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수사노트 흠흠신서
2023. 5. 4. 08:24ㆍ주먹도끼부터 알아가는 한국사/조선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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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흠신서』란 정약용 저서 가운데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와 함께 1표(表) 2서(書)라고 일컬어지는 대표적 저서입니다.
‘사대부(士大夫)는 어려서부터 머리가 희끗희끗할 때까지 오직 시부(詩賦)나 잡예(雜藝)만 익혔을 뿐이므로 어느 날 갑자기 목민관이 되면 어리둥절하여 손쓸 바를 모른다. 그래서 차라리 간사한 아전에게 맡겨버리고는 감히 알아서 처리하지 못하니, 저 재화(財貨)를 숭상하고 의리를 미천히 여기는 간사한 아전이 어찌 법률에 맞게 형벌을 처리하겠는가.
정약용은 살인 사건의 조사·심리·처형 과정이 매우 형식적이고 무성의하게 진행되는 것은 사건을 다루는 관료 사대부들이 율문(律文)에 밝지 못하고 사실을 올바르게 판단하는 기술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따라 생명존중 사상이 무디어져가는 것을 개탄하였습니다. 무엇보다 수령이 시신을 검시하고 사건을 수사하는 동안 아전들은 백성들의 세간을 약탈하고 무고한 백성을 가두는 등의 비리를 저질렀고 고을을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으니 정약용은 이를 바로잡고 계몽할 필요성을 느껴 책의 집필에 착수한 것이고, 1819년(순조 19)에 완성, 1822년에 편찬되었습니다. 이 책 제목의 의미는 '흠흠欽欽 신중하고 또 신중하라'는 뜻으로 정약용은 서문에 집필의도를 남겼으니 '비참함과 고통으로 울부짖는 백성의 소리를 듣고도 태연하고도 편안할 뿐 아니라, 구제할 줄 모르니 화근이 깊어진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폐단을 바로 잡기 위해 수사노트이자 실무지침서인 『흠흠신서』가 나왔습니다.
이전에도 사건과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담은 책이 있었습니다. 없을 무(無), 원통할 원(寃). 『무원록(無寃錄)』은 이름 그대로 원통함이 없도록 살인사건의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한 검시 지침서라고 할 수 있는데요. 세종은 중국 원나라에서 들여온 '무원록'에 이해하기 쉽게 주석을 붙여 『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으로 펴냅니다. 시간이 흘러 조선 후기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사회의 기강이 무너져 범죄 수법이 다양해졌습니다. 과거의 법의학 지식만으로는 사건 해결이 어렵게 되자 영조와 정조는 『신주무원록』을 조선에 맞게 재편집하고 보강하며 법의학과 형사법 체계를 정립하고자 했습니다. 그리하여 영조는 누적된 다양한 수사 기법을 첨가해 『증수무원록대전(增修無寃錄大全)』을 편찬했습니다. 정조는 한문을 읽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한글판인 언해본을 펴내기도 했습니다. 『무원록』에서는 현대의 과학수사를 연상케 하는 정밀한 수사 방법을 도입했습니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강한 식초와 물을 섞은 '고초액'을 수사에 활용한 것입니다. 칼로 사람을 죽였을 경우, 칼에 묻은 피를 범인이 닦아버리거나 오래 방치하면 핏자국이 발견되지 않습니다. 이때 칼에 고초액을 발라 달구면 혈흔이 나타납니다. 지금으로 치면 루미놀 용액으로 혈흔을 찾아내는 것과 비슷한 방식입니다. 독살감별법으로는 '은비녀법'과 '반계법'이 있습니다. 은비녀법은 독살일 경우 시신의 목구멍이나 항문에 은비녀를 넣었다가 꺼내면 색이 검게 변합니다. 질소나 화합물과 반응하는 은의 성질을 이용해, 질소와 인을 함유한 독극물을 검출하는 셈입니다. 반계법은 시신의 목구멍에 백반을 넣었다가 꺼내 닭에게 먹이는 법으로, 백반을 먹은 닭이 죽으면 독살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정조는 형벌 집행에 의심을 품고, 올바른 판결을 내릴 수 있도록 정약용에게 형법서를 집필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그렇게 탄생된 『흠흠신서』는 백성의 죄를 다스릴 지방관을 위해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올바른 판결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었습니다. 이 책을 지은 정약용은 그가 관리로 있기도 했는데 곡산부사와 형조참의가 되어 죄인들을 다스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당시의 경험으로 백성들과 하급관리들의 잘잘못을 가려야 할 목민관들의 행태를 꼬집으면서 다음과 같은 구조적인 문제를 꼬집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현대에도 “수사와 재판에 관여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읽어야 할 책”이라고 불려지고 있습니다. 『흠흠신서』에는 판례를 수록하였다고 설명하였는데 조선에서는 이전에도 판례를 기록해 책으로 편찬하였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심리록』으로 1775년 12월부터 1800년 6월까지 정조가 직접 심리한 중대 범죄 1,112건에 대한 사건 개요와 처리 과정을 요약했고 이후 『흠흠신서』에서는 조선뿐만 아니라 중국의 모범적인 판례를 수록하였습니다.
