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

2023. 5. 5. 08:26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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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을 사랑하는 근본은 아껴 쓰는 데 있고, 아껴 쓰는 근본은 검소하게 말하는 데 있다. 검소한 연후에나 능히 청렴할 수 있고, 청렴한 연후에나 능히 자애로울 수 있으니, 검소한 자가 되는 그 자체가 백성을 다스리는 수장의 의무다.' 『목민심서』
이 말은 정약용이 그의 책 『목민심서』를 통해 남긴 말입니다. 검소가 곧 청렴이며 이것이 바로 국가 지도자의 덕목이라고 밝힌 것입니다. 
‘이 편지가 사통오달한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 보더라도 내가 죄를 얻지 않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 만한 편지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 말은 다산 정약용이 유배지에서 아들에게 쓴 편지의 일부로 말과 글을 함에 있어 신중해야 함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미 수백 년 전의 인물 정약용이지만 그의 글들은 현대에도 깊은 울림을 주고 있습니다. 
정약용(丁若鏞)은 1762년 경기도 남양주시 두물머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정3품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丁載遠)이며 어머니는 윤선도의 증손녀이자 윤두서의 손녀입니다. 정약용은 황사영의 장인인 정약현의 이복동생이며,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남긴 정약전과 신유박해로 서소문 밖에서 참수된 정약종의 동복동생입니다. 누이는 이승훈과 결혼하여 남편과 함께 아들, 손자, 증손자까지 4대가 순교했습니다. 정약용의 어머니는 아홉 살 때에 세상을 떠났으나 장약용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아 성장했습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렸으니/멀고 가까움이 다르기 때문이네’
이 시는 어린 시절에 지은 시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시입니다. 정약용은 어린 시절부터 문장능력에 소질을 보였고 10세 이전의 저작을 모아 ‘삼미자집’을 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산은 1789년(정조 13)대과에 급제해 관직에 진출했습니다. 대과 합격증인 홍패를 받던 날 정약용은 “능력이 부족해 온전히 나랏일을 수행하기는 어렵다/ 그래도 공렴을 새기며 정성을 다해 일하겠노라”라는 시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규장각에서 정조의 지우를 받았습니다. 같은 해, 그는 한강에 배를 잇고 그 위에 널빤지를 깔아 주교(배다리)를 만들었습니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의 능을 화성의 융릉으로 옮긴 후, 봄·가을 능행차 때 이 배다리를 통해 한강을 건넜습니다. 배다리는 용산에서 노량진까지 설치된 것입니다. 이후 정조는 수원 화성을 건설하기로 하고 이에 정약용을 긴급 투입합니다. 당시 서양의 과학사상이나 기술에 대한 책들을 가까이하고 있던 정약용에게 임금은 『기기도설(奇器圖說)』이란 책을 내려 보냈고 정약용은 이를 참조해 『기중가도설(起重架圖說)』을 지었습니다. 이에 따라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건을 옮길 수 있는 기구가 만들어졌으니 화성을 쌓은 뒤 정조가 “기중기를 써서 돈 4만냥을 절약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은 33세에 경기 암행어사로 임명되었습니다. 그는 환정과 군정의 폐단 등 농민의 어려운 현실을 목격하고 자세히 보고했습니다. 35세엔 정조의 배려로 규장각 교서(校書)가 돼 그곳에 소장된 책을 섭렵했으며 정약용은 이렇게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지만 그에게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는 세력이 약한 남인이었고 금지된 천주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1797년 정조는 그런 정약용을 보호하기 위해 변방 황해도 곡산도호부사로 내보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1800년에 정조는 승하하였고 정조의 새 할머니인 정순왕후 김씨는 어린 순조 대신 권력을 손에 쥐고 노론 벽파와 손을 잡았으니 남인 세력들은 그들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남인 중 상당수가 천주학을 신봉했고 이 때 천주교와 관련을 맺던 그의 형제들이 참수를 당하거나 유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마흔, 그는 유배길에 올랐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한 번 고난을 겪게 되니 정약용의 조카사위 황사영이 청나라에 보내려던 밀서가 발각된 것입니다. 밀서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황사영이 베이징 교구를 통해 로마 교황청에 전하려고 썼다가 체포되면서 보내지 못한 것으로 배후로 정약용 형제가 지목되어 형인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보내지게 되었습니다. 
1801년, 동짓달에 초라한 모습으로 강진으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그는 ‘천주학을 믿는 죄인’이 되어 아무도 그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천주교를 믿는 사람들이 제사를 안 모시려고 하여 패륜아로 생각하였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눈초리는 매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는 주막집 노파의 뒷방 한 칸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석 달 동안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두문불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 골방을 사의제라 불렀는데 이는 네 가지를 올바로 하는 이가 거처하는 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약용은 이곳에서 1805년 겨울까지 4년간 머물면서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백련사의 학승인 혜장 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정약용은 혜장을 만나러 산길을 따라갔고 혜장은 언제나 차와 따뜻함 마음으로 그를 맞이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만남으로 정약용은 『대둔사지』, 『만덕사지』라는 불교관련 책도 남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1808년에 만덕산의 초당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이 만덕산에 자리하면서 정약용은 다산이라는 호를 붙일 수 있었는데 당시 만덕산은 야생 차밭이 많아 다산(茶山)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그는 이 곳에 다산초당을 마련하였는데 이 곳에서 양반 자제 18명을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바로 ‘다산학단’이라 불리는 학파입니다. 당시 그는 저술활동에 매달렸습니다. 밤낮으로 책을 써서 그의 왼쪽 팔이 마비될 정도였고 영양 상태도 부실하여 학질에 시달렸고 빈혈과 중풍을 달고 살았다고 합니다.  

다산 정약용은 유배를 와 가족들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전했으며 정약용 스스로는 독서를 강조하며 학문에 더욱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저술에 힘을 쏟았으니 유교경전을 해석한 경학, 그리고 국가 경영의 방법을 제시한 경세학을 저술의 방향을 잡았습니다. 경학은 수기였고 경세학은 치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정약용은 육경사서에 대한 연구를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백성들의 삶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학문을 집어치우고 실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그가 살던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전반은 조선이 중세 농경사회에서 근대 상공업 사회를 변하는 시기였습니다. 그리고 정약용이이 주목한 것은 바로 북학사상이었습니다. 그는 중국이 세계의 주심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지구는 둥글고 자전하며 지구상에는 수많은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면서 기술을 천시하는 당시의 유교관념을 비판하였고 그는 거중기, 농기구 등 백성들의 실생활에 접목된 기구들 300여 가지를 개발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저술활동에 매딜린 그는 500여 권에 이르는 책을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그 중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목민심서』가 있으며 이 책은 정약용이 목민관 즉 수령이 백성을 보살피는 목민 정신을 망각하고 그들의 고통을 외면한 채 사익 추구에 급급한 것을 개탄하면서 1818년 이 책을 썼습니다. 이 외에도 『경세유표』, 『흠흠신서』, 『아방강역고』, 『아언각비』, 『마과회통』 등이 그의 손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이후 그의 책은 일제 강점기에 조선의 지식인들에 의해 조명되기 시작하였고 정인보, 안재홍 등은 『여유당전서』간행에 힘을 쏟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저술을 모아 활자본으로 출간하기에 이릅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에 대해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졌으며 2012년에는 유네스코에서 정약용을 세계 기념인물로 선정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책을 펴내는 것은 책의 값어치를 알아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한다는 바람에서 시작되었는데 이제는 그의 책들은 후대인들이 한 번쯤 봐야할 필독서로 자리매김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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