 여성의 경우 소송 대리가 예외적으로 허용된 것인데 이 점을 이용하여 사대부 가문의 소송을 이 집안 여성의 이름으로 수행하고 이들의 조카나 노비로 위장하면 외지부가 소송대리를 하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리하여 노비가 꽤나 많은 집안에서는 주인집의 법률 사무를 처리하는 노비들도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기업법무팀 직원과 유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타인의 소송대리는 원칙상 금지된 행위이므로 조선시대 동안 외지부는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한편 당시 관청에 근무했던 하급서리의 상당수는 공노비들이었는데 고대왕조들은 이들에게까지 녹봉을 줄 여력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무보수로 일을 해야 했는데 이들은 비번을 이용하거나 직무를 이용하여 뇌물을 챙겼습니다. 따라서 옛날 관청의 문지기들은 민원인들에게 손을 내밀며 돈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저런 제약은 있었지만 조선은 신분에 관계없이 억울한 자라면 누구다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사회였고 1858년 (철종 10년) 충청도 한 마을의 소송 기록은 평민의 소송건수는 87.2%에 이르렀습니다.
728x90
'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 > 조선후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전통수학과 조선시대 수학자들 (2) | 2023.06.01 |
---|---|
조선인이 된 최초 서양인 박연 (0) | 2023.05.30 |
조선시대 초등교육기관 서당 (0) | 2023.05.08 |
다산 정약용 (0) | 2023.05.05 |
조선시대 수사노트 흠흠신서 (0) | 2023.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