그리고 국내의 한 TV프로에서도 『흠흠신서』를 설명하면서 기록된 사건들이 굉장히 많은 과학수사 지침이나 사례가 정리돼 있다며 그 중 하나로 박여인 살인사건을 소개했습니다. 정조 8년 황해도 평산에서 18살 박여인이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사연이 석연치 않아 수사를 했는데 당시 규정에 따르면 검안을 2번 했습니다. 첫 번째 검안 후 두 번째는 전혀 다른 사람이 독립적으로 해서 일치해야 사건이 종료되고 일치하지 않으면 세 번째 삼검을 했습니다. 첫 번째, 두 번째 검안에서는 박여인에게 저항흔이 없어 시집살이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으로 사건이 종료됐지만 박여인의 친정 오빠가 한양에 가서 정조 임금이 행사할 때 징을 치며 억울하다고 호소했습니다. 이에 다시 조사해 보니 박여인에게 상처가 몇 군데 더 있었고 사건은 타살로 바뀌었습니다. 용의자는 시어머니 최아지였고 그에 따라 암행어사를 파견했습니다. 조사 결과 최아지는 내연관계가 있었고 며느리가 알게 되자 살해했습니다. 최아지는 조카와 근친상간을 했습니다. 조정에서 이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고 해서 최아지는 참형을 조카는 교수형을 처했습니다.
정약용이 다룬 사건 중에 10년 넘게 사형이 집행되지 않은 사건도 있었습니다. 평창 군졸 서필홍은 환향(환곡으로 운용하던 군량)을 독촉하러 양주 의정리 김대순의 집에 가서 송아지를 대신 끌고 가다가 뒤쫓아 온 김대순을 길에서 만났습니다. 옥신각신하다 김대순이 서필홍을 넘어뜨리고 배에 걸터앉아 무릎뼈로 가슴 한복판을 짓찧고 송아지를 도로 빼앗았습니다. 김대순은 돌아가던 길에 친족 김태명의 머슴인 함봉련을 만나 서필홍을 가리키며 우리 송아지를 훔친 자이니 가서 뺨을 때려 주라고 했습니다. 함봉련은 땔감을 짊어진 채 서서 서필홍의 등을 떠밀었고, 서필홍은 밭에 쓰러졌다가 즉시 일어나 떠났습니다. 평창으로 돌아간 서필홍은 몇 되의 피를 토하며 ‘나를 죽인 사람은 김대순이니, 당신이 복수해 주시오’라는 말을 아내에게 남기고 죽었습니다. 정조 23년(1799년), 다산 정약용을 형조 참의에 제수한 정조는 ‘함봉련 사건’에 의문점이 있으니 상세히 살펴보고 대책을 마련하여 보고하라고 명했습니다. 함봉련은 서필홍을 죽인 죄로 12년째 복역 중이었습니다. 다산이 1차와 2차 검안서를 가져다 보려 하니 형조의 모든 사람이 말하기를 “이 사건은 벌써 10년이 넘어서 이제는 번복할 수 없는 확실한 것이 되었으니, 상세히 살펴보아도 도움이 될 게 없다”고 했습니다. 다산은 정조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서필홍의 등에는 명백히 상처 한 점도 없었으나, 서필홍의 가슴 한복판에는 검붉은 색을 띤 상처가 3치였습니다. 이 상처를 가지고서 이 사건의 주범을 찾는다면 누가 합당하겠습니까?” 다산은 주범으로 고소당한 김대순을 증인으로 삼은 점, 또 다른 증인으로 나선 이웃들이 모두 김대순의 친인척이고 이장 또한 김대순의 후원자인 점을 지적하며 재조사를 주장했고 결국 함봉련은 풀려났습니다. 그리고 김태명이 체포되었습니다.
정조는 즉위 직후 흠휼전칙을 반포하면서 형벌을 완화했습니다. 엄격하게 규정을 지키도록 해서 고문으로 죽음에 이르는 일이 없도록 한 것입니다. 그리고 사형도 곤장이나 유배로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그리하여 정조 시기에는 심리를 거쳐 내린 사형은 대상의 3.2%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선 전기에는 사형 범죄인의 90%이상이 사형을 당한 것입니다. 정조는 한 번의 재판으로 범죄인을 확정하지 않았고 의심스러운 사건을 재수사하였는데 얼마 안가 정조가 승하하자 순조 시기에 『흠흠신서』를 저술하였습니다. 정조가 백성들을 사랑했던 것처럼 정약용 역시 잘못된 관행을 바로 잡고자 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각종 책의 저술이었으니 『흠흠신서』는 그의 유배시절에 펴낸 역작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